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철학 개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실용주의는 매우 폭넓은 사상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생각과 의미가 담긴 개념이다. 특히 미디어나 통상적 담화에서 ‘저비용 고효율’이나 ‘이념보다는 실용으로!’와 같은 속류적, 정치적 문구들로 실용주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이 개념은 일종의 가벼운 이념 정도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고도의 철학 개념이다. (본문 중)

김동규1)

 

다른 철학 개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실용주의는 매우 폭넓은 사상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생각과 의미가 담긴 개념이다. 특히 미디어나 통상적 담화에서 ‘저비용 고효율’이나 ‘이념보다는 실용으로!’와 같은 속류적, 정치적 문구들로 실용주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이 개념은 일종의 가벼운 이념 정도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고도의 철학 개념이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개념이 1870년대 이후 미국 철학의 일련의 흐름에서 나왔다고 보며, 그 후로도 여러 변형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는 주요 철학 학파 또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요한 사상가로는 찰스 샌더스 퍼스, 존 듀이, 윌리엄 제임스, 리처드 로티 등이 있으며, 이들은 철학적 인식론이나 형이상학에 대한 논쟁적 견해를 제안했을 뿐 아니라, 윤리학, 정치철학, 종교철학, 미학, 문학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용적인 제안을 해 왔다.

 

실용주의의 기본 방향을 이해하려면, 우선 퍼스가 제시한 ‘실용주의의 준칙’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개념의 대상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실제적 영향과 그 영향이 미칠 결과를 고찰해 보자. 이 결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 전체다”(Peirce 1998, 135). 이러한 준칙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꾼다. 우리는 보통 개념이 현상의 본질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지, 개념과 현상이 얼마나 잘 일치하는지를 따라 진리를 결정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의 진리관은 대상에서 비롯하는 실제적인 결과나 효과가 개념적 진리를 형성한다고 본다. 붉은색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까? 애초부터 붉은색의 이데아가 있고, 우리가 그것에 참여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붉음의 효과를 경험하고 거기에 붉음이라는 관습화된 언어를 부과한 것인가? 조개껍데기가 딱딱하다고 하면 딱딱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것은 딱딱함의 초월적 관념이 아니라 내가 딱딱한 대상을 만져 봄으로써 그 만짐의 영향을 따라 개념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사고방식이 실용주의적 진리관의 요점이다. 즉, 진리는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영향과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초월적 실재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대체로 “실용주의자들은 영원불변하며 초역사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식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것이 ‘현금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질 때 의미를 갖는다”(이유선, 2008, 15).

 

여기서 말하는 ‘현금 가치’를 자본주의적 이윤에만 국한하여 볼 필요는 없다. 한 예로 교육철학에서 일대 진전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는 철학자 듀이는 실용주의적 교육관을 제시하면서, 참된 교육은 삶의 현실에서 실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실용주의가 말하는 ‘현금 가치’는, 사변적인 논쟁보다는 실제적인 삶의 상황에 도움이 되며 인간 번영에 이바지하는 탐구와 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개념이며, 실용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사회가 효과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실용주의자들에게는 어떤 지향점이 있다. 인간 삶의 번영과 같은 다소간 모호한 관념이 그들의 지향점인데, 이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게 민주주의의 확장과 현실화에 관한 관심이다. “지금까지 있어 온 모든 민주주의 운동은 국가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시민이 자신에게 속한 권리를 보증받을 수 있다는 유효한 통찰을 따라 이루어져 왔다”(John Dewey 1993, 61). 즉, 민주주의야말로 우리 삶의 번영을 위한 실제적인 유용한 제도이므로, 실용주의자들은 국가는 모든 시민, 곧 성별이나 장애 유무, 인종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자기의 고유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권력을 실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철학 역시 이러한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론적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교육은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한 가장 좋은 방편이다. 이처럼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 다시 말해 삶의 번영을 위한 민주주의적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비전은 대체로 모든 실용주의자가 공유하는 비전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급진적인 실용주의자 로티는, (특히 듀이를 재해석하면서) “철학보다 민주주의에 우위성을 두는 미국인의 습속”(Rorty 1990[2017], 73-75)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종교와 관련해서도 실용주의는 흥미로운 제안을 해 왔다. 종교와 관련해서 가장 직접적인 연구를 실행한 실용주의 철학자로는 윌리엄 제임스가 있지만, 듀이와 로티 역시 종교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다. 제임스는 종교학과 종교철학 분야에서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고 해도 좋을 『종교 체험의 여러 모습들』이라는 책에서 종교를 신 존재의 증명이나 절대성보다는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을 기반으로 삼아 이해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여기서 제임스는 형이상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종교철학이나 신학의 관습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종교 체험이 행복감을 안겨 줄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체험을 기술하고 반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다. 즉, 실천적으로 우리에게 유의미한 종교의 기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지속적 즐거움이 우리의 그런 행복한 실존 상태를 하나의 선물로 보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일종의 종교를 낳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적 실존 상황이 불행한 것일 때,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여러 종교의 종교 체험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행복을 낳게 해주는 길, 즉 초자연적 행복으로 인도해 주는 놀라운 내면의 길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James 2002[1997], 66[111-12])

 

 

미국의 사회복음 운동으로 유명한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의 외손자이기도 한 로티는 형이상학적 진리로서의 종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나, 종교의 실천적 기능을 문학적 문화로 이양하는 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신의 실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로티는 무신론을 견지하며, 종교보다는 종교적인 것이 줄 수 있는 삶의 번영이나 행복에 더 관심을 둔다. 이때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에서 중히 여기는 내세의 삶보다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의 삶을 위해 종교적인 것을 활용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실용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감소시키고 평등은 증가시켜 모든 아이가 동등한 행복의 기회를 부여받은 상태에서 삶을 시작할 가능성을 증가시킬 방법을 고안해 내는 일이다.…이런 목적은 그것을 위해 죽을 만한 가치를 지니지만, 초자연적 힘의 지지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Rorty 1999, xxix)

 

이렇게, 종교의 초자연적 힘을 인정하는 것과 상관없이, 종교는 인간 번영을 위해서 세속화된 형태의 신앙으로 기능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이웃 사랑과 같은 종교적인 것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기능할 수 있다. 즉, 형이상학적 신학은 실제적으로 큰 위력이 없지만, 신앙의 삶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사회 번영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 로티는 말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것이 유일한 율법이라고 종종 말한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에서는 사랑의 친절로 이웃의 필요를 대함으로써 이웃을 돕는 의무가 최우선적인 일이다. 신조의 진술이나 예배 행위는 이 최우선 의무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타인을 위한 봉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봉사만이 신에 대한 봉사로 간주되며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교를 해석한다면 밀의 공리주의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를 재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Rorty 1996).

 

말하자면 로티에게 종교는 전통 종교에서 믿는 절대자나 현재와 미래의 구원, 내세에 대한 신앙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의 사람들의 번영을 위한 민주주의의 확장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진보를 향한 열망 같은 것이다. 그 점에서 이웃 사랑을 최고의 삶의 덕목이자 율법으로 삼는 종교적 삶은 현재의 삶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실용주의와 그 전망이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것이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함께 고민해 보자. 일견 실용주의의 관점은 종교적 신앙이 견지하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나 종말론적 신앙과 같은 것, 경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존중 같은 것이 실천적으로만 유의미할 뿐 그 실재성이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신론을 넘어 반(反)유신론적 태도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그런 진부한 비판적 접근보다는 실용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비전, 곧 민주주의의 발전과 모든 시민의 삶의 번영을 위한 사회적 진보에 대한 열망에 초점을 맞춰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실용주의자들은 ‘현금 가치’와 같은 논쟁적 용어 때문에 소비 사회 이데올로기나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태도를 벼리어 내는 철학자들로 쉽게 오해받는다. 또한, 종교인들이 보기에 실용주의는 무신론을 넘어 반종교적이고, 진리에 대한 엄숙함과 경건한 태도를 잃어버린 속된 이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일련의 엄숙주의나 경건성과 결별했다고 해도, 사회 진보와 개인의 행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진지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말하자면, 그들은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 행복에 누구보다도 더 진심 어린 태도로 다가간다. 또한 일차적으로 자기들이 속한 미국 사회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그 어느 곳보다 더 잘 보장하고, 아이들이 그런 자유로운 사회 질서 속에서 행복하게 자라나길 소망하는 게 바로 실용주의자들의 믿음이고 비전이다. 이런 진보와 행복 속에서 성별이나 장애 유무, 인종 같은 것은 걸림돌이 될 수도 없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도 없다. 그들이 보기에 차별의 동력을 제공하는 근원에 형이상학적이거나 강한 종교적인 확신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정 성별이나 인종, 장애를 존재론적 불완전성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쉽게 차별의 길로 들어서고, 이런 관념이 우리를 진보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실용주의는 그 특유의 탈형이상학적 관점 덕분에 애당초 그런 차별과 배제, 권리 박탈이 가능한 근거 자체가 공공의 담론에 들어설 여지를 막는다. 즉, 실용주의는 행복을 가로막는 모든 형이상학적 선입견과 편견과 싸운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그들의 민주주의를 이상화하는 태도나 진보에 대한 열망이 종교적이지 않냐고 말이다. 물론 이 역시 다소간 종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에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숭배나 믿음이 따로 상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종교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실용주의자들은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불필요한 형이상학적 진리와 교의에 대한 집착이 민주주의의 퇴행과 차별, 이 땅에서의 개인의 불행을 가중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가 종교적 이유로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코로나 백신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성별과 인종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특정 종교적 믿음에 대한 지지 여부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한다. 어쩌면 실용주의자들은 차별과 혐오 발언을 일삼으며,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거부 운동까지 벌였던 그리스도교 극우파 세력을 보며 씁쓸하게 웃으면서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실용주의의 백신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실용주의자들에게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그들의 민주적 삶에 대한 열렬한 헌신적 태도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견지하는 교리와 인간 및 세계-내-삶에 대한 태도가 혹시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에 실제적으로, 실천적으로, 실용적으로 무익한 것은 아닌지 물으면서 말이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문헌

 

Dewey, John (1993). “The Ethics of Democracy.” In The Political Writings, 59-65. Indianipolis: Hackett.

 

James, William (2004).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A Study in Human Nature. Centenary Editi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국역본: 󰡔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연구󰡕. 김성민·정지련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Peirce, Charles Sanders (1998). “The Maxim of Pragmatism.” In The Essential Peirce: Selected Philosophical Writing (1893-1913). Edited by the Peirce Edition Project, 133-144.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Rorty, Richard (1996). “Is There a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1996년 5월 리치먼드대학교 강연. 유튜브에 업로드된 강연 영상에서 인용함. (https://www.youtube.com/watch?v=s3enH7ntOAM 2023년 3월 8일 접속.)

 

Rorty, Richard (1999). “Relativism: Finding and Making.” In Philosophy and Social Hope. Lonond/New York/Victoria/Toronto/Auckland.

 

Rorty, Richard (1991). “The Priority of Democracy to Philosophy.” In Objectivity, Relativism, and Truth: Philosophical Papers, 175-196.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국역본: 리처드 로티, 『철학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선성』. 강은교·김은정·김지윤·신우승·유연정·윤영경·정민재. 전기가오리, 2021.

 

이유선 (2008). 『실용주의』. 파주: 살림출판사.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문의나 제안, 글에 대한 피드백을 원하시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편집위원과 필자에게 전달됩니다.
_

<좋은나무> 카카오페이 후원 창구가 오픈되었습니다.

카카오페이로 <좋은나무> 원고료·구독료를 손쉽게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_

 

 

 

 


관련 글들

2024.12.12

묵시문학의 덫, 의도된 모호성(기민석)

자세히 보기
2024.11.06

국내 최초, 손으로 보는 AL 촉각 성경 지도(정민교)

자세히 보기
2024.11.01

피정,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김홍일)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