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문답은 새로운 교회, 예수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일반 사회와 구별되는 신교육과 신윤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기가 보기에 옳은, 혹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한 방편이자 구별되는 표시로서 남자의 경우에 금주가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20년 후인 현재 상황에 이를 바로 적용하거나 현재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현실: 캐나다와 한국
작년 9월에 캐나다 비정부 연구소인 약물남용센터(CCSA)는 1일 두 잔을 권하던 이전의 권고 대신, 건강을 위해서 1주일에 0~2잔을 권장하는 65쪽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무리 적은 양의 알코올도 건강에 좋지 않다”며 기존의 지침을 크게 수정했다. 여성도 하루 한두 잔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단호히 배격하고, 가능하면 금주를 권했다. 담배처럼 술병에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문을 붙이기로 했다. 하키를 보면서 술을 마시지 않는 캐나다인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추운 캐나다에서는 세계 평균보다 음주량이 많다. 12살이 되면 20% 정도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성인의 80%가 술을 마시며, 16% 이상이 과음한다. 코로나 유행으로 음주량이 더 증가했다.
참고로 2017년 세계보건기구(WHO)의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성인 1인당 술 소비량(단위 리터)은 영국(12.3), 독일(11.4), 뉴질랜드(10.1), 캐나다(10.0), 미국(9.3), 스웨덴(8.8), 호주(5.4) 등이었다. 아시아에서는 라오스(10.6), 한국(9.8), 베트남(8.9), 일본(7.9), 중국(7.4), 캄보디아(7.0). 필리핀(6.6), 인도(5.9), 네팔(2.6), 싱가포르(2.0), 인도네시아(0.8). 파키스탄(0.1) 등이다. 아시아에서 술을 적게 마시는 나라는 이슬람 국가들이며, 한국은 인도네시아보다 5배 이상의 술을 마신다.
한국인은 캐나다인과 비슷하게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신다. 지난 55년간의 통계와 술 소비 변화를 살펴보자.
1966~2015년: 50년간 20세 이상 성인 인구는 3배 늘었으나 술 소비량은 5.1배 증가했고, 1인당 술 소비량도 1.7배 늘었다.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청장년들이 밀집해서 살고, 정치 경직화로 스트레스가 늘면서 “술 권하는 사회”가 “술 먹이는 사회”가 되었다.
2016~2019년: 아시아에서 한국은 1인당 술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 오명을 기록했다.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은 1년에 2리터 이하이나, 한국, 중국, 몽골 순으로 8~10리터를 마셨다. 한국인 성인 사망 질병 원인의 12%가 술이다. 건강을 위해서 나이가 들면 술을 줄이지만, 여전히 청장년의 술 소비가 늘었다. 특히 여성의 음주가 증가했으며, 술 수입 증가와 더불어 맥주, 와인, 양주의 소비가 급증했다. 영화, TV, 유튜브 등에 음주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과 지나치게 많은 술 광고도 청소년의 음주를 조장했다.
2020-2023년: 코로나19 유행으로 회식이 줄면서 전체 술 소비는 줄었으나, 코로나 블루의 확산과 함께 혼술이 늘었다. 지난해부터 규제가 풀리면서 다시 전체 술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인은 한 해 1인당 10리터 이상 술을 마신다. 지난 10년간 세계보건기구(WHO) 통계를 보면 잘사는 국가 중에서는 러시아 다음으로 1인당 술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ChatGPT에게 물어보면, 통계를 잘못 읽어서 한국은 술 소비량이 낮은 나라라고 말한다. 사실은 2016년에 술 소비가 잠시 줄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발생했다. 한국의 술 소비량은 동아시아에서 1등이다. 술의 천국이라는 일본에서는 노령화 등으로 술 소비가 감소하고 있으나, 한국은 더 많이 마시고 소비가 증가하고 있다. 소득 향상과 더불어 막걸리/소주에서 맥주/와인 음주로 트렌드가 바뀌었다. 개신교인들도 와인을 자주 선물하고, 맥주 음주를 문제 삼지 않게 되었다. 한국도 캐나다와 같은 강력한 경고와 음주 자제를 권장할 필요가 있으며, 교회나 기독교 단체의 노력이 요구된다.
한국 개신교의 전통: 강력한 금주 정책을 1960년대까지 유지
1) 1885~1919년
한국에서 북장로회는 1895년부터 세례를 받는 조건의 하나로 “술 취하지 말고, 잡기(노름) 하지 말고, 아편연을 먹거나 팔지 말라. (자신과 남의 행실 방해하지 말라)”라고 요구했다.1) 이는 19세기 미국 금주 운동과 연관이 깊었다. 음주는 범죄, 가정 파탄, 빈곤과 동일시되었고, 19세기 말 동유럽 가톨릭 신자들이 대량 이민과 음주의 증가로 도시의 범죄가 증가하자, 술은 사회악의 제1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금주 운동은 사회 운동으로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가정의 가치와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한 운동이 되었는데, 여성기독교절제연맹(WCTU)은 이를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북감리회는 1890년에 올링거가 완전 금주를 주장했으며, 1897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12회 한국선교회 연환회(연회)에서 모든 교인은 무슨 술이든지 한두 잔도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완전 금주론을 결의했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6월 23일 이를 보도하면서 “계주론” 논설을 실었다. 6월 30일 논설에서도 연속하여 완전 금주를 주장했다.2)
1899년 독립신문은 인민의 위생과 건강을 위해서 완전 금주와 금연을 지지했다. 그해 이화학당 당장 페인(Josephine O. Paine)과 교사 프라이(Lulu E. Frey)가 편역한 생리학 교과서인 『전톄공용문답』(全體功用問答, Lessons on the Human Body, 1899), 곧 전체 몸의 공용(기능)에 대한 문답서가 출판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신문은 이 책에 실린 담배와 술에 대한 장을 소개하면서, 인민의 위생을 위해 금주 금연을 주장했다. 곧, 건강한 국민이 있어야 자주독립 근대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주 금연이 개인의 위생과 건강을 넘어 근대 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필요했다. 따라서 선진 서구 국가들보다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대한에서는 술 담배 문제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가족은 물론 국가의 문제였다.3) 이 글의 결론 부분은 충격적이다. 당시 “대한 아이들은 담배를 아니 하는 아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인이 박이기 전에 금연 운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1890년대 담배를 피우고 아편연을 피우던 아이들은 지성의 미발달로 인해 일제 식민지 시절에 고생을 했을 것이다.
장로회, 감리회, 개화파 등 한국의 진보 세력 모두 개인, 가정, 국가를 위해서 완전 금주 금연을 주장했다. 감리교회가 금주에 더 적극적이었다. 1903년 신학월보에 실린 “금주 문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4) 평양의 이은승 목사는 평남 강서군 함종읍의 양반 김주련의 여섯 가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첫째, 술을 끊기 어렵다는 질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술을 끊을 수 있다. 둘째는 술을 먹지 않으면 죽겠다는 질문에,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셋째, 조금씩 먹고 취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에, 작은 죄가 큰 죄로 발전한다. 넷째, 바울이 디모데에게 술을 조금 마시라고 한 것은 약용으로 사용하라는 말이었으며, 술 마실 마음으로 성경을 오해하면 죄에 빠진다. 다섯째, 술을 마시는 것이 죄인 이유는, 술을 마시면 자기 마음대로 행하다가 죄를 짓게 되며, 거룩한 성전인 몸을 더럽히게 된다. 여섯째, 성경에는 술 취하지 말라고만 하고 먹지 말라 한 말이 없지만, 지금 사람들은 자기가 즐기는 것을 다 하면서 예수교를 하려고 하므로 술이 유익하지 않은 것을 알고도 양심을 어기고 술을 마시다가 죄를 짓게 된다. 이 문답 후 김주련은 금주 맹세문을 짓고 술을 끊었다.
초기 감리교회의 강력한 금주 정책을 보여주는 문답이다. 김주련은 유불선 삼도와 각종 종교서적을 읽으며 30년간 천주교 신자로 있다가 이 무렵 개신교로 개종했다. 유교나 천주교회는 금주를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애주가였던 그가 개종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금주 문제였다. 그는 사경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강사인 평양감리교회 목사 이은승과 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애주가의 질문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이고 성경적이지만, 교회의 답변은 포괄적이고 사회학적이고 교회론적이며 신학적이다. 문답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사실 이 목사의 사회학적/교회론적 답변에는 역사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한다. 곧, 1903년 4월호에 실린 금주문답은 그 앞에 나오는 함종읍감리교회의 여러 기사 중의 하나이므로 그 전체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기사 1) 1902년 8월 속장 이교담을 비롯 교인 100여 명이 자급으로 아홉 간의 예배당을 새로 지은 이야기. (기사 2) 이때 소실(첩)이었다가 이를 청산하고 혼자 살며 교회 나온 박씨 부인 이야기. (기사 3) 귀신이 나가고 영육 간에 건강을 되찾은 장문식 이야기. (기사 4) 읍내에 세운 여학교 이야기, 그리고 읍교회의 사경회 이야기(이은승 목사 인도)에 이어서 나오는 기사. (기사 5) 금주 문답, 그리고 (기사 6) 술 문답 맹세문, (기사 7) 함종 세 곳에 교회 일어남 등이다.
따라서, 금주문답은 새로운 교회, 예수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일반 사회와 구별되는 신교육과 신윤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기가 보기에 옳은, 혹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한 방편이자 구별되는 표시로서 남자의 경우에 금주가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20년 후인 현재 상황에 이를 바로 적용하거나 현재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 당시 교회의 금주 운동과 대조적인 한 인물의 행태를 살펴보자.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 박중양은 희대의 친일파였다. 1905년 진주 시장이 되자 진주성 돌을 팔아먹었고, 1906년 경북 도지사가 되자 대구성 돌을 팔아 거액을 챙겼다. 1907년 6월 평양 도지사가 되자 박중양은 일본인을 접대하기 위해 기생집에서 일본 맥주를 마시고 뱃놀이를 하며, 육자배기 노랫가락을 뽑았다. 일본인 관리 최대 주량이 38병, 박중양은 40병을 마셨다. 그는 한국인의 소송은 무시하고 바른 것은 어긋나다, 어긋난 것은 바르다고 판결하여 일본인을 도왔다. 건축비에서 천 원, 토지 보상비에서 천 원 하는 식으로 돈을 착복하며 부자가 되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그가 개똥이나 돌이나 구분하지 않고 연한 것이나 강한 것을 마구 먹기에 “식성은 盲豚(맹돈)”이라고 비판했다.5) 며칠 후 대한매일신보는 다시 박중양의 부패를 거론하며, 판공비로 상점에서 삼판주(三判酒)와 맥주, 양 과실 등을 사 먹은 것이 4,200원에 이른다고 비판하고, “錢(전) 먹는 불가사리, 酒(주) 먹는 전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6) 박중양이 자신의 친일 행위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다른 데 돌리기 위해서 사용한 게 맥주였다. “일본 맥주라서 잘 넘어간다”라고 떠벌리며 자신의 주량을 과시하고 노래 실력을 뽐냈고, 사람들은 일본 맥주가 부러워서 박중양하면 조선 최고의 애주가요 음주가로 부르고, 일본 맥주만 생각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수법이었다.
당시 중국 개신교에서는 강력한 금연(禁煙)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패가망신과 망국의 원인인 아편연(阿片煙)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성경에는 아편연을 금하는 구절이 없지만, 아편 무역을 반대한 선교사의 정책과 아편연으로 인한 중국 사회의 피폐상을 개혁하기 위한 사회운동 차원에서 교회는 금연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와 달리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금주 정책이 강했는데, 이는 담배보다 술이 가정을 파괴하고(가정 폭력, 노름, 여성 차별) 나라를 망치는 사회악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19세기 말 미국의 절제운동, 특히 여성들의 금주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한국에서는 1920년대 문화민족주의 운동의 한 갈래로 강력한 금주 금연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해방 후 건국 운동 과정과 6.25 전쟁 후 재건국 과정에서 절제 금주 운동도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2) 1920년대
술 담배를 적극 권한 것은 일본 총독부였다. 청년들의 정신과 의식까지 식민지화해서 저항 의식을 죽이고 독립 정신을 말살하려고 공창과 기생집을 허용하고, 술 판매를 권했으며, 모르핀, 아편연, 담배에 대한 국가 독점 전매 제도를 채택하여 적극 선전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러한 총독부의 마약, 술 정책이었다.
1920년대는 자살의 시대였고, 청년들이 마약으로 몰려가던 시대였다. 모르핀 중독자가 1만 명으로 증가했다.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금주, 금연, 항마약의 절제 운동, 반공창 운동을 전개했다. 도덕적인 문제나 성 문제에서 교회는 늘 신속하게 반응했다. 특히 개신교 여성들이 조직한 전국적인 운동인 절제 운동, 반공창 운동은 조선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과 더불어, 1920년대 문화민족주의 운동의 큰 줄기였다. 금주로 절약한 돈을 자녀 교육에 쓰자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금주 운동이 힘을 얻어 1920년 알코올음료의 생산, 판매 및 운송을 금지한 미국 수정 헌법 제18조가 발효되었다. 술 대신 커피가 대중의 음료가 되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전날 밤 술로 인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보다, 아침 커피 한 잔으로 맨정신으로 일하는 문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고수익의 밀매가 늘고 음주가 증가하자 1933년 이 법은 폐지되었다. 이후 공장에서 만든 화학주의 생산이 급증하면서 값싼 저질의 알코올 소비가 급증했다.
1920년대 찬송가에 들어간 다음 “금주가”를 보면, 미국 금주운동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즉 후렴에 나오는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이나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구절은 미국에서 1900년대에 널리 사용한 금주 구호였다. 참고로 19세기 미국 금주운동의 금주가를 보면 벌하시는 하나님과 구약적 율법과 죄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고, 20세기에 오면서 사랑의 예수님과 신약의 용서와 새로운 삶의 이미지가 강하다. 사실 한국에서도 1920년대 사회 복음(social gospel)이 강조되면서, 1900년 전후 금주 문답에서 강조한 술과 죄의 문제보다, 금주로 인한 가정의 화목과 자녀 교육과 학교 설립을 강조했다.
지난 50년간 한국 개신교: 강력한 금주 정책에서 점차 후퇴
도시화, 상업화로 노동 강도가 높아지고 이농하여 기존 농촌 공동체를 상실한 도시 빈민, 노동자들은 고독과 애환과 스트레스를 술로 해소하였다. 이로써 술 소비가 급증했다. 남자들은 20대에 군대에 가야 했고, 군대 술 문화로 사회화가 되어, 제대 후에도 술을 끊지 못했다. 197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경제로 인해 기업이 급성장했는데, 중소기업이나 재벌 기업을 막론하고 퇴근 후 회식 문화가 발전하면서, 2차, 3차로 과음하고 접대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음주가 늘었다. 이러한 술 권하는 사회에서 교회는 해방 이전 금주 규칙만을 제시하였는데, 군대와 기업에서 금주 조항을 지키지 못한 개인에게 책임을 물었지, 교회 차원에서 음주에 대한 문화신학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이는 주일성수 문제에 대한 대처와 유사했다. 1960년대까지는 주일에 버스나 택시를 타지 못하게 했으나, 1970년대 이후 자가용 문화가 확산되고, 교회가 교회 버스로 교인을 경쟁적으로 운송하게 되면서, 자가당착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주일에 일하지 말라, 주일에 돈을 사용하지 말라는 규칙을 슬그머니 버렸다. 그처럼 금주 조항도 사문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이상 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를 넘으면서 한국 개신교인에게도 맥주와 포도주를 즐기는 이들이 등장했다. 목사들도 포도주를 선물하는 게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에서 포도주학을 가르치고, 와인샵이 도처에 존재하며, 와인 문화가 중산층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교회는 이런 변화에 대해서 구체적 반응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침묵하거나, 각자도생의 입장에서 알아서 하도록 방치했다. 침묵이나 행동 없음은 곧 현상을 수용한다는 뜻이며, 현상의 도전에 굴복한 것이다.
맺는 말
금주 금연 문제는 사회 문화 운동 차원과 함께 보아야지, 성서주석적, 신학적, 교리적 접근으로만 하면 어중간한 해석이 된다. 성경에 담배나 구체적인 마약 이름을 언급하며 금하는 구절이 없지만, 일반 사회에서도 이를 금한다. 성경에 술을 완전히 금하는 구절이 없지만, 20세기 초 주막이나 기생집이나 노름판에서 이루어지던 한국 사회의 술 문화(남성의 폭력+가산 탕진+가정 폭력 등), 1980년대 직장의 회식과 술 3차 문화, 그리고 21세기 초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부부가 와인을 마시는 문화가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 술을 금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성경에 술 마시는 것이 죄라고 한 구절이 없으므로, 술을 마셔도 좋다는 이해가 바로 성서문자주의(biblicism, literalism)이다. 동시에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구절을 가지고 술을 절대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성서문자주의이다.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 좋다.
20세기 초 한국 감리교회나 장로교회의 정책은 금주 금연 문제에서 문자주의가 아닌 자유로운(사회 문화적 요소를 고려하는) 성서 해석의 입장을 견지했다. 금주가 보수적인 복음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이는 오늘날 와인과 맥주를 마시는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의 성서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황에 맞는 해석을 했다. 따라서 한국 초기 교회의 전통도 아름답고 존중할 것이요, 오늘날 문화로 자리를 잡은 포도주와 맥주 음료도 완전히 금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음주 문화는 지나친 면이 있다.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은 술을 금하고 적게 마실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지금의 입장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현재주의는 늘 위험하다. 초기 한국 개신교회는 사회 참여, 사회 개혁 운동 등에서 성서 문자주의가 아니었다. 조상 제사 금지, 금주 금연 외에도 가족과 결혼 문제-일부다처제, 조혼, 이혼-등에서 성경 구절만 가지고 논하면 해결책이 없다. 이는 작금의 동성 결혼 문제와도 연결된다. 우리는 먹거나 마시거나 무엇을 하거나 형제자매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건강을 위해서 되도록 금주하며,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실천하는 것이 좋다. 캐나다 약물남용센터의 권고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이다. 금주는 기독교인들의 진보적인 선택이다.
1) John Nevius 저, 마포삼열 편역, 『위원입교인규됴 爲願入敎人規條』, 1895.
2) “계쥬론,”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897. 6. 23; 1897. 6. 30.
3) “담배와 술”, 『독립신문』, 1899. 4. 19.
4) “금주 문답”, 『신학월보』, 1903년 4월.
5) “不問可知”, 『大韓每日申報』, 1907. 9. 6.
6) “所聞種種”, 『大韓每日申報』, 190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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