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과도 같은 폭력 앞에서 광주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학생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전 시민적 시위 참여가 이루어졌다. 피터슨 목사는 공수부대에 끌려가는 청년들을 돕기 위해 장년들과 젊은 여성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본문 중)
박근호(목사, 그루터기 공동체)
오월이다. 온 세상이 푸르른, 약동하는 생명으로 가득한 계절이지만, 광주의 오월은 여전히 상처의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이야기한다. 아직도 5‧18이냐고. 계엄군의 손에 살해된 아들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홍어 택배 운운하는 이들도 있다. 전광훈 같은 이는 광주에 와서 ‘5‧18은 북한 간첩이 선동한 폭동’이라 주장한다. 왜 이들은 5‧18을 죽이고 오명을 씌우려고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여전히 5‧18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5‧18이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섣부르다. 우리가 여전히 5‧18을 기억하고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걸어야 할 길을 고찰하기 위해서다.
김상봉 교수는 『철학의 헌정』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948년 제주에서 1980년 광주까지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공격하고 학살하는 일을 말 그대로 밥 먹듯이 해온 자들이다. 그런데 그 미쳐 날뛰는 군대 마귀들을 이 땅에서 몰아낸 것이 5‧18이었다. 5‧18은 이 땅의 민중들을 군대 지옥에서 구원하고 해방한 사건이다. 또한 그것은 지금도 자기의 부모 형제자매를 향해 총을 쏠 준비가 되어 있는 이 패륜적인 군대 마귀들을 향해 이 선을 넘지 말라고 박아놓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인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1800년 이후 이 나라는 본질적으로 내란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기구가 민중을 억압하는 본질적인 구조가 변하지 않고 있다. 일시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아도 이 뿌리 깊은 억압의 구조는 이내 회복되어 버리곤 한다. 이들은 힘을 과시한다. 그 힘으로 민중을 억압하여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 낸다. 두려움을 주어 다시는 자신들에게 덤비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어느 정도 잘 작동하는 듯했다. 5‧18 이전까지 말이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확대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 서울의 봄도, 부마항쟁도 이 비상계엄령 앞에서 잠잠해졌다. 다시 그들의 승리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5월 18일 오전 10시경 전남대학교 정문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공수부대의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 계엄군은 이들을 특수 곤봉으로 공격하였고 이른바 5‧18은 시작되었다.
그 시위대에 학생회 간부는 없었다. 그 시위대 중 이름을 알만한 이들은 없었다. 그들이 그곳에 모인 이유는, 5월 14일에서 16일까지 지속된 대규모 시위에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만약 휴교령이 내려지게 되면 오전 10시 각 대학 정문 앞에 모여서 투쟁하고, 12시 정오에는 도청 앞으로 집결하여 투쟁하자’고 했기 때문이다[『윤상원 평전』(풀빛 2007, 262쪽). 그들은 김상봉 교수의 표현대로 서로가 주체가 되어 거대한 폭력 앞에 섰다. 그 거대한 폭력은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세력을 말살하려고 했다. 두렵게 하여 꼼짝도 못 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5‧18의 광주는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짐승과도 같은 폭력 앞에서 광주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학생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전 시민적 시위 참여가 이루어졌다. 피터슨 목사는 공수부대에 끌려가는 청년들을 돕기 위해 장년들과 젊은 여성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광주 외부에 있던 이들은 같이 싸우기 위해 광주로 들어왔다. 광주 시민들은 피 흘린 이웃을 위해 자신들의 피를 나누었다. 봉쇄되어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자원을 나누며 주먹밥을 나누었다. 무기들이 난무한 현장에서 약탈 행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라도는 항쟁의 땅이다. 오랜 세월 권력과 가깝지 않은 땅이었다.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욕구보다는 자충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던 땅이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의병이 일어나는 땅이었다. 동학혁명에서는 폐정개혁안 12개 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항쟁의 땅인 전라도는 대안적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땅이다. 그 땅에서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과의 정면 대결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5‧18은 항쟁의 땅과 불의한 세력이 맞부딪힌 역사적 사건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지키며 계엄군과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은 항쟁이 좌절로 끝나기를 원치 않은 이들이다. 패배와 죽음이 확정된 순간에 밀려오는 적들 앞에 마주 선 것은 악마적인 폭력 앞에서 좌절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은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 그들 자신을 내어던져서 우리들에게 초청장을 내민다. 그리고 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 초대에 응하게 된다. 그들은 시위의 현장에서 광주를 기억하며 버텨 내었다. 이는 비극을 기억함이 아니라, 그들이 시작한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2023년 5월에 광주 땅을 밟는 것은 5‧18에서 시작된 역전을 이어가는 것이다. 아직 5‧18의 후예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희년함께와 아카데미 숨과쉼 성서광주가 연합하여 5월 19일과 20일 양일간, 5‧18의 흔적들을 찾아 우리의 발길을 남기는 일을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을 느낀다면 와서 그 역사의 현장을 밟아 보라. 5‧18이 우리를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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