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이상의 협상에도 북한의 핵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외교 정책 전략가 헨리 키신저는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중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견제할 것을 제안했다. 닉슨 대통령은 ‘핑퐁 외교’를 구사하며 한국전쟁의 적성국이었던 중국과 교류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본문 중)
윤은주(뉴코리아 대표)1)
1989년 미국과 소련의 탈냉전 선언 이후 시작된 미국 중심의 단일 패권 국제 질서가 휘청거리고 있다. 2011년 오바마 행정부가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발표하고 대중국 견제에 나서면서 이런 변화가 가시화됐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외교 전략을 전담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대중국 봉쇄 전략에 있어서는 트럼프 정부가 내세웠던 자국 우선주의 고립 정책과 별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한·미·일 삼국 동맹 체제로 전환하려고 한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일 동맹을 미·일 동맹의 하부 구조로 위치시키려는 데 있다. 미국은 대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일 동맹 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과거사 문제는 대충 덮고 나가자는 식이다. 미국이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고 있나?
이미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한반도 안보 상황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경고해 왔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사드를 들여오고, 한·일 간에 군사 정보 보호 협정인 지소미아(GISOMIA)를 체결했던 2016년에도 같은 우려를 했다. 북한의 핵 위협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대중 압박이라는 미국의 이해를 반영한 조치들이기 때문이다. 무리해서 사드 체제를 구축하자 우리 기업들은 중국의 보복을 감내해야 했다. 30년 이상의 협상에도 북한의 핵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외교 정책 전략가 헨리 키신저는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중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견제할 것을 제안했다. 닉슨 대통령은 ‘핑퐁 외교’를 구사하며 한국전쟁의 적성국이었던 중국과 교류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중국과 미국의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자 키신저는 이번에는 러시아를 중국과 분리시키는 대응을 하라고 조언했다. ‘역 키신저 전략’이라고도 부른다. 그렇지만 미국은 유럽 안보를 위한 나토(NATO)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러시아를 자극했고, 작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한 이후 미군의 직접 파견은 피하고 있다. 바이든이 트럼프와 달리 동맹을 강조하는 까닭은 미국 우선주의를 철회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로 활약할 형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단일 패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념 대결이 끝났다는 탈냉전 선언 이후로도 미국인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그대로 남아 있고, 정치인들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한·미·일 동맹이 필요한 이유를 북·중·러 위협론으로 거론하며 ‘신냉전’을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은 전쟁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됐다. 4천만 인구 우크라이나에서는 8백만에서 1천만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1천만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는 돈바스 지역은 러시아 연방으로 갈라졌다. 한마디로 우크라이나는 동과 서로 두 동강이 난 것이다. 1년 넘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해법은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한반도와 같은 ‘분쟁 지역화’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전쟁의 불씨를 살려 둔 휴전 협정 체결 방식이다. 우방국 미국에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미래를 의탁할 수 있을까?
올해는 한국전쟁의 휴전 협정이 체결된 70년 되는 해이다. 시민사회에서는 3년 전부터 한반도 평화 캠페인을 진행해 오고 있다. 종교계 7대 종단과 국내 370여 단체와 70여 개 국제 파트너 단체가 함께하는데, 현재 약 14만 5천여 명이 서명했다. 7월 27일 휴전 협정 체결일을 앞두고 유엔을 비롯한 남·북·미·중과 한국전 관련국들에 서명을 전달하며 전쟁 종식을 호소할 계획이다. 한국전쟁을 끝내고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군비 경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자는 등의 주장이 실려 있다. 현실주의가 팽배한 국제 정치에서 이상적인 주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국민의 안보와 경제활동을 보장해야 할 국가가 마땅히 성취해야 할 미션이다.
올해에도 3월 13일부터 23일까지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다. 미국의 핵 추진 항공모함과 B-1B 등 각종 전략 자산들이 총출동하여 한반도 주변 공해(空海)를 제압하는 군사 작전을 실험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이 명분을 제공했지만,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군사 협력(군사 동맹을 지향하는)이 숨은 목적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예년과 다르게 훈련 시작 바로 전날 잠수함 발사 순항 미사일(SLCM) 실험을 강행했다. 2019년 미국과의 핵 담판에 실패한 김정은은 2022년 제8기 전원회의에서 “강 대 강 정면 승부”를 선언한 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 실패는 한반도를 어느 때보다 더 큰 안보 위협에 빠트리고 있다.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지만, 세계 각 지역의 분쟁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고 있다.
북한을 관리하고 미국을 설득해야 할 윤석열 정부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에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안보를 명분으로 한·미·일 군사 협력을 무리하게 추진한다면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우리 국익을 관철할 수 없다. 우리의 국익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이다. 남·북 관계와 국제 관계는 태생부터 맞물려 있다. 그렇기에 냉혹한 국제 사회 현실을 간파하고 국익 중심의 외교 전략을 치밀하게 펼쳐야 한다. 정권이 국민을 배반하지 못하도록, 미·중 패권 경쟁 때문에 과거 역사가 저당 잡히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파수꾼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헌법 제1조의 규정이다. 각성된 국민의 조직적 연대로 전쟁의 기운이 밀려오는 한반도를 지켜야 한다.
1)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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