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여러 자극과 통찰을 얻었다는 말은, 곧 오늘날의 신학 일부분에도 도스토옙스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말일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어떤 면이 바르트를 매료시켰을까?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발견되는 신학은 어떤 것일까?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책 소개]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포이에마 | 2018년 10월 30일 | 188면 | 12,800원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터진 폭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칼 바르트의 『로마서』. 그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루터도 칼뱅도 아닌, 도스토옙스키였다.

 

바르트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여러 자극과 통찰을 얻었다는 말은, 곧 오늘날의 신학 일부분에도 도스토옙스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말일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어떤 면이 바르트를 매료시켰을까?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발견되는 신학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들에 관한 답을 품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은 바르트의 절친한 친구인 투르나이젠이 쓴 책이다. 그는 바르트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을 주도한 학자인데, 즉 도스토옙스키, 바르트, 투르나이젠을 묶는 것은 변증법에 관한 무엇이다.

 

지옥의 얼굴들

 

불멸의 고전들을 써낸 도스토옙스키는 매우 기독교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경험상 교회에서 그의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그에 반해 톨스토이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거북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판적이고, 욕정에 차 있으며, 살인자이며, 비참하다. 교회를 맹렬히 비난하고, 이성과 질서를 깔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당포의 두 자매를 도끼로 살해해 버리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그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를 들려주며 종교를 풍자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둘째 형 이반 카라마조프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그의 소설에는 어디서도 만나 본 적 없는 극단적 인물로 가득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이런 인물을 창조하고 극단적인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매달렸던 단 하나의 질문 때문인데, 바로 다음의 질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철저하게 파헤치고자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피상적 이야기나 껍데기 같은 것들에 관심이 없다. 그의 내면에는 “인생의 표면 아래에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원초적인 삶의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인간 존재를 향한 질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질문임과 동시에 작중 인물들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이 평범하지 않은 이유, “인물들은 모두 아파” 보이는 이유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상처 때문인 듯하다. 그 상처는 곧 삶에 대한 질문이다.”

 

거대한 상처를 가진 그의 인물들은 질문하는 존재들이다. 이 질문은 물음을 제기하는 것뿐 아니라 행동을 포함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온몸으로 질문한다. 그렇게 인물들은 그들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이러한 파산에 이르러서 나타나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구원이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표지, ⓒ포이에마

 

비로소 구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구원은 인물들의 한계 상황에서야 비로소 임한다. 이성을 비판하고, 도덕을 무시하며, 종교를 업신여기고 그것들을 모조리 회의하고, 뒤엉켜 씨름한 후 마주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들이닥치는 것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구원을 경험한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외부의 개입을 통해, 즉 철저한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 여기서 바르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절대적 단절은 초월적 연결로 이어진다. 이는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옙스키의 핵심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의 핵심적인 단 하나의 통찰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두 기둥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 교회가 흔히 전하는 구원의 한쪽 측면이 빈약하다는 느낌이 든다. 종종 교회에선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말하지만, 얕은 차원에서 그치고 만다. 의심과 절망을 건너뛰고 곧장 천국으로 가려는 욕망이 과하게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보여 주는 구원은 이성과 도덕을 파괴하고, 종교와 교리와 싸우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의 잔해에서 출현한다. 이렇게 파멸과 구원이 대립하는 변증법이 바로 투르나이젠과 칼 바르트가 발견한 도스토옙스키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뿌리이며 이 세상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밑바탕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의 해체이며 고통이며 불안이다. 모든 실제적인 것에 깃들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비실제성이다. 모든 세속적인 것을 향해 다가서는 탈속적인 것이다. 이 역설적인 진리의 변증법이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인물에게서 나타난다.

 

만나서는 안 되는, 두려운 황홀함

 

이 책의 제사로 나온 키르케고르의 문장은 가지런히 정돈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도스토옙스키를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준다.

 

한때 야생의 삶을 살았으나 안전한 현실에 길들여진 새 한 마리가 갑자기 자기 머리 위에서 자기와 똑같은 야생 새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개를 퍼덕이게 된 것과 같다. 그 소리는 두려움이지만 동시에 황홀한 유혹이다.

 

만나서는 안 되지만 만나고 싶은 자. 마주하기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는 존재. 그가 바로 도스토옙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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