20세기 초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유래한 세계 여성의 날, 3월 8일. 해마다 기념하는 이 날을 맞이하여 여성 운동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일반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여성주의 관점의 연구서 세 권을 소개한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20세기 초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유래한 세계 여성의 날, 3월 8일. 해마다 기념하는 이 날을 맞이하여 여성 운동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일반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여성주의 관점의 연구서 세 권을 소개한다.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 여성 청년들이 살아가는 세계』
장민지 지음, 서해문집 2021.
‘라떼’는 집을 나오기 위해서 결혼을 했기에, 우선 책의 제목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저자는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남편 될 사람의 집을 찾아 나서는 여자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여성 이주 연구에, 결혼과 무관하게 이주하는 한국의 여성 청년들의 경험을 더한다. 이 여성들의 이주는 먼저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시작이 되었는데, 다양한 주거 형태를 경험하면서 부모도 남편도 아닌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집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대학에 오며 지방에서 서울로 이주를 했고, 자취에서 하숙으로, 다시 자취로 옮겨가는 생활을 대학 기간 내내 유지했기에, 이 여성 청년들의 경험을 읽으면서 나의 과거도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러나 나의 세대와 달리, 오늘날의 여성 청년들은 결혼으로 이주 생활을 마무리하지 않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의 배경을 199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경제적 변화와 여성 지위의 변화로 설명한다.
여성주의 관점의 연구이기 때문에, 여성 청년들의 경험을 기본적으로 억압으로 설명하는 점,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기 관리 혹은 자기 훈련으로 해석되는 일들도 자기 검열(감시와 통제)로 해석하고 있는 점 등은 이러한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오늘날 한국의 여성 청년들의 생활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눈치 보지 않는 나만의 공간은 해방감을 주지만, 외로움과 우울증을 관리해야 하고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편견에서도 자유롭지 않은 양가적인 상황에서 여성 청년들이 어떻게 ‘집’을 만들어 가는지를 저자는 보여 준다.
박사 논문을 책으로 엮은 거라 다소 딱딱한 부분들이 있지만, 인터뷰 중심의 연구서라 인터뷰 부분들만 읽어도 제법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특히 이 여성들이 어떻게 친구, 연인, 반려동물 등과 유사 가족을 만들고, 단골집을 통해 이주 생활에 마음 둘 곳을 만드는지,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가 어떻게 또 다른 집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마지막 장은 여성 청년들에게 집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마농 가르시아 지음, 양영란 옮김, 에코리브르 2022.
아마도 집을 나와 남편의 집이 아닌 자기만의 집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여자를 꼽는다면 그중에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있을 것이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어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가 최근에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이 책은 보부아르를 사르트르, 하이데거, 후설, 메를로퐁티 등과 나란히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의 사상을 설명하는 책인데, 정말로 쉽게 썼다!
저자는 프랑스인 여성 철학자로 원래 박사 논문으로 쓴 것을 프랑스어와 영어로 출판했는데, 연구 배경이 흥미롭다. 헌신적으로 자기 가족을 섬기면서도 그 헌신을 가지고 가족에게 죄책감을 유발하면서 다스리는 자기 할머니를 보면서, 만약 할머니가 여성으로서 그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족을 종처럼 섬기는 것이라면, 왜 할머니는 나의 아버지를 그토록 전통적인 지중해 남자로, 집안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밖에서 큰일을 할 남자로 키웠을까가 궁금했는데, 그러한 할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연구를 했단다. 그리고 잘 구상된 것은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프랑스의 격언을 따라 자기 할머니도 읽을 수 있게 글을 쓰고자 했고, 실제로 할머니가 읽고 자신이 연구를 통해 얻은 답에 동의했단다.
이쯤 되면 내용은 차치하고 도대체 얼마나 쉽게 쓴 철학 책인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책을 집어 드는 독자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이상의 스포일러는 생략하고, 천 페이지가 넘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읽기 부담스럽다면, 이 책부터 읽어도 좋을 것이다.1)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
필리스 체슬러 지음, 박경선 옮김, 바다출판사 2021.
이 책은 『여성과 광기』, 『여자의 적은 여자다』로 유명한 여성주의 심리학자이자 소위 ‘세컨드 웨이브’ 페미니즘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필리스 체슬러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쓴 자서전이다. 이 책은 서구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서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자매애의 허구를 몸소 체험한 것은, 국제연합 사무차장이었던 흑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일을 공식 항의하려 했을 때, 자칫 인종 차별로 보일 수 있다며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그 일을 덮었고, 그 후 그 그룹으로부터 속된 말로 왕따를 경험하면서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는 이러한 경험 배경에서 나온 책인데, 이 자서전에서 그 배후의 이야기들을 다 밝혔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그는 1960년대 말에 여성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모성, 자녀 양육권, 그리고 종교까지도 페미니즘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주류 페미니즘의 이슈로 통합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여성학에서 소외된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인 나에게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육성 고백은 색다른 자료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여성 운동과 여성주의를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 책을 소개하면서도 썼지만,2) 우정과 배신과 기대와 실망의 에피소드들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도 있었음을, 그럼에도 페미니즘의 비전은 여전히 유효함을 저자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또 다른 검열이 되는 때에 그가 어떤 친구들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즘을 만들어왔는지가 궁금하다면 한번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그는 유대인이다.
1)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양혜원, “다시 보부와르와 여성의 순종(submission)을 말하는 이유”, 「여성학논집」 38집 1호 (2021): 77-91.
2) “페미니즘은 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의 아포리아 풀기”, 「여성학논집」 37집 1호(2020),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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