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사람도 다른 이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듯이 섣불리 행동하거나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 주려고 해선 안 된다. 다만 우리에게는 서로가 그 고통을 충분히 겪고 이겨낼 수 있도록, 상처와 과거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결심할 수 있도록 곁을 지켜줄 책임이 있다. (본문 중)
최주리(청년활동가)
어느 작은 교회의 집사인 주디는 곧 진행될 모임을 위해 분주하게 방을 세팅한다. 다과를 준비하고 테이블과 의자 배치를 고심하는 주디는 초조해하면서도 세심하게 준비한다. 누군가 이곳에 모여 중요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6년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 가해자의 부모와 피해자의 부모다.
곧이어 게일과 제이 부부, 린다와 리처드 부부가 교회에 모인다. 조심스럽고도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네 명의 부모들은 어렵사리 대화를 이어간다. 영화는 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인지 알려 주지 않은 채 이들의 대화를 비춘다. 아이들의 사진과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서로 소개하기 시작하는데, 추궁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하겠다는 초반의 결심은, 사건의 진실이 점점 밝혀지면서 무너져 내린다.
피해자의 부모가 가해자의 부모에게
“당신 아들이 내 아들을 죽였잖아요.”
감정에 북받친 게일의 말을 통해 관객들은 자연스레 가해자 쪽과 피해자 쪽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가해자의 부모인 린다와 리처드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린다와 리처드의 아들 헤이든은 평소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우울증, ADHD 등의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 어느 날 헤이든이 친구의 집에서 총을 훔쳐 와, 다니던 학교에서 사제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난사했고 그곳에서 게일과 제이의 아들 에번은 헤이든이 쏜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헤이든의 부모인 린다와 리처드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아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한다. 수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수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았고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후회와 절망에 고통스러웠다는 그들의 말에, 게일과 제이는 아이를 잃은 고통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라며 이성을 잃고 분노를 쏟아낸다.
린다는 갑자기 게일에게 그의 아들 에번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한다. 게일은 황당함에 말을 잃지만 린다의 계속된 질문에 에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가족들만의 재밌는 추억이자 에번의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게일과 제이는 울고 웃는다. 잠시 동안 네 명의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로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함께 울고 웃게 된다. 그 순간 게일과 제이는 린다와 리처드가 평생 속죄하고 고통을 받아야 할 가해자의 부모이기 이전에 자신들처럼 아이를 잃고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부모임을 깨닫게 된다. 게일은 그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어렵사리 준비해 온 말을 꺼낸다.
‘참교육’과 ‘응징’을 내리는 사회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교사들이 교권뿐만 아니라 인권을 처참히 짓밟히는 일이 일어났고, 전국 곳곳에서 무차별 테러와 테러 예고가 일어나 무고한 시민들이 칼에 찔리거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또한 공사 기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무리한 공사를 진행하는 바람에 인부들이 다치거나 공사 중인 건물이 무너지기도 했고, 제빵 기계에 직원이 끼어서 사망한 사건으로 대대적인 불매 운동이 일어났던 회사에서 또다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분노와 좌절, 공격성이 언제라도 터져 나올 듯이 가득 차 있고 서로에 대한 무책임과 각박함이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또한 잘못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참교육’과 ‘응징’을 내리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참교육과 응징이 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최선의 방법일까? 어디에서 이런 문제들이 시작되었고,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여유조차 사라진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고통 속에서 죽어간 아들을 평생 마음에 묻고 살아가야 하는 부모와 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자살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부모는 절망적인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아이를 잃은 부모가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피해자의 엄마인 게일이 어렵사리 린다와 리처드에게 꺼낸 말은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통스러운 과거와 분노, 슬픔, 증오에 얽맨 삶을 끝내고 다시 아들 에번을 마주하기 위해 힘겨운 선택을 했다. 진정한 용서가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게 해 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이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듯이 섣불리 행동하거나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 주려고 해선 안 된다. 다만 우리에게는 서로가 그 고통을 충분히 겪고 이겨낼 수 있도록, 상처와 과거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결심할 수 있도록 곁을 지켜줄 책임이 있다. 이 영화에서 교회는 두 부모들이 충분히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안전한 자리를 제공했다. 나서서 화해나 용서를 도모하거나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당사자들이 직접 감정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울타리의 역할을 해 주었다. 종교나 사랑, 헌신, 인내와 같은 가치들이 점차 외면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를 성역화하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방식이나, 피해자의 피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가해자를 절대 악으로 생각하는 방식 모두 위험하다. 손쉬운 정답을 제시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오래 참고 헌신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우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배우고 적용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순간을 수없이 마주한다. 용서와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먼저 본을 보이거나 준비가 될 때까지 함께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고통과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애쓰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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