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 후회할지라도 나는 아플 때 더 용기를 내고 아플 때 더 창의적이 된다. 그래서 때로 건강한 비장애인보다 내가 더 강하다고 우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내 나의 생존 비법은 나의 강인함이 아니라, 동네방네 징징거리는 나의 유약함에, 그리고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기어이 내 손을 잡아 주는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본문 중)
박은영1)
‘아픈 사람은 약하지.’
언젠가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반발하는 ‘프로불편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프게 된 이후 그 전보다 훨씬 인생이 복잡해졌다. 평범한 하루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늘어나고 할 일도 더 많아졌다. 병원을 다니고 약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하고, 건강 정보를 검색하고….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다른 아픈 사람들 역시 나처럼 지도 하나 없는 복잡한 길을 하나하나 탐험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건강한 사람들은 끝없이 아픈 삶을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그러니, 아픈 사람들의 일상은 늘 어느 정도 베일로 가려져 있어야 한다. 아직 아프지 않은 (하지만 언젠가는 아프게 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런데 심지어 우리 보고 약하다고? 쳇.’
그러니까 대략 이런 억울함이 있다.
내가 가진 장애의 영향으로 내 몸의 형태와 동작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때문에 허리, 골반, 목, 어깨 등에 이런저런 통증을 달고 산다. 특히 허리와 골반의 통증은 이제 꽤 오랜 시간 거래를 트고 지낸, 좀 귀찮은 단골손님 같다.
이제 손님이 오면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쌓였다. 고객님이 찾아와 지루하다고 내 몸을 툭툭 치기 시작하면, 스트레칭 횟수와 산책 시간을 늘린다. 내 성의를 봐서 고객님이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떠나 주시면, 꽤 성공적으로 접대를 한 셈이다.
이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며 고객님이 내 몸속을 휘젓고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동네 병원이나 한의원의 전문적인 유료 서비스와 연결해 드린다. 그래도 체크아웃을 안 하고 버티면 살살 달래며 버티다가 3차 병원 주치의에게 고객님 처리를 위임한다. 단, 3차 병원엔 나 말고도 각자의 고객을 처리하고 싶은 사람들이 항상 차고 넘치기 때문에, 내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줄을 서야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숙지한 통증 고객님 접대 매뉴얼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매뉴얼이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 상황이 주기적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나 혼자, 혹은 동네 병원에서 받을 수 있는 치료를 다 받고도 3차 병원 진료까지 두 달 정도 남아있는 상황, 보너스로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업무가 내 앞에 쌓여 있는 순간이 그렇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만들어 둔 매뉴얼이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 바야흐로 이제 나의 노하우와 창의성을 집대성해서 새로운 대처법을 구사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나의 억울함을 잠시 접어두고, 나의 약함을 재빨리 인정하는 일이다.
경력자답게 아무리 아파도 의연하고 조용하게 일상을 유지하는 ‘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차피 아무리 아파도 근골격계 통증이 생명에 지장을 주진 않으니, 죽는소리해 봐야 서로 불편해지기만 할 뿐이다. 아프다고 동료들에게 말해도 줄일 수 있는 업무량은 사실상 미미하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엄살의 강도를 높인다고 획기적인 치료가 나올 리가 없으므로, 더 징징대 봐야 의사나 나나 피곤해지기만 한다. 진료는 자고로 건조하고 짧은 게 피차 편하다.
하지만 느긋한 척 버티는 기술은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데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오히려 아프기 시작하자마자 재빨리 병원에 가고 신속하게 소문을 내서 제때 쉬는 것이 가장 빨리 통증을 누그러뜨리는 길이다. 통증과 함께하는 세월이 길어지면 혼자서도 거뜬히 통증과 일상 둘 다를 해결할 노하우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정반대로 통증이 있는 나도 편하게 함께할 수 있는 사회와 일상을 만들자고 사람들을 계속 귀찮게 하는 게 훨씬 빠른 통증 진압법이다.
나의 징징거림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나의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든다고 해도, 나는 가끔 정말 동네방네 소문을 내어 내게 필요한 위로와 중보기도를 구한다. 혼자 아픈 게 억울하고 외로워서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출근을 하거나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연락을 한다. 정말 쉬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치료의 한계를 어느 정도 짐작한다 해도, 가끔씩은 진료실에서 내 하루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과장법을 섞어가며 묘사한다. 그렇게 나는 의학적 지식과 경험이 많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 나의 고통을 더 잘 짐작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대를 걸어 본다. 아무래도 내 삶에서 통증을 완전히 제거해 줄 것 같지 않은 전능하신 하나님한테도 한 번 더 기도한다. “하나님, 이번에는 그만 좀 아프게 해 주세요. 어차피 다음에 또 아플 거잖아요.” 뭐…, 혹시 모르지 않나? 뾰로롱, 한 번쯤 작은 기적을 안겨 주실지도.
물론 엄살을 떨고 나면 매우 창피하고 또 불안하다. SNS에 올렸던 글을 삭제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다시 괜찮은 척한다. 하루를 못 버티고 다시 일을 시작하고, 의사의 난감함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시원치 않은 처방을 들고 의연히 병원을 빠져나온다.
그런데 내가 엄살과 민망함, 노출과 은폐의 혼란을 거듭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내게 필요한 무언가를 찾아 건네준다. 잠시 올렸다 내린 게시물을 보고 요긴한 정보를 알려 주는 지인들, 기도해 주는 교우들, 내가 잠시 쉬겠다고 할 때 더 묻지 않고 수용해 주는 동료들, 어떻게든 효과적인 치료를 제공해 주고자 하는 전문가들…. 그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미안해하며 내게 작은 소리로 위로를 건넨다. 때로는 전문가들조차도 내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 표정을 통해 그들과 한 번 더 연결된다. 무지막지하지만 지나가고야 말 그 시간을 건널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주는 건 그들의 도움 안에 있는 바로 그 연결감이다.
금세 후회할지라도 나는 아플 때 더 용기를 내고 아플 때 더 창의적이 된다. 그래서 때로 건강한 비장애인보다 내가 더 강하다고 우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내 나의 생존 비법은 나의 강인함이 아니라, 동네방네 징징거리는 나의 유약함에, 그리고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기어이 내 손을 잡아 주는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의 약함과 엄살이 쓸모없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약함을 자랑해야 하며 아플 때도 함께 아파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모두가 약하고, 아플 땐 더더욱 우리 모두 의존할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강인하다고, 문명이 유능하다고 강조해 온 역사는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다. 성취만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위기에 빠트렸고, 폭력적인 위계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렸으며, 하나뿐인 지구마저 처참하게 파괴했다.
나는 약하고 느리고 지혜롭지 못하다. 평생 열심히 일해도 한 줌의 훌륭한 생산물도 세상에 남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나의 약함만은 남기고 싶고, 약함을 자랑하는 일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인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충분히 강했고, 우리는 충분히 의연하게 살아왔다. 그 강함과 의연함이 남긴 피로와 상처에 응답할 수 있는 건 나와 당신의 약함일지도 모른다. 약한 우리는 아무래도, 무모하게 약한 서로가 필요한 것 같다.
1) 『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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