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6개월 후인 1987년 12월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창립되었습니다. 6월 항쟁이 제5공화국의 독재적 헌법을 개정하고, 시민적 자유를 확장하는 역사적 사명을 이루었고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쟁취하였습니다. 그 민주화의 성과 위에서 기독시민운동으로서 기윤실은 여러 영역에서 시민운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기윤실은 6월 항쟁의 성과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유해신(관악교회 목사)

 

1987년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지금부터 36년 전, 1987년 6월 10일, 마치 3·1 운동이 재현되는 듯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에 열린 민정당 전당 대회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후임으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서울의 성공회 대성당에는 “고문살인 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는 옥외 스피커를 통해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은 무효라고 선언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영구집권음모 규탄대회”를 개최하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민정당이 역사에 부끄러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국본은 6월 5일에 전국적으로 “6·10 국민대회 행동 요강”을 발표했습니다. ‘6월 10일 오전 10시 이후에 각 부문별 단체별로 “고문살인 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오후 6시에는 성공회 대성당에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하고, 그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전국 교회, 성당, 사찰은 타종을 하고 제 자리에서 묵념한다. 경찰이 폭력으로 진압해도 비폭력으로 저항한다. 오후 9시부터 9시 10분까지 10분간 소등한다.’ 경찰의 제지가 있었지만, 이날 전국 22개 도시에서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가두시위와 옥내 집회에 30만 명(국본 집계), 혹은 4만 5천 명(경찰 주장)이 참여하였습니다.

 

1980년 개정된 헌법의 문제점

 

6·10 국민대회의 주요 이슈는 헌법 개정과 공권력에 의한 고문치사 문제였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장군은, 1980년 8월 27일, 기존의 유신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접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0월 22일에는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했습니다. 이 헌법에는 비민주적 독재를 유지하는 독소 조항들이 있었습니다.

 

이 헌법은 1인 장기 집권을 배격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중임을 금하였습니다. 국회의원 3분의 1을 전국구 의원직으로 유지하였습니다. 전국구 의원의 3분의 2를 제1당이 배당받게 했습니다. 나머지 의석을 지역구 선거에서 5석 이상 차지한 정당들이 의석 비율로 배분하도록 했습니다. 전두환은 자신이 창당할 민정당이 제1당이 될 것을 확신하면서 불공정하게 제1당에 의석을 몰아주도록 헌법에 규정한 것입니다.

 

새 헌법의 제일 큰 독소 조항은 대통령 선출을 국민이 직접 하지 않고,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간접 선거제였습니다. 1981년 2월 21일에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인단의 투표로 전두환은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한 달 후인 3월 25일에는 개정 헌법에 따라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민정당은 35.6%의 득표율로서 54.7%의 국회 의석을 얻었습니다. 제1당이 전국구의 3분의 2를 독식하는 선거 제도 때문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행정, 입법부만이 아니라 사법부도 국가안전기획부(구 중앙정보부, 약칭 안기부)를 통해 통제했습니다. 대법원을 통해 전국 관할 법원에 시국 사건에 대한 안기부의 방침을 전달했습니다.

 

전두환은 김대중 김영삼에 대해 계속해서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지만, 양 김의 연합 전선으로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결성되었습니다. 민추협은 1985년 2·12 총선을 25일 앞두고 양 김의 영향 하에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하였습니다. 2월 12일 총선에서 민정당 득표율은 32.5%였고 신민당을 포함한 야당은 58%에 달했습니다. 야당은 1980년에 개정한 헌법을 재개정하는 운동을 1986년, 1987년에 계속 추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가는 1980년 이후로 반정부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대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파장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했습니다. 경찰 측은 그냥 쇼크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1985년 11월에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를 중심으로 협력했습니다. 1월 24일에는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2월 7일에 추도 대회를 거행하기로 결정했으며, 전국 69개 장소에서 추도 집회가 열렸습니다. 3월 3일에는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진행했습니다.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 이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결성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1980년에 개정한 불공정한 헌법을 개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4·13 호헌 조치입니다. 이에 반대하여 가톨릭 사제들이 단식기도를 시작했고, 개신교 목사들도 단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4월 22일, 고려대 교수들의 시국 선언을 시작으로 각 대학에서 시국 선언이 계속되었습니다. 5월 1일에는 서울대 교수 122명이 시국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손봉호 당시 서울대 사범대 교수(기윤실 창립 시 실무책임자)도 참여했습니다. 5월 30일까지 전국 50개 대학에서 1,530명이 참여했습니다.

 

야당, 재야, 학생들의 연대 활동이 강화되었습니다. 5월 27일에는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발기인 2,191명은 지역 대표 352명,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종교계 대표 683명, 각계 대표 943명, 정치인 213명 등이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은 8명의 고문단에 속했습니다. 서울 지역의 대학생 연합은 “호헌철폐와 민주개헌 쟁취를 위한 서울지역학생협의회”(서학협)를 구성하고 국본 가입을 결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국본과 보조를 맞추어 6월 항쟁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국본은 6·10 “고문살인 조작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최루탄을 맞고 죽어간 대학생 이한열

 

6월 9일, 연세대 학생들이 6·10 대회 참가를 결의하는 출정식으로 교문 밖으로 나가며 시위를 할 때였습니다.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았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습니다. 언론은 이후 매일 중계하듯이 이한열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이 죽음이 이후 6월 항쟁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행렬 ⓒ6·10민주항쟁 공식홈페이지

 

6·10 국민대회를 넘어서 6월 항쟁으로

 

그런데 6월 10일 이후에도 6월 말까지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가두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6월 10일에서 15일까지 학생과 시민들이 명동성당에서 자발적 농성을 계속했습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특히 넥타이를 맨 20, 30대 화이트칼라들이 시위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명동성당 농성과 넥타이 부대를 주력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는 6.10 국민대회를 6월 민주항쟁으로 진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국본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날 오후 7시 30분경 서울 신세계 앞 차도에서는 2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를 하였습니다. 서울역 앞에서는 1만 명이 시위를 했습니다. 지방으로도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부산의 경우 18일 오후 4시부터 집결, 7시경에는 시위대가 8차선 도로 4Km를 완전히 메웠습니다. 시위대는 대형 트럭, 트레일러 10여 대를 탈취하여 자발적으로 합세한 200여 대의 택시와 함께 시청으로 돌진하였고 새벽 3시까지 시청을 위협했습니다.

 

6월 항쟁은 6·26 평화 대행진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 행사는 전국 34개 도시, 4개 군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경찰의 원천 봉쇄 노력에도 불구하고 100여만 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여하였습니다.

 

마침내 6월 29일,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조속히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에 평화적 정부 이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외 김대중 씨 등을 사면 복권하고, 시국 관련 구속된 자들을 석방하며, 국민의 기본권 신장, 언론 자유의 확대,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을 약속하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6월 항쟁의 의의

 

6월 항쟁은 어려 면에서 3·1운동과 유사했습니다. 첫째,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계층이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둘째, 종교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나 교당이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고,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성직자와 신도가 조직적으로 참가한 것입니다. 셋째, 일반 시민이 다수 참여했습니다. 특히, 6월 항쟁의 경우는 화이트칼라 넥타이 부대가 시위대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이후의 시민운동에서도 주요 역할을 맡게 됩니다.

 

6월 항쟁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주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6·10 대회를 주관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구성에서 개신교는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공동 대표 61명 중 21명, 상임 대표 10명 중 3명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집행위원, 실무 간사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상임집행위원장도 목사 오충일이었습니다. 권혁률(현 기윤실 이사)도 집행위원과 실무진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사무처도 종로5가의 기독교 회관에 있었습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도 6월 항쟁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주요한 교단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보수적인 예수교장로회(고신)의 남서울교회도 시국을 위한 기도회를 했습니다. 예수교장로회(개혁)의 신학생 40명도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예장(고신)소속의 당시 서울대 4학년생이었던 정병오(현 기윤실 공동대표)를 포함하여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청년들이 가두시위에 참여했습니다(권혁률의 증언).

 

기독시민운동 단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창립

 

6월 항쟁 6개월 후인 1987년 12월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창립되었습니다. 6월 항쟁이 제5공화국의 독재적 헌법을 개정하고, 시민적 자유를 확장하는 역사적 사명을 이루었고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쟁취하였습니다. 그 민주화의 성과 위에서 기독시민운동으로서 기윤실은 여러 영역에서 시민운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기윤실은 6월 항쟁의 성과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민으로서 공적인 일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기윤실은 6월 항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운동의 주체 세력에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6월 항쟁은 재야 명망가들이 주도하면서 학생들이 시위대의 주요 역할을 하고 거기에 일반 시민, 그중에서도 30대의 화이트칼라들이 연대함으로써 운동의 영향을 극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기윤실도 복음주의권에서 존경받는 인사들이 주도하면서 거기에 대학생, 일반 시민이 함께 회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렇게 비슷한 점이 있으면서도, 6월 항쟁은 정치인들이 참여했지만 기윤실은 정치인의 참여가 없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윤실에는 전업주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연령층이 회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셋째, 기윤실이 1990년대에 개인 실천 운동을 넘어서 정치 사회 문화적 개선 운동을 할 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속한 진보적 기독교인이 80년대에 축적한 운동 경험이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기윤실이 1990년대에 스포츠신문을 비롯한 음란 매체 감시 개선 활동을 하는 데는 YMCA가 1980년대에 전개했던 퇴폐향락추방운동 보고서가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YMCA의 양담배추방운동과 미디어 모니터 활동이 기윤실이 추진한 담배에 대한 한미양해각서 개정 운동과 TV 모니터링 활동에 좋은 선례가 되었습니다.

 

기윤실은 6월 항쟁과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기존 운동을 보완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첫째, 6월 항쟁은 정치 제도의 개혁에 주안점을 두었고, 개인의 윤리적 삶의 실천을 운동의 과제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윤실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개혁 실천을 말하면서도 회원의 자신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을 기초로 삼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4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그 행동 지침은 “자신이 먼저 실천하고 서로서로를 독려하고자”하는 목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둘째, 6월 항쟁이 헌법 개정을 통해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윤실의 창립 취지문에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5번이나 쓰면서 책임을 강조합니다. 또, ‘의무’라는 단어를 3번 사용합니다. 심지어 “사회와 국가의 모든 부조리가 우리들 자신의 불의 때문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하며…”라고 말합니다. 결론에서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권리나 특권도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만 있다.”

 

셋째, 6월 항쟁은 전반적으로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지만, 부분적으로는 화염병 투척이나 자동차 탈취, 도로 점거 등의 폭력적 행위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윤실은 잘못된 국가의 법과 시책에 대해서 권고·경고하고 “평화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운동 방법에서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을 천명합니다.

 

넷째, 6월 항쟁을 주도한 학생들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독교인 학생들이 편안하게 그들의 입장에 동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학생 운동이 화염병 투척 등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는 점도 기독 학생들이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만든 장애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 청년들이 양심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할 수 있는 단체로서 기윤실을 창립하였습니다(손봉호 현 기윤실 자문위원장의 증언).

 

다섯째, 6월 항쟁은 개헌을 통한 민주화를 달성하고 고문 등을 철폐하는 등의 단일한 운동 이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기윤실의 시민운동은 다양한 운동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최소한 14개의 운동 영역을 제시했습니다.

 

여섯째, 6월 항쟁과 민주화 운동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교단에 속한 진보적 기독인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반면에, 기윤실 시민운동은 그간 사회 참여에 관해 침묵하면서 기존 국가 권력에 순응하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기윤실은 6월 항쟁으로 열려진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기존의 민주화운동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손대지 못하고 있던 영역에서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질적 향상과 저변 확대, 근본적 도덕 각성 부분까지 운동을 이끌어갔습니다. 6월 항쟁이 36년이 흐른 2023년 6월 현시점에서 보면, 한국의 학생과 일반 시민들의 공익을 위한 활동은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민주화 중심 세력은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들은 재정 비리와 성적 탈선으로 개인 윤리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기윤실의 지도부와 일반 회원들은 도덕적인 깨끗함을 유지해 온 것이 다른 운동과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자산입니다. 개인과 교회의 깨끗한 삶과 윤리적 실천에 기초한 정치 사회적 참여라는 초기 기윤실의 정신을 자산으로 삼아, 기윤실이 다시 기독교인을 일깨우고, 일반 시민운동에 기여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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