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아드』에서 늙은 존 에임스 목사의 눈에 보이는 라일라는 마냥 신비롭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존재다. 그러나 『라일라』에서는 라일라의 속내가 다 드러난다. 에임스 목사에게 너무나 뜻밖이고 쿨하게 보였던 라일라의 청혼은 라일라의 관점에선 좀 다른 사건이었다. 그것은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메릴린 로빈슨의 소설 『라일라』1)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소설 『길리아드』2)의 주인공 존 에임스 목사의 젊은 아내 라일라의 사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소설과 후속작 『홈』3)에서 『길리아드』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사정을 웬만큼 짐작할 수 있었지만, 라일라의 경우만은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젊은 시절 아내를 출산 도중에 아이와 함께 잃고 오랜 세월 외로움을 견디며 성실하게 교회를 이끌고 교인들을 섬겨온 존 에임스 목사에게, 새처럼 날아온 라일라는 마치 그동안의 인내의 세월에 대한 보상처럼 늘그막에 주어진 커다란 선물이었다. 불쑥 마을에 찾아와 살다가 어느 날 비를 피해 예배 도중의 예배당으로 들어와 존 에임스 목사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라일라. 나 같은 독자를 염두에 둔 것 마냥 작가는 『라일라』에서 그녀의 과거와 속내를 세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런데 라일라가 존 에임스 목사를 만나게 되는 장면은 의외로 이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한다. 작가는 라일라와 노목사가 만나 관계가 깊어져 가는 과정을 라일라의 과거 사건들과 교차해서 펼쳐나간다. 한 사람이 다 감당하기에는 참 어려운 여러 시련을 겪었던 한 여인이 어떻게 노목사를 사랑할 뿐 아니라 신뢰하기에 이르는지 아름답게 그려나간다. 일단, 라일라가 길리아드에 오기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정리해 보자.
돌(Doll)이라는 사람
라일라의 과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돌이다. 어느 날 돌은 쇠약한 상태로 집안에 방치되어 있던 어린 라일라를 납치한다. 그리고 라일라를 열심히 돌보아 건강을 회복시키고는 엄마처럼 데리고 다니면서 기른다. 돌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떠돌이 노동자이면서도 라일라를 한시도 떼어놓지 않고 끼고 살다시피 한다.
아이를 찾아 쫓아올지 모르는 가족들을 따돌리기 위해 계속 이동하는 그녀였지만, 라일라가 학교에 다니며 쓰기와 셈을 배울 시간을 주려고 꽤 오랜 시간 한곳에 머물기도 한다. 어느 집의 입주 식모 일을 하면서 말이다. 아이의 장래에 대한 관심과 애정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라일라는 이후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 외에도 작가는 돌과 라일라의 특별한 관계를 그려내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라일라에게 돌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다. 라일라의 보호자이자 엄마 같은 인물이면서도 가족의 품에서 라일라를 훔쳐낸 납치범이기도 하다. 돌이 라일라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적 형편이 아주 어려워졌을 때 라일라를 버리고 떠나기도 한다. 며칠 만에 라일라에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후 둘의 관계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돌에 대한 라일라의 절대적 신뢰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돌은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라일라를 돌보기 힘들겠다 싶어지자 어느 노인에게 라일라를 신부로 주려고 한다. 노인의 심경 변화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라일라로서는 또 한 번의 배신이었던 셈이다. 결국 돌은 살인을 저지르고 보안관에게 체포된 후, 자기를 찾아온 라일라를 모른다고 말한다. 라일라는 주변을 돌면서 돌을 계속 챙기고 싶어 했지만 라일라를 거부하고 외면한다.
돌이 라일라에게 보여준 헌신적 사랑과 배신, 결정적 순간의 유기와 부정.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라일라가 돌에 대해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을지, 라일라가 이후 참된 사랑에 얼마나 목말랐을지, 그러면서도 사람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유곽 생활
돌과 헤어진 후 라일라는 혼자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막막한 상황에서 그녀는 한 가게 주인의 소개로 자기 같은 여자들을 위한 시설을 찾아가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유곽이었다. ‘신사들’에게 돈을 받고 공연을 보여주고 그들을 기쁘게 해주는 곳이었다.
라일라는 거기서 여러 해를 지낸다. 하지만 그녀는 신사들을 즐겁게 해주는 쪽으로는 재주가 없었다. 관리자인 ‘미시즈’가 원하는 표정이나 행동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미시즈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신사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 좀 치우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라일라는 여전히 사랑에 굶주린 처지였고 사랑을 갈구했다. 미시즈는 거기 있는 처녀들에게 소중한 물건을 맡기라고 한다. 안전하게 보관해 준다는 약속과 함께. 하지만 그것은 처녀들을 붙잡아 두고 통제하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라일라는 돌에게 받은 유일한 물건, 유품 같은 칼을 미시즈에게 맡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맡기면 자기를 사랑해 주고 인정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믿음과 사랑을 얻기를 바란 것이다. 그만큼 사랑에 목말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헛된 꿈이었다.
유곽에 있을 때 라일라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라일라에게 눈길을 주고 관심을 준 고객, 맥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아가씨는 미시였지만, 지나가며 장난처럼 라일라에게 웃음을 흘리고 칭찬의 말을 해서 라일라의 마음을 갖고 놀았다. 라일라는 맥의 행동이 아무 의미가 없는 줄 잘 알면서도 그의 손길과 웃음, 말에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일라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다. 육체노동이었다. 난방용 석탄을 채워 넣는 일, 지저분하게 방치된 시설 곳곳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미시즈는 라일라가 일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내버려 둔다. 라일라는 건물 바깥에 정원을 만들기까지 한다. 그녀는 일을 잘했고,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보했다.
라일라는 혼자 일하는 가운데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돌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된다. 칼을 미시즈에게 갖다 바친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는지도 깨닫는다. 그리고 돌이 절대 유곽에 가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도 떠올린다. 돌은 노동의 가치, 자기 몸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일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가르쳤던 것이었다. 라일라는 기회를 봐서 칼을 되찾아 그곳을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맥이 좋아한 아가씨 미시가 임신을 한다.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라일라는 자신과 돌의 관계를 떠올린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대로 보살핌을 받을 리가 없으니, 자기가 데리고 유곽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는다. 돌과의 관계에서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렇게 자신도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고 함께 할 것을 기대한다. 그런 기대를 품게 되자 하루하루 생활에 힘이 넘친다. 사랑에 빠졌느냐고 의심을 받을 만큼.
그러나 라일라의 기대와 달리, 어느 날 미시의 언니가 동생을 구하러 온다. 라일라는 미시즈의 물품 보관함을 부수어 미시의 물건을 꺼내 주고 자신도 칼을 챙겨 유곽에서 나온다.
호텔 잡역부 생활
유곽을 나온 라일라는 어느 호텔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객실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일을 마치고 나면 동료들의 일도 돕는다. 동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는 가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낙에 산다. 영화는 그녀의 팍팍하고 칙칙한 인생에서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렇게 호텔 청소부로 몇 년을 지내다 그곳에서 맥을 만난다. 맥은 쓰레기 수거원으로 호텔에 온 것이었다. 맥의 눈빛과 표정을 보고 라일라는 등을 돌리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의 관심과 눈길을 바라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라일라는 그 길로 짐을 싸들고 나온다. 맥은 라일라가 벗어나고자 했던 어둡고 아픈 과거를 과거의 일이 아니게 만드는 존재였다. 계속 거기 머물면 어떤 일이 더 있을지, 과거가 어떻게 라일라의 발목을 잡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숙박비와 영화비로 쓴 돈을 빼고 나면 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데 쓸 버스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 여성이 그녀에게 카풀을 제안한다. 그녀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러 먼 고향으로 차를 몰고 가야 했는데, 운전에 서툴고 밤새 운전을 해야 하는 터라 동행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라일라는 버스비를 아낀다. 버스비로 생각했던 그 돈은, 이후에도 라일라가 떠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의미심장하게 계속 등장한다.
길리아드에 오다
라일라가 그 차를 얻어 탄 것을 시작으로 몇 번 더 차를 얻어 타고 한참을 걸어간 끝에 자기도 모르게 도착한 곳이 길리아드였다. 거기서 부서진 빈 오두막을 발견하고 임시 거처로 삼는다. 그녀는 집집마다 다니며 일거리를 얻는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를 보게 되고, 부드럽고 친절한 목사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그가 젊은 날에 떠나보낸 어린 신부와 아이의 무덤을 보고 연민을 품게 된다. 그녀는 두 무덤 주위에 장미 정원을 가꾼다.
『길리아드』에서 늙은 존 에임스 목사의 눈에 보이는 라일라는 마냥 신비롭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존재다. 그러나 『라일라』에서는 라일라의 속내가 다 드러난다. 에임스 목사에게 너무나 뜻밖이고 쿨하게 보였던 라일라의 청혼은 라일라의 관점에선 좀 다른 사건이었다. 그것은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라일라는 자신의 청혼에 얼어버린 존 에임스 목사 앞에서 돌아서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존 에임스 목사가 급히 뒤따라와 “그럽시다”라고 하면서 둘의 관계는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앞에서 돌을 이야기하면서 라일라에게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라일라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람을 믿기 어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물론 그녀가 존 에임스 목사에게 상당한 관심과 호감과 일말의 애정이 있었기에 결혼하자는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생을 죽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상대에 대한 신뢰가 굳은 상태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노목사를 향한 호감과 끌림, 의심과 주저가 혼재된 상태에서 그에게 청혼했다. 라일라의 청혼에 상응하는 실체, 신뢰의 내용은 앞으로 채워져야 할 그 무엇이었다. 청혼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에는 본래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다. 라일라가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큰 상처와 장애물을 안고 있기는 했지만.
신뢰의 문제
라일라는 존 에임스 목사에게 호감과 연민을 느끼고 그 마음에 이끌려 청혼을 하고 목사의 화답으로 관계가 급진전하는 과정에서도 줄곧 관계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빠져나갈 생각, 도망갈 궁리가 늘 머릿속 한구석에 있다. 크나큰 배신을 경험했던 그녀가 또다시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불신이 다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서 사랑을 하려 했다면 사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이 넘어갔을 때, 말하자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존 에임스 목사는 진정한 ‘신사’였다. 그는 라일라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일을 진행해 나가면서도 그녀에게 계속 숨 쉴 여지를 남겨둔다. 청혼을 올가미 삼아 라일라를 얽어매려 하지 않는다. 늘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말하라고 이야기한다. 라일라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자기 같은 늙은이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자가 떠나고 싶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럴 가능성을 항상 열어주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존 목사의 이런 태도는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라일라를 사랑하고 그녀의 과거, 생각,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만, 결코 부담을 주지 않는다. 자신은 그녀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지만 말하고 싶을 때, 마음의 준비가 되면 말해 달라고 한다.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녀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군림하거나 옥죄지 않는다.
라일라는 남편의 부드럽고 친절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알아갈수록, 남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커져 갈수록 과거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워진다. 불우하고 어두운 나의 과거를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내가 그런 얘기를 해도 나를 이전과 똑같이 대하고 받아들일까? 혹시 나를 싫어하게 되진 않을까? 나를 불결하게 여기거나, 무서워하게 되진 않을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라일라가 제임스 목사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그녀의 과거 속 주요 사건들은 에임스 목사와의 관계와 병행해서 소개된다.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하나하나 과거가 드러나고 과거의 사건들을 에임스 목사와의 관계 속에서 떠올리고 해석하고 처리하고 소화해 내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에임스 목사의 한결같은 존중과 애정, 정직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면서 남편에 대한 라일라의 신뢰도 점차 두터워진다. 이런 신뢰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치가 위에서 언급했던 버스비다.
버스비
라일라의 ‘버스비’는 호텔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과 길리아드에 와서 일하고 번 돈까지 더한 돈뭉치다. 버스비는 길리아드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었고, 점점 더 진지하고 공식화되는 목사와의 관계에서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 수단이었다. 오랫동안 라일라는 그 낙하산을 버리지 못한다. 언제든 발을 뺄 수 있게 준비한다. 남편이 돌처럼 언제 자기를 버릴지 모르니까. 호텔을 떠날 때처럼 언제 여기를 떠나야 할지 모르니까.
라일라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그 버스비를 떠올린다. 캘리포니아로 떠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세례에도 적용한다. 자신의 요청으로 존 에임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도 그녀는 슬그머니 혼자서 세례 무효 의식을 진행한다. 그렇게 무효화되는 것이 아님을 모르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버스비를 가지고 늘 떠날 여지를 확보하는 단계’에 있던 라일라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버스비를 헐어 남편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지는 단계’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뜻밖의 사건을 겪으면서 버스비는 의미가 없어지고, 결국 “그이는 나를 사랑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오른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가끔은
아이가 태어날 날을 기다리며 존 에임스 목사는 행복하다. 수십 년 전에 첫 아내의 죽음과 함께 잃어버렸던 행복이 꿈처럼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의 대화 도중에 에임스 목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고백한다. 라일라는 그 말에 ‘가끔은요’라고 응수한다. 그러나 목사는 반박한다. ‘언제나’ 선하시다고.
늙은 목사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온실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가 연인이 되고 신부가 된 아내를 출산 도중에 아이와 함께 잃어버린 그 일에서도 하나님이 선하셨을까? 개인적으로도, 세계 대전을 겪어야 했던 역사적 상황으로도, 교인들의 삶에서 함께 겪어야 했던 숱한 사고와 죽음과 불행을 통해서도 슬픔은 그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는데도?
그가 목회자로서 해야 하는 일은 그런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인들을 위로하고 심방하고 설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노년에 벼락처럼 주어진 아내와 아이라는 전혀 뜻밖의 선물은 그동안의 아픔과 외로움과 인고의 세월을 전혀 다른 빛깔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자신이 그저 견딘다고 생각했던 슬픔과 외로움 가운데 이런 선물과 행복의 형태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숨겨져 있었다면, 지금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다른 일들에서도 언젠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것은 잘 모르더라도 이걸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수 있겠어, 라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을 만난 이의 확신에 찬 고백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가끔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라일라의 고백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녀가 하나님이 ‘때로는’ 선하시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녀의 신앙에서 대단한 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녀의 삶은 기본적으로 아주 힘겨운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런 회색빛 인생에서 하나님이 가끔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것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끔 선하시다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 엄청난 신앙 고백이 아닐까. 존 에임스 목사의 ‘언제나 선하시다’는 고백 못지않게 말이다.
성경이 그녀에게 보여준 것
하나님이 때때로 선하시다는 고백을 가능하게 만든 데는 성경 말씀의 힘도 컸다. 호텔에서 일하던 시절에 라일라는 영화 관람을 통해 현실에서 가끔씩 벗어나는 낙으로 살았다. 그런 그녀가 존 에임스 목사의 성경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하나의 그림을 보게 된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성경 말씀은 에스겔서 16장 4-6절이었다.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라일라는 여기서 버려진 아이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돌봐 준 돌을 떠올린다. ‘살아 있으라’고 말해 준 그 사람을. 왜 애초에 하나님이 아이가 그렇게 버려지는 것을 허락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돌봐 주고 살아남게 해 준 이들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존 에임스 목사. 그 모든 힘든 시간과 배신마저, 심지어 맥과의 달갑지 않은 재회조차도 결국 라일라를 지금의 남편에게로 이끄는 데 쓰이지 않았던가.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라일라는 그 속에서 희끗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끔은’ 선하신 분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한다.
인생은 어차피 시한부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라고 할 만한 존 에임스 목사는 나이가 많다. 어떤 면에서 그녀가 노목사를 통해 하나님에게 받은 복은 시한부의 복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쉬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줬다 금세 빼앗아 갈 거라면 차라리…’ 하는 못난 생각 말이다.
소설 막바지에 출산이 임박한 어느 날, 큰 눈이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전화가 모두 끊어지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집에서 고립된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괜히 밖에 나갔다가는 큰일을 치르기 딱 좋다. 여기서 출산을 앞둔 목사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그 상황을 감사로, 기도로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다.
결혼할 때부터 이미 존 에임스 목사는 나이가 많았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시한부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커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치 큰 눈이 내리고 쌓이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갈 수 없는, 그냥 감수해야 하는 그날의 상황처럼 말이다. 그리고 노인이 아니라 해도, 원래 인간의 삶은 시한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선물을 받고 누리면서 선물을 주신 분에게까지 나아가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된다. 선물은 언젠가 닳고 깨어지고 사라지기에. 『라일라』는 주인공이 존 에임스 목사라는 선물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이르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선물을 주신 분까지 알아가고 신뢰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1) 아쉽게도 『라일라』(Lila)는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 번역본이 없는 책을 소개하는 것에 양해를 구한다.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2) 『길리아드』는 이 연재의 다른 글에서 다룬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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