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은 현대 유럽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동시에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 쇄신된 이해와 해석 개념이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했다. 오늘날 모든 체험과 여러 학문과 문화의 영역에서, 단지 철학만이 아니라 신학, 종교학, 사회학, 정치학, 예술과 비평, 문화이론 등에서도 이 용어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해와 해석의 개념은 어떤 식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왔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해석학이 대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짧게나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 중)

김동규1)

 

철학 용어 중에서 이해와 해석만큼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말도 그리 많지 않다. “이해했어?”, “이해했어요”, “알아듣겠니?”, “대충 이해는 했는데…”, “이 곡을 어떻게 해석할까?”, “이 영화를 해석하는 나의 관점은…”, “이 성서 구절은 이렇게 해석하면…” 등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제대로 알고 있음을 표현하거나 그 의미를 밝히기 위해 우리는 이해와 해석이란 말을 사용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이전에 몰랐던 것을 깨닫거나 엄청난 통찰을 얻었을 때, “유레카!”를 외치면서 “이제 이 사건을 전혀 다르게,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어!”라거나, “이보다 더 나은 해석은 없겠는걸!”하면서 이해나 해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반대로 대화 내용의 이해와 해석과 관련하여 전달된 의도나 의미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해, “그건 너의 오해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해와 해석은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인데, 이 개념의 중요성을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들어 철학적 해석학은 끊임없이 이해와 해석의 의미를 쇄신하면서, 이것을 보편적인 철학, 조금 더 강하게 말하자면 제일철학의 지위로까지 부상시킨다. 해석학은 현대 유럽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동시에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 쇄신된 이해와 해석 개념이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했다. 오늘날 모든 체험과 여러 학문과 문화의 영역에서, 단지 철학만이 아니라 신학, 종교학, 사회학, 정치학, 예술과 비평, 문화이론 등에서도 이 용어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해와 해석의 개념은 어떤 식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왔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해석학이 대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짧게나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해석학은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소통과 의사 전달을 위해 전령 역할을 했던 신인 헤르메스[Hermes, Ερμής; 로마 신화에서는 영어로 머큐리라고 불리는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이름이 지금 사용되는 해석학(die Hermeneutik)의 어원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얘기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 오늘날 완연히 개화된 해석학의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소통과 해석은 의미 전달이라는 차원을 지녔고, 인간과 세계에 매우 중요한 ‘대화적 이해’의 의미를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헤르메스라는 신이 행했던 일로부터 이해와 해석이 본질적으로 어떤 작업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신과 인간은, 아무리 그리스 신화가 신을 인간화된 모습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서로 질적으로 다른 존재자들이다. 그런데 이 간극을 전령인 헤르메스가 이어 주는데, 여기서 헤르메스는 매개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의 뜻을 전하는 헤르메스를 생각해 보자. 그는 제우스의 뜻을 단지 기계적으로 전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프로메테우스를 설득하고 그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원래의 의도보다 더 많은 것이 부여되고,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전령인 헤르메스도 신의 의미를 매개하고 있고, 그 메시지를 받은 자 역시 헤르메스가 전달한 신의 의도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매개자의 매개자, 즉 어떤 표현(헤르메네이아)의 매개자다. 이 기능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원래 단어들에서 파악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이 말해지고 매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Grondin 1991 27[58]). 말이 글을 매개로 전달되는 것처럼, 언어는 이미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 언어를 사용하는 해석자는 매개자의 매개자, 즉, 표현의 매개자가 된다.

 

그리스 철학 전통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이 기초적 의미의 해석을 가장 처음 전달한 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Ricoeur 1965, 29-30[60]). 여기서 『명제론』(헬라어, Peri Hermêneias; 라틴어, De interpretatione)의 제목에 나오는 명제라는 말은 해석이라는 의미도 된다. 즉, 그것은 ‘해석에 관해서’로 읽힐 수도 있다. 물론 이때의 해석은 오늘날 철학적 해석학이 중요시하는 해석 개념보다는, 참과 거짓을 담는 문장인 명제와 명제들의 관계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정도의 내용만을 다룬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은 오늘날의 의미로는 ‘해석학’보다는 ‘논리학’이나 ‘문법학’ 영역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말의 형식과 그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협소한 의미에서 해석학적 쟁점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다양하게 말해진다’, 또는 ‘존재는 여럿으로 말해진다’는 식으로 존재의 다의성을 긍정하면서, 제한적 의미이기는 하나 의미 이해와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지평을 어느 정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해석이 더 널리 쟁점으로 부상된 것은 역시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하던 초창기에 여러 교부들은 성서의 구절이 네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도 어느 정도는 통용되는 것인데, 네 가지 의미란 문자적, 알레고리적, 신비적, 도덕적 의미를 말한다. 이 가운데 알레고리적 해석의 예로서 오리게네스(c.185-c.253)시대에 회자되던 한 가지 성서 해석을 보자.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강도 만난 이를 도와주던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를, 여관은 교회를, 거기서 건네지는 동전 두 닢은 각각 구약과 신약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이것은 성서의 의미를 다의적으로 보거나 비유와 상징을 사용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해와 해석의 다차원성을 가리키기는 하나 오늘날의 해석학과는 거리가 있으며, 성서 해석의 기술에 관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특히 중세로 가면서 이런 해석의 의미는 더욱 확장되는데, 일부 중세 신학자들은 단지 성서만이 아닌 자연까지도 해석의 대상이 된다고 보았다. 비록 세세한 부분에서 성격은 다르지만, 오늘날 단지 글로 쓰인 텍스트만이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을 해석의 대상으로 보는 것처럼, 이미 중세에도 해석의 대상이 기록된 것을 넘어서 있었다.

 

폴 리쾨르는 여기에 더하여 스피노자에 의해 성서 해석학의 진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성서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사건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꾀한다. 이것은 “철학으로만 정경을 해석한다는 원칙을 따라 제정된 새로운 해석학을 대두시킨다. 이렇게 엄밀한 성서적 관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 스피노자의 진일보는 성서 해석에서 자연에 대한 해석으로의 호기심 어린 귀환을 나타낸다”(Ricoeur 1965, 33-34[66-67]).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자신의 이성주의적 원칙을 따라 성서 해석의 엄밀한 규칙과 전통에서 해방된 이해와 해석의 모험을 감행했다. 일종의 전통적 규범에 대한 해체가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성서를 이해할 때나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기존의 매체 문법이나 장르 문법이 아니라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철학적 사고의 틀에 입각해서 해당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경향 역시 이런 스피노자의 해석 모험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더불어 해석학의 발전에서 니체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진리를 더는 사실의 진리나 객관적 진리로 보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는 ‘힘에의 의지’의 발현이고, 인간의 진리 이해는 인간 자신의 특정한 힘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이며, 이때 진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밝혀주는 데 이바지한다. 이런 점에서 니체를 통해 우리는 모든 진리를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삼는 해석으로 여길 수 있게 된다. 이에 그롱댕은 이런 니체의 도전과 모험을 “범해석학주의”(Panhermeneutismus)라고 부르는데(Grondin 1991, 17[42]), 이렇게 보면 우리 시대의 특별한 가치 이해와 세계 이해를 비롯 모든 진리 이해에는 해석이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이 니체에게서 비롯했음을 알게 된다. (물론 니체 역시 모든 해석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플라톤과 그리스도교는 힘에의 의지와 삶의 긍정보다 피안의 세계를 향함으로써 지금 그리고 여기서의 삶에 대한 부정적, 반응적 힘을 상승시킨다.)

 

해당 글과 관련없는 이미지 입니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이해와 해석, 그리고 해석학의 의미 확장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을 넘어 해석학의 형태가 획기적으로 변경된 것은 흔히 자유주의 신학의 선두 정도로 이해되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에 이르러서였다. 슐라이어마허는 그 이전까지 해석에 대한 여러 혁신적인 이해들에도 불구하고 해석학이 적어도 학문의 차원에서는 법률 해석학이나 성서 해석학처럼 특정한 영역에서 텍스트나 사건의 이해를 돕는 지침이나 기술 정도로 여겨왔던 흐름을 반전시켰다. 즉, 해석학을 일부 영역에 종속된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여 보편적인 의미의 해석학을 성립시킨 것이 슐라이어마허의 기여다. 해석은 모든 텍스트 이해에서 일어나며, 이때 이해와 해석은 인간의 마음과 삶과의 연관 가운데 일어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에게 해석학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사태인 언어적 표현과 관련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정신적인 면, 심리학적인 차원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해석학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언어와 관련해서 슐라이어마허는 보편적 해석학이 문법적 차원과 기술적-심리학적 차원이라는 두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전자는 해석이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불명료성이나 오류를 없애기 위한 의도에서 설정된 것이며, 후자는 저자의 입장을 재구성하는 것과 관련한다(Grondin 1991, 91-95[161-67]).

 

전자가 전통적인 자구적 의미의 해석학과 연관되어 있다면, 후자는 그의 독특한 해석학적 기여의 특징을 더 잘 보여준다. 이 심리학적 차원을 슐라이어마허는 두 가지 차원에서 묻는다. 즉, 우리가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심을 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을 연구하기 위한 사전 준비는 작품에 그러한 통일성이 전제되어야 하는지를 나타내야 하며, 전체는 개별로부터 설명되어야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저자의 맹아적 결심에 들어간다면,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저자의 삶의 어떤 양적 부분이 그러한가이다”(Schleiermacher 1977, 189).

 

다시 말해, 이것은 저자의 결심과 마음 상태가 텍스트에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전제하며, 이러한 요소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텍스트에 대한 참된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슐라이어마허는 “모든 이해 작용은 말함이라는 작용의 이면이며,…말함의 기저에 놓여 있는 의식을 파악해야만 한다. 모든 이해 작용은 말함이라는 작용의 이면이므로, 주어진 진술의 기저를 이루는 생각을 파악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해석의 최고 완전성은 저자가 그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공식에 어느 정도의 진리가 있다”(Schleiermacher 1974, 76, 138)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슐라이어마허는 저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텍스트를 썼을 당시의 결심을 파악하는 것을 올바른 해석의 쟁점으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파악을 할 수 있는가? 이때 슐라이어마허는 예료, 또는 예감으로 번역되는 ‘Divination’의 파악 방식을 제안한다. “전체 과제에서 처음 시작부터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예감적인 것과 비교적인 것으로, 이 둘은 서로를 향해 있으면서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예감적인 것은 자신을 다른 것으로 변경시킴으로써 개별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비교적인 것은 먼저 이해될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그런 다음에 같은 일반적인 것 아래에서 다른 것과의 비교에서 개별적인 것을 찾는다. 전자는 인간에 대한 인식에서 여성적 힘이고, 후자는 남성적 힘이다”(Schleiermacher 1974, 105). 여기서 예감적인 것은 직감 또는 직관적 의미 파악을, 비교적인 것은 문법적인 해석 작업을 의미한다. 후자에 대해서, 오늘날의 역사적 비평이나 구조주의 방법론 같은 기술적(technical) 접근법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감정 이입적이 되기 쉽다. 이분법적인 부분은 슐라이어마허가 문법적 해석을 남성적인 것으로, 예감적 해석을 여성적인 것으로 완전히 분리해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역시 시대의 자식이므로 전통적인 성차 구별에 익숙했다고 할지라도, 양자가 이토록 첨예하게 구별되는지는 의심스럽다. 이해 방식에 관한 이런 식의 구별을 우리는 그의 『성탄 축제』라는 철학적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크리스마스에서 설교를 듣고 난 후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해석 방식이 남성적인 이해와 여성적인 이해로 다시 나뉜다. 등장인물 중 남성들은 크리스마스 설교를 듣고 난 후 설교의 논리적 구조나 어법, 예화의 적절성을 두고 논쟁하는 반면, 여성들은 그 설교가 오늘날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나누며, 자유로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회고하고, 회상하고, 또 자신의 삶과 연관시킨다(Schleiermacher 1989[2001] 참조).

 

슐라이어마허가 제안한 이런 해석 방식은 어쩌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서를 읽을 때, 적용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세심하게 성서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서를 읽을 때 분명 문법적인 것을 염두에 둔다. 이때 문법적인 것은 단지 단어나 구문 분석, 문단 간 연결을 살피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슐라이어마허는 “분명히 단어와 사실적 설명을 제공하는 문자에 대한 해석학은 역사적 이해와 문법적 이해 모두와 관련이 있다”(Schleiermacher, 154)라고 말한다. 즉, 올바른 이해와 해석 작업은 이런 상세한 방법적 기술이 전제되어야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앤서니 티슬턴이 든 예를 보면, 우리는 흔히 문법적인 기예나 역사적 배경을 소홀히 하는 탓에 쉽게 오류에 빠진다. 서로를 속이면서 이해와 오해의 투쟁을 벌이던 야곱과 라반을 보자. 그들은 헤어질 때 서로를 인정하고 용서했을까? (개역개정판 성서 번역을 따르자면) 분명 라반은 야곱에게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창세기 31:49)라는 말을 건넨다. 이는 얼핏 여호와의 돌보심을 가리킨 말 같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살피다’(tsaphah)는…통상적으로 적을 경계한다라는 의미로 통한다”(Thieselton 2009, 23[46]).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마도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길! 네가 또 다른 꾀로 사람을 속이면 그분이 내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다!’ 이렇게 텍스트 배후에 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의미는 우리로부터 달아난다”(Thieselton 2009, 23[47]).

 

이처럼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문법과 역사적 배경 및 상황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이해와 해석을−텍스트에 관한 것이든, 인간이나 세계에 관한 것이든−안전한 길로 가게 해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예감적 방식을 강조함으로써 해석이 비단 문법적 기예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주었다. 흔히 일어나는 적용의 상황을 보자. 우리는 개인적인 경건을 위해 성서를 읽으며, 해당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성서의 저자가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해당 구절을 썼으며, 그 의미가 나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지 돌아본다. 이때 우리는 적용에 앞서, 또 적용과 더불어 저자의 심경으로 들어가거나 저자의 상황에 깊이 침잠한다. 옥중서신을 쓴 바울의 암울한 상황을 떠올려 본다거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며 느꼈던 비통한 심경과 결심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놓인 상황 속에서 결단하는 마음으로 이행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슐라이어마허는 매우 자연스러운 해석의 상황을 학술적인 형태로 정립한 것일지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슐라이어마허가 비교적-문헌적 방법과 예감적 방법을 동등하게 중요한 것으로 설정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감적 직관의 방법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지금 누군가가 기록의 절차와 예감적 절차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묻는다면, 후자가 비판의 실제적 기초이며, 오로지 예감만이 기록적 방법이 충분치 못한 직접적 해석학적 작용이라는 목적을 위한다. 만일 당신이 저자에게서 쓸 수 없을 정도로 헤진 구절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오로지 하나의 판본만 있다면, 추측, 곧 예감적 과정이 일어난다”(Schleiermacher 1977, 264). 즉, 텍스트 해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텍스트 이해와 해석의 핵심에 들어가게 해 주는 것은 예감이라는 게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지점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해석 방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비판적 개입 없이 사태를 받아들이게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메롤드 웨스트팔의 지적에 따르면, “예감적 직관은 일종의 직접성을 띠고 있지만, 그 자체가 고도로 매개되어 있는 직접성이다. 인종 편견이라는 직관이 어떤 세계(이 세계 자체도 다양한 역사적, 심리적 과정을 통해 매개된 세계다)에 사회화됨으로써 매개된 것처럼, 해석학적 직관 역시 방법의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학문적 작업을 통해 매개된다”(Westphal 2009, 33[48]). 다시 말해, 예감적 방법의 약점은 “우리의 직관 자체가 순전히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직관 자체가 이미 특정한 선입견이나 편견의 지배 아래 형성된 것이라면 그 직관에서 일어나는 이해의 섬광은 우리를 잘못된 이해와 해석으로 이르게 할지 모른다.

 

나는 지금 여기서 선입견과 편견의 지배라는 표현을 썼다. 즉, 이는 우리가 순전한 객관적 태도 아래 세계와 텍스트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또 바꿔서 물어볼 수도 있다. 과연 선입견과 편견은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이해와 해석을 시도할 때 일어나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에 가깝지 않은가? 이 주제를 가장 깊이 있고, 치열하게 다룬 이들이 바로 하이데거, 가다머, 리쾨르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이해의 해석학 노선에 선 이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이해와 해석을 지금까지 열거한 텍스트나 사건의 파악 방식이나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철학적 해석학에서 의도하는 이해와 해석의 의미를 조금 더 넓게 포괄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된다. (다음에 계속)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문헌

 

Grondin, Jean (2001). Einführung in die Philosophische Hermeneutik.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국역본: 『철학적 해석학 입문』, 최성환 옮김. 서울: 한울, 2008.

 

Ricoeur, Paul (1965). De l’interprétation: essai sur Freud. Paris: Éditions du Seuil. 국역본: 『해석에 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 김동규·박준영 옮김. 고양: 인간사랑, 2020.

Schleiermacher, Friedrich (1974). Hermeneutik. Nach den Handschriften neu herausgegeben und eingeleitet von Heinz Kimmerl. Heidelberg: Carl Winter Univenitätsverlag.

 

Schleiermacher, Friedrich (1977). Hermeneutik und Kritik: mit einem Anhang sprachphilosophischer Texte Schleiermachers. Herausgegeben und eingeleitet von Manfred Frank. Frankfurt am Main: Suhrkamp.

 

Schleiermacher, Friedrich (1989). Die Weihnachtsfeier: Ein Gespräch. Zürich: Manesse. 국역본: 『성탄축제』. 최신한 옮김. 서울: 문학사상사, 2001,

 

Thieselton, Anthony C. (2009). Hermeneutics: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MI: Eerdmans. 국역본: 『앤서니 티슬턴의 성경해석학 개론』. 김동규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Westphal, Merold (2009). Whose Community? Which Interpretation?: Philosophical Hermeneutics for the Church.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국역본: 『교회를 위한 철학적 해석학: 누구의 공동체? 어떤 해석?』. 김동규 옮김. 고양: 도서출판10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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