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이 현장에서 외면되는 것은 애초에 현장이 매뉴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본 결과이다. 매뉴얼은 인간의 행동을 구속해서 기계의 부품처럼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매뉴얼은 각 행위의 목적을 이해하게 하고 따라서 사람이 주체적으로 어떤 능력과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본문 중)

윤완철(KAIST 명예교수)

 

최근 우리 사회는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침수 사고 등으로 충격을 겪고 있다. 일상의 안전을 의심케 하는 이 사건들은 기존 산업 재해와는 또 결이 다른 불길함을 준다. 우선 평범해 보이는 상황에서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또한, 일 맡은 사람들의 허술함이나 해이에 의해 사회 안전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었는데, 정작 그 허술함의 근원엔 뚜렷한 주체가 없어 과연 고쳐질 병인지 답답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매번 매뉴얼에 관해 따지는 목소리가 높다. 예상하지 않던 위험이 출현해도 어디엔가 그것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있어서 우리를 지켜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매뉴얼은 어떤 능력이 있는 물건인가? 첫째는, 취약한 인간의 기억력의 제약을 풀어 주고, 둘째는,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작성되어 일이 닥쳐서 생각나는 대로 대응하지 않도록 해 주고, 셋째는, 공동의 지식을 지정하고 그에 입각하여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게 한다. 넷째는, 명시적인 내용으로 교육에 준용하고 다시 경험을 거기 반영하여 조직의 지식을 축적할 그릇이 된다. 공통 분모는 결국 매뉴얼은 조직 지능의 도구라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재난의 경우에 따라 수천 종의 위기관리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 위기관리의 내용은 재난의 발생 시 피해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해야 하는 일들로서 급박하게 돌아갈 대응 부분에 집중된다. 그 안에는 단계별로 필요한 직무, 직무별 관련 인원과 역할의 분담, 관련자의 책임과 권한, 예상되는 여러 경우에 적절한 대응 절차,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평소 실시할 교육 훈련의 내용과 방법, 정보 관리와 보고 방법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매뉴얼의 효과를 보았다는 소식보다 뚫렸다느니 미비하다느니 하는 개탄만 듣게 되는 걸까? 왜 매뉴얼은 재난 예방과 대응 과정에서는 도움이 안 되다가 사후에 범인 잡기에만 유능하게 등장하는 것인지, 정말 매뉴얼은 형식에 불과한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2008년 시애틀의 8개 병원은 수술실 안전 점검표를 도입하는 실험을 했다. 4,000개의 수술 사례에 적용한 결과, 수술 후 사망 환자가 47%나 줄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수술 후 사망 환자의 거의 반 정도가 의료진의 기억력이나 절차의 부실 때문이었다는 것이니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점검표라는 것이 전 과정을 다 합쳐 22개 문항에 불과했고 그것도 의사나 간호사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다는 것이다. 점검표는 가장 간단한 형태의 매뉴얼에 해당한다. 그 간단한 점검표로도 올바로 사용하고 그에 따른 훈련을 한 결과 이 정도의 힘을 나타낸다. 조직 지능을 만든 결과이다. 매뉴얼의 힘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효과를 내는 매뉴얼을 만들려면 위의 네 가지 목적이 성취되도록 조직과 직무를 설계하고 실제적인 직무 내용을 기술해 넣어야 한다. 특히, 위기 대응에는 여러 부서가 관련되기 때문에 책임과 권한이 잘 정리되고 명확히 기술되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최고의 전문 지식과 폭넓은 현장 경험을 수집하는 일도 노력이 들지만 필수적인 일이다. 실제로 세월호 사건 후 발족한 국민안전처는 여기저기서 수집한 5,301개의 재난관리 매뉴얼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 매뉴얼들에 대한 자체의 평가는, 사용자들이 이해하고 숙지하기 어렵고, 일반적 사항만 나열돼 책임과 연계가 명확하지 않고, 기존 업무와 섞여 형식적인 교육 훈련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고나 재난 때마다 매뉴얼이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병증이 나타났던 이유다. 우리 사회에선 지식 작업이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을 들여 좋은 매뉴얼을 만들 생각은 없이 터무니없이 빠른 시간 내에 책상 위에서 만들어 내라고 독촉하는 일이 많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정직성이 결여된 것이다. 지식과 경험이 들어간 만큼 효과가 있고 연구한 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데, 그 비례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배웠다는 사람 중에 의외로 많은 것 같다.

 

현장의 사람들은 오히려 날카롭게 그런 매뉴얼의 허구와 무능을 꿰뚫어 본다. 그러면 그 매뉴얼은 현장에서 존중되지 않고, 존중되지 않으면 사용되지 않고, 사용되지 않으면 수정 보완도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야 누가 매뉴얼을 위반한 꼴이 되었나 알려고 들여다보게 되고, 매뉴얼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볼멘 항의도 나오게 된다. 매뉴얼이 현장에서 외면되는 것은 애초에 현장이 매뉴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본 결과이다. 매뉴얼은 인간의 행동을 구속해서 기계의 부품처럼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매뉴얼은 각 행위의 목적을 이해하게 하고 따라서 사람이 주체적으로 어떤 능력과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인간은 고장 잘 나는 부품이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도 시스템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유연성과 적응성을 만드는 불가결한 자산인 것이다. 이것이 안전 탄력성의 법칙이다.

 

참여 정부 때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에서 위기 대응 매뉴얼 2,800여 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면서 이것은 승계되지 않았다. 매뉴얼들은 행안부로 옮겨졌으나 탯줄이 끊겨 생명력은 사라졌다. 실제 세월호 사건 직후, 이때 만들어진 “대규모 인명피해 선박사고 대응매뉴얼”이 해경 문서 보관실에 잠자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반면 해경에서 당시 쓰던 매뉴얼은 사용 목적이 다른 것으로서 실효가 없었다. 매뉴얼을 못 만드는 것이 무능이면 있는 매뉴얼을 사장시키는 것은 야만이다. 로마를 접수한 게르만인들은 상수도와 포장도로를 만들지도 쓰지도 못했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 줄도 몰랐다. 누군가의 캐비닛에 꽂혀있다고 해서 사용되는 매뉴얼은 아니다.

 

조직 지능의 도구인 매뉴얼이 효능을 잃으면 위기관리의 조직 지능은 발휘될 수 없다. 개인 지능의 파편만 바쁘고 질서 없이 오갈 뿐이다. 그런데 이런 매뉴얼을 목적에 입각하여 잘 만들고 잘 운용하는 것은 또한 조직 지능이 높아야 가능하다. 그래도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중 자물쇠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부터라도 정직하게 있는 지혜를 다하여 매뉴얼을 고치고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지능이 낮아서 못 한 것이 아니라 진지하지 않아서 못 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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