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비해 현상학의 영향을 받은 종교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신을 증명의 대상으로 보는 모든 시도가 우리에게 현상으로 체험되는 신을 말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신이 만일 우리에게 체험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면, 우리에게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유의 과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바로 체험된 신 현상의 현상성과 그 의미에 대한 기술이다. (본문 중)
김동규1)
현상학적 환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상학을 정의해야 한다. 현상학은 말 그대로 현상에 대한, 현상을 다루고 해명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현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나타나고 주어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나타나고 주어지는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이 원고를 쓰면서 팩에 담긴 포도 주스를 내 옆에 두고 있다. 이 사각형 팩에 담긴 포도 주스는 전면에는 상품명이 적혀 있으며, 윗면에는 내용물을 맛보기 좋게끔 손으로 여는 뚜껑이 달려 있다. 이 포도 주스는 내 목을 축이기 위한 것이면서 점심을 거른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내 앞에 있다. 즉, 그것을 먹고자 하는 나와의 체험적 연관 관계 아래 그것이 놓여 있다. 이 세상에 수많은 포도 주스, 그리고 그것을 총체화하고 일반화한 하나의 개념으로서의 포도 주스나 보편적 관념으로서의 포도 주스가 있다. 그리고 그 개념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포도 주스라고 지칭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맨 처음, 일단 지금, 그리고 여기 나와 직접적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포도 주스와 상관해서, 그것들을 떠올린다. 왜냐하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내게 주어지고 나타난 것은 바로 이 포도 주스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포도 주스를 접한 아이를 생각해 보자. 그 아이에게 포도 주스는 어떤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내 앞에 주어진 먹을거리로 나타난다.
이처럼 현상은 우선 그리고 대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내게 주어지고 나타나는 어떤 것을 뜻한다. 이렇게 모든 현상은 나에게 주어지고, 나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처럼 내가 특정한 현상들을 향하는 의식이나 신체의 특색을 일컫기 위해 현상학자들은 지향성이란 말을 핵심적인 개념으로 동원한다. 즉, 나의 의식이나 신체는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해 있음을 그 본질적 특색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개념이나 고유 명사로서의 어떤 현상을 말하기에 앞서 나는 나에게 체험되는 현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의 보편적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은 절대적으로 나에게 주어지고 나타나는 것과의 체험 관계를 다루고, 그 체험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 다른 말로 하면, 현상과 나의 지향적 체험 사이의 관계 양상과 작용 전반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포도 주스로 돌아가 보자. 지금 내가 위에서 기술한 포도 주스는 우선 내가 맛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으로 있는 것이지만, 나 또는 우리의 다양한 체험 양상이나 존재 방식과 이 주스가 마주하게 될 때, 여기에는 훨씬 더 복잡한 기술과 분석이 필요하게 된다. 포도 주스는 단지 목을 축이거나 맛을 본다는 사실을 넘어 특정한 맛을 낸다. 포도만이 고유하게 낼 수 있는 신맛이나 단맛이 그 주스에 서려 있고, 나는 포도를 좋아하지만 그 포도를 지금 맛볼 수 없으므로 포도의 대체재로 포도 주스를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이때 나의 포도 주스에 대한 기대는 과즙이 아닌 실제 알갱이를 가진 과일로 주어지는 포도와 비교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그런데 막상 과즙으로서의 포도 주스가 알갱이 포도 과일의 맛에 미치지 못할 때, 그 현상의 체험은 나의 원래 기대와 어긋나게 되고, 이때 나는 일정한 형태의 쾌감과 더불어 불쾌감이나 실망감을 정서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때, 극단적인 경우라면 나의 행동은 이 특정한 포도 주스를 다 마시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갖다 버리거나 맛을 즐기지 못한 채로 꾸역꾸역 그 과즙을 목으로 넘기는 불편한 체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럴 때 나의 포도 주스에 대한 체험은 맛 좋은 포도 과일 알갱이에 미치지 못하는 정서와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데 내가 또 다른 경우, 지금 먹은 포도 주스를 매우 다른 상황에서 접할 때가 있다. 교회의 성찬례에서 같은 포도 주스가 사용되었다고 해보자. 나는 이 포도 주스를 성찬례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피인 것처럼 여기거나 적어도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해 주는 훌륭한 매개체로 여기고 주스를 마신다. 이때 포도 주스는 내게 어떤 체험적 의미를 남겼는가? 이것은 맛을 본다는 의미, 포도라는 과일과 과즙 사이의 맛의 비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삶의 구원자에 대한 기억과 그에 대한 감사나 새로운 신앙의 헌신에 대한 결의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체험 지평의 상이함을 따라 그 포도 주스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내게 일으킬 수 있다. 이처럼 현상학은 우리의 다양한 체험 연관성 아래서 현상이 주는 의미를 기술하는 학문이며, 여기에는 방금 예시한 복잡한 상황이 뒤따른다.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그 후예들의 구호처럼 간주되는 말이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인데, 이것은 방금 예로 든 상황처럼 우리가 미리 전제한 개념이나 틀로 내게 주어지는 현상적 사태를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근원적으로 내게 주어지고 체험되는 현상의 사건들로 돌아가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삶의 본질적 의미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냥 우리는 내 앞에 놓인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현상의 체험적 의미를 알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현상학적 환원이 중요한 방법적 조치로 제기된다.
현상학자들은 우리가 늘 하던 사고방식이나 경험의 틀에 입각해서 사물을 접해서는 현상의 의미에 이를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독한 편견이나 어떤 사고 전제에 입각해서 세상을 보는 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투철한 종교인에게 인간에 대해,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그 신자는 곧장 인간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자유 경쟁이 이루어지는 자본 시장을 우리가 거주하는 세상의 기본 공간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 이에게 인간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상품 생산자이거나 소비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세계를 나타나는 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바 그대로 보기보다는 내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전제나 편견, 형이상학적 사변을 따라 이해한다. 후설은 이렇게 세계를 특정한 세계관을 따라 이해하는 사유 방식을 자연적 태도의 일반 정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자들은 ‘현상학적 환원’이란 조치가 현상을 나타나는 바 그대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본다. 이것은 거칠게 말해 두 가지 과정이 서로 결부되어 이루어지는데, 그중 하는 판단중지 또는 유보(Epoche)이고, 다른 하나는 태도변경(Änderung der Einstellung)이다. 즉, 후설은 방법론적으로 우리가 당연시하던 모든 태도나 세계관, 전제로 판단하기를 멈춰야 한다고 보며, 그러한 것들을 괄호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본다. 당연시하던 ‘나’, ‘신’, ‘자연’, ‘자연과학 법칙’, ‘상식들’ 등을 모두 괄호 속에 두고, 마지막으로 남겨지는 이른바 현상학적 잔여가 사유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런 판단중지를 거쳐 남겨진 것이 순수의식이라고 보며, 이 순수의식이야말로 지향성을 본질적 특색으로 삼는 현상학적 인식과 이해의 준거점이다. 바로 이 준거점으로, 우리의 자연적 태도를 현상학적 태도로 변경하는 것이 현상학적 태도변경이다. 이러한 태도의 변경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의 의지적 주의 집중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현상을 마주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의 변경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지럽고 그다지 정비되지도 않은 동네 길을 걷다가 보도블록 사이로, 또는 아스팔트 사이로 절묘하게 핀 꽃을 본다고 해 보자. 이 꽃을 두고 우리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곧 씨를 통해 번식 기능을 수행하는 식물의 생식 기관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어떤 지향적 태도를 가지고서 그 꽃을 접한다. 미학적인 지향적 태도로 보면, 그것은 지극한 아름다운 꽃으로 내게 나타나며, 종교적인 지향적 태도로 보면, 그 꽃은 신의 아름다운 창조 작용의 산물일 것이다. 또한, 윤리적인 지향적 태도로 볼 때 그 꽃은 개발이 일상화된 세상 속에서도, 아스팔트 면적이 점점 넓어져 가는 와중에도, 우리가 보존해야 할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태도변경을 따라 그 꽃은 다양한 체험 지평의 맥락에서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서 내게 주어질 수 있다. 즉, 현상학적 환원은 세계를 괄호 속에 넣은 다음, 판단중지를 한 다음, 그 세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더 근원적이고 체험적인 차원에서 긍정하려는 시도다. “‘저’ 세계는 판단중지를 통해 상실되지 않았다. 판단중지는 세계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모든 판단을 단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관관계를 드러내 밝히는 길이자 모든 존재 통일체를 나 자신으로, 그리고 의미를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들을 가진 나의 주체성으로 환원하는 방법이다”(Husserl 366).
혹자는 여기서, “앞에서는 형이상학적 사변으로서의 ‘신의 피조물’이란 정의가 현상학에서 거부되는 것처럼 말하다가 여기서 다시 그런 진술이 긍정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상학은 특정한 의미를 형이상학적인 전제로 활용하는 것과 나의 어떤 지향적 태도 속에서 특정한 의미로 주어지는 것을 구별한다. 형이상학적 전제는 하나의 원리처럼 사물을 특정한 규정성 속에 두지만, 현상학적 태도는 내게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주어질 때 일어나는 체험의 태도를 의미하며, 이런 태도 속에서 현상은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여러 가지 변경을 거치는 가운데, 어떤 태도에 특정한 우위성을 주기보다는 여러 맥락 속에서 상이한 의미를 일으키는 요소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적 사유는 형이상학적 사유와 다르며, 현상학적 환원은 이미 진술한 대로, 판단중지와 태도변경으로 집약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한 사고 전환, 더 넓게는 삶의 전환을 위한 조치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학과 현상학적 환원과 관련한 사유의 혁신은 신학과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형이상학에 기대어 사유를 전개해 갔다. 가장 흔하게는 신을 특정한 사유 방식을 따라 증명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라는 이름 아래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안셀무스나 아퀴나스, 데카르트의 신 현존 증명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이때 신은 철저히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개념, 더 정확하게는 ‘최고 완전한 존재’와 같은 개념으로 사고되는데, 파스칼이나 하이데거가 비판한 대로, 과연 이런 식의 개념적 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나 예배와 찬송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과 같은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에 비해 현상학의 영향을 받은 종교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신을 증명의 대상으로 보는 모든 시도가 우리에게 현상으로 체험되는 신을 말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신이 만일 우리에게 체험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면, 우리에게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유의 과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바로 체험된 신 현상의 현상성과 그 의미에 대한 기술이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은 신을 더는 대상이나 존재가 아니라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우리의 신앙 체험, 종교적 체험이 곧 신학과 종교 이해의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 경우 현상학적 환원은 바로 그렇게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된 신을 사고하는 데서 벗어나 우리에게 그 자체로 체험되는 사건으로서의 신에게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게 하는 방법적 조치가 된다. 한 예로 장-이브 라코스트는 이런 식의 태도 변경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변경한 신 앞에서의 존재로 변형된다고 보며, 바로 이런 현상학적 태도변경 내지 존재 방식의 변경이 일어나는 체험의 탁월한 사태가 종교적 전례 체험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이처럼 현상학과 현상학적 환원은 우리가 당연시하던 개념적 신-담론이나 신학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체험에 관한 기술로 옮겨 놓는 사유의 혁신을 일으키는 효과를 내포한다.
더 나아가 현상학적 환원에 입각하여 세계를 현상의 생생한 주어짐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종교적 삶에 대한 이해에도 일종의 변경을 가져온다. 이를테면, 우리가 하는 기도나 고백, 찬양, 계시의 체험은 신조의 고백이나 교리의 승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내게 주어진 현상에 대한 반응이고, 내게 일어난 체험이다. 이런 점에서 과연 신학의 구성이 교리와 신조로 채워지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기도 한다. 오히려 성서 계시의 기록된 체험의 의미를 파헤치고, 그 내용을 기술하는 게 최우선적인 신학의 과제이고, 이를 통해 신앙의 삶을 반성하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제안이 현상학자들에게서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현상학자 중 한 명인 장-뤽 마리옹은 이렇게 묻는다. “왜 신학자들은 항상 특권화된 존재적, 역사적, 또는 의미론적 해석을 대신해서, 성서에, 특별히 신약에 기록된 계시를 현상학적으로 읽는 일을 완수하지 못하거나 미미하게만 완수하는가(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여기서 예외적이며, 이 비판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다)?”(Marion 2001[2020], 34[62]). 이처럼 현상학적 사유와 주어짐을 향해 우리의 태도를 변경할 것을 제안하는 현상학의 권고는 매우 도발적으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을 재고하게 만든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문헌
Husserl, Edmund (1973). Zur Phänomenologie der Intersubjektivität. Texte aus dem Nachlass. Dritter Teil: 1929-1935. Edited by Iso Kern. The Hague: Martinus Nijhoff.
Marion, Jean-Luc (2001). De surcroît: Études sur les phénomènes saturés.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국역본: 『과잉에 관하여: 포화된 현상에 관한 연구』. 김동규 옮김. 서울: 그린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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