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드리운 자리』는 질문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는 첫 장면부터 시작하여 독자는 책을 읽어가며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대부분 필립 얀시가 오랫동안 씨름했던 질문들이고, 그중 상당수에 얀시가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 모든 독자가 만족하는 것은 아닐 테고, 더구나 그가 대답하지 않고 넘어가는 질문들도 있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는 후에 아내가 되는 여자 친구 재닛을 집에 데려갔다가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위해 신학 공부도 하고 사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원자 모집부터 모든 준비가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던 시점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소아마비로 폐가 망가진 그는 강제로 호흡을 시켜주는 ‘철폐’라는 장치에 꼼짝 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뜻밖의 불행 앞에서 얀시 부부는 하나님의 기적 외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기들 몫을 감당하기로 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헌신했는데 소아마비에 걸려 폐를 못 쓰게 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건 하나님이 극적으로 역사하실 기회가 아닐까.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적을 행하실 기회를 드려야 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얀시의 아버지는 ‘믿음으로’ 철폐에서 나와 자가 호흡을 시도한다. 한동안 일이 잘 풀리는가 싶었지만 2주 만에 그는 죽었다. 그의 나의 스물셋, 젊은 아내와 세 살, 한 살의 두 아들을 남긴 채로.

 

어머니: 서원이 의미하는 바

 

남은 밀드러드 앞에는 어린 두 아들을 혼자 키워내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적 문제와 더불어 어려운 신학적 과제가 놓여 있었다. 선교의 동역자이자 사랑하는 남편을 보낸 슬픔도 컸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이라 생각했던 남편과 자신의 믿음과 헌신은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 의미 있는 것이 될 가능성을 어린 두 아들에게서 발견했다. 두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가 된다면, 남편의 죽음도 자신의 인생도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두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다.

 

그렇게 된다면야 너무나 가슴 벅차고 합당한 일이 될 터였다. 더없이 좋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본인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하고 살아가면 되지만, 아이들은 별개의 인격이자 나름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의 서원은 당사자인 아이들의 협조가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서원에 부응하지 않을 때, 결국 그 서원은 가족 모두에게 올무가 된다. 너무나 합당해 보이는 ‘큰 그림’이라 해도,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큰 그림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실현하시리라는 믿음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밀드러드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 아플 때면 이런 기도를 자주 했다. “아프리카에 보내지 않으실 바엔 지금 데려가십시오.” 그녀가 자신의 서원으로 아이들뿐 아니라 하나님마저 얽어매려 하는 것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기도다. 대단히 경건하고 독실해 보이는 어머니의 서원은 아들들의 인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상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자녀들을 통해 자신이 살아내지 못했던 꿈을 이뤄내려 하는 여타 부모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거룩한 명분이나 뜻이 본질을 가리는 포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부모가 자식에 대해 귀한 소원을 품을 수 있다. 부모의 그런 서원을 자녀가 받아들이고 그 서원에 합당하게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회고록 제목이 『한나의 아이』가 아니던가. 그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소원이라고 해도,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관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밀드러드의 비극이자 두 아들의 비극이었다.

 

반항하는 큰아들

 

큰아들 마셜은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과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다. 어머니의 믿음과 헌신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마셜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어린 나이에 선교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런 선언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밀드러드와 마셜의 관계는 이후 강압과 반항, 저주와 미움으로 뒤얽힌다. 마셜이 성경 대학에서 기독교 명문인 휘튼대학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휘튼마저 신학적으로 의심스럽게 여긴 근본주의자) 밀드러드가 그 결정을 완강하게 막으려 함으로써 둘은 극렬히 대립한다. 아들을 막기 위해 밀드러드는 하나님이 마셜을 꺾으시기를 원한다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주를 퍼붓는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고, 마침내 둘은 수십 년간 서로 만나지도 않고 서로 용서하지도 않는 사이가 되었다. 비은혜의 사슬이 단단히 만들어진 것이다. 필립 얀시의 대표작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6장에 나오는, 비은혜의 사슬로 엮인 한 가족의 3대에 걸친 이야기는 사실 필립 얀시 가족의 이야기였다.

 

마셜이 반항적인 아들이었다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려 힘껏 노력했고 고등학교에서는 선교 단체의 대표로 활동했고, 성경 대학에서도 신앙을 붙들어 보려 했었다. 어머니와의 충돌을 무릅쓰고 입학한 휘튼대학에서도 마셜은 여러 신앙적 모색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진짜가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급기야 마셜은 기독교 외의 온갖 다른 세계를 경험했고, 정신적 문제가 연애의 실패로 결정적으로 악화되면서 대학을 그만두고 히피가 되어 마약에까지 손을 댄다. 이후 그의 삶은 좌충우돌,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와 같다. 그 과정에서 줄곧 그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무신론자가 되기에 이른다.

 

『빛이 드리운 자리』 표지, ⓒ비아토르

 

음험한 둘째 아들

 

교회에서 모범적 신앙인의 모습만 보여주는 어머니는 가정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신학을 신봉하고, 이생에서 완전한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고, 자신이 바로 그런 신앙인으로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녀에게 죄는 술을 안 마시고 영화를 보지 않는 것 등의 외적인 규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짜증과 분노 폭발, 위선 같은, 주로 집안에서 드러내는 본인의 죄는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둘째 아들 필립은 어머니와 형의 충돌을 보면서 뒤로 물러나고 자신을 감추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음험한 놈’이라고 불린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마찰을 피하려고 가능하면 여러 학교 활동과 아르바이트로 최대한 늦게 귀가했다. 대학 선택에서도 어머니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반 대학 대신에 성경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필립은 신앙을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른 시기에 깨달았고, 성경 대학에서도 처음에는 그런 위선적인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결국 그런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노골적인 회의론자로 자처하며 살아간다. 이중적이고 강압적인 어머니의 신앙과 양육의 결과, 두 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신앙에 회의적이 되고 세상과 불화하는 결과가 따라온 것이다.

 

그러나 필립의 경우에는 냉소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녹이고 세상을 ‘웃는 곳’으로 보게 해준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숨이 멎을 것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들이다. 성경 대학의 캠퍼스를 둘러싼 넓은 숲에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의 근원을 알고 싶은 욕망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둘째, 고전 음악이다.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있게 되면서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느낌을 받는다. 영혼을 진정시키는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셋째, 낭만적 사랑이다. 재닛을 만나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자신의 아픔과 과거를 털어놓고 공감을 받는다. 덕분에 선(善)을 믿을 수 있게 되고, 껍데기를 벗게 된다. 이상의 세 가지는 필립에게 “위로 올라갈 사다리”가 되어준다. 무언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 초월적 아름다움, 진정한 기쁨을 맛본다.

 

그에게 찾아온 은혜

 

그러던 어느 날, 의무적인 소그룹 기도회 시간, 평소 입도 벙긋하지 않던 필립이 불쑥 기도를 시작한다. 기도 중에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이야기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에게 느꼈던 연민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때 기도하며 머릿속에 그리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심상에서 뭔가 변화가 생긴다.

 

“느닷없이, 내 머릿속 스크린에서…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얼굴이 된다. 노상강도를 당한 처량한 유대인도 다른 얼굴이 된다. 그것이 내 얼굴임을 알아보고 나는 깜짝 놀란다. 나는 내 상처를 닦아 주고 흐르는 피를 멎게 하려고 예수님이 물에 적신 천을 가지고 천천히 몸을 숙이는 것을 지켜본다. 상처 입은 범죄 피해자인 내가 그분이 몸을 굽혀 내게 다가올 때 눈을 뜨고 그 얼굴에 정면으로 침을 뱉는 것을 본다.”1)

 

필립은 자신이 바로 강도당한 자인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려고 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 앞에서 그는 욥처럼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만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보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6-7, 한글KJV)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후 완전히 달라진다.

 

형제의 차이

 

같은 어머니 밑에서 비슷한 난관을 만나 기독교 신앙에 회의적이 되었던 두 형제 중에서 왜 동생 필립에게만 이런 체험이 주어졌을까? 형에게는 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어려운 질문이다. 필립은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을 두 팔 벌려 받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필립의 이 체험의 가치를 믿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이전까지의 숱한 경험에 의거하여 (둘째 아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 또한 ‘그냥 지나가는 일시적 바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체험의 진정성을 보여줄 입증 책임이 필립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필립이 이후의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다면, 그 체험은 정말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신비한 체험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닮아가는 변화로 드러나지 않는 한 별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마셜도 성경 대학과 휘튼대학 초기에 신앙적으로 뭔가 대단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처럼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나 그 모두는 금세 지나가는 일시적 사건들에 불과했다. 그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반면, 필립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보고’, 거기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기준, 세상을 바라볼 확고한 틀을 발견했다. 그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질문의 책

 

『빛이 드리운 자리』는 질문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는 첫 장면부터 시작하여 독자는 책을 읽어가며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대부분 필립 얀시가 오랫동안 씨름했던 질문들이고, 그중 상당수에 얀시가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 모든 독자가 만족하는 것은 아닐 테고, 더구나 그가 대답하지 않고 넘어가는 질문들도 있다.

 

이 글 앞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필립 얀시의 회고록에서 대단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미국 남부의 역사와 생활, 그곳의 신앙과도 같았던 인종 차별의 문제다. 그리고 남부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공유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남북 전쟁에서 남부인들의 모습을 이상화하고 북부인들을 악마화하고 인종 차별을 성경으로 정당화하는 관행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살다가 그 문제점을 인식하게 된 순간, 그런 껍데기와 기독교 신앙을 함께 벗어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런 껍데기와 분리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있는지 묻게 된다.

 

교회 생활과 교회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와 의문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결국, 신앙과 그 신앙이 전해지는 사회, 교회, 가정, 인간은 구분될 수 있는지, 그 구분은 정직한 것인지, 저자는 끊임없이 묻는다. 미국 남부인들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이었지만 자기들끼리는 더없이 끈끈하고 친절하고 신의를 아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가장 악독한 편견과 비인간적 태도가 더없는 인간미와 열렬한 신앙과 헌신과 공존하는 모습은 온갖 집단과 개인 모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게다가 믿음과 헌신의 삶은 우리의 기대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선교사로 준비하던 신실한 청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일은 얀시의 아버지에게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불러 준비시키시고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은 시점이 되자 데려가신다니. 그리고 그것에 따라오는 또 다른 불행과 어려움이라니. 그리고 어떤 이는 그 과정에서 끝내 은혜를 발견하고 또 다른 이는 비은혜에 머무는 불공평이라니.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프리퀄이자 초대장

 

『빛이 드리운 자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모든 문제가 깔끔히 정리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지가 않다. 현실은 훨씬 울퉁불퉁하고 뒤죽박죽으로 보인다. 때로는 고통은 이어지고,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고통과 문제투성이 현실이 바로 은혜가 주어지는 자리요, 아니 은혜가 이미 부어지고 있는 자리라고, 얀시는 이 책에서 강력하게 증언한다.

 

필립 얀시는 자신이 경험한 그 은혜를 바탕으로, 단 하나의 글, 서명과 같은 책을 일관되게 써왔다. 그래서 그는 회고록을 자신이 쓴 모든 책에 대한 일종의 프리퀄이라고 말한다.2) 얀시가 가장 강조하는 은혜의 특성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파격성이다. 오로지 그런 은혜 안에서만 그는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근본주의와 율법주의에 숨 막혀 지내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빛이 드리운 자리』는, 그리하여 얀시의 회고록이자 끝내 모든 이에게 보내는 초대장이 된다. 그런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

 


1) 필립 얀시, 『빛이 드리운 자리』, 홍종락 역(비아토르, 2022), 370.

2) 프리퀄이란 전편에서 다룬 이야기보다 시간적으로 앞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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