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학에 중점을 둔 책은 더러 있지만, 이렇게 당사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책은 드물다. 현장의 목소리는 언제나 분석과 이론보다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다. 책에는 차별당한 이야기도 많지만, 그 속에서 동료들을 만나고, 변화를 모색하는 분투와 기쁨도 담겨 있다. 절망과 희망, 자조와 열정이 굽이치며 이어진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이민지 지음 | 『언니네 교회도 그래요?』
들녘 | 2020년 8월 18일 | 232쪽 | 14,000원
중고등부 시절 담당 목사님은 여학생들에게 ‘사모가 되어라’라고 자주 ‘축복’했다. 그중 ‘신실한’ 학생들은 목사님의 말씀에 감동하여 실제로 사모가 되겠다는 ‘비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당황스럽다.
『언니네 교회도 그래요?』를 읽다 보면 이런 허탈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가 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혐오와 차별을 피부로 경험하고 있는 교회 여성들의 증언이 생생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갇힌 상상력, 갇힌 하나님
왜 목사님은 굳이 “‘사모’가 되어라”라고 했을까? 어째서 목사, 신학자, 지도자가 되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까?(물론 이 질문 이전에, 타인에게 ‘무엇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험의 지평, 즉 상상력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당시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는 남성만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기에, 여성이 목사가 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특정 제도와 문화가 어떻게 집단의 상상력을 움켜쥐고 고착화하는지 보여 주는 일면이다.
책에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돌아보게 하는 그림이 나온다. 켈리 레티모어의 <삼위일체>라는 작품인데, 그림에는 각기 다른 인종의 여성들이 삼위일체로 표현되어 있다. 조금 더 도발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없다.
흑인 여성이 성부 하나님으로 나오는 영화 <오두막>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다양하고 낯선 은유는 사로잡힌 상상력과 하나님을 되찾는 시도가 될 수 있다.
혐오감 없는 여성혐오
“한번은 목사님이 죄에 대해서 설교하시는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술과 여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정말이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예배드리는 인원의 절반이 여자인데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는 건가요?”
“목사님 설교 듣기 싫어서 교회를 안 나가다가 오랜만에 한 번 가보자, 하고 나갔는데 이러시는 거예요. ‘요즘 여자들? 살기 좋아졌어요. 여성 상위 시대 아닙니까. 우리 어머니는 얼음장을 깨 가지고 빨래를 하셨는데, 요즘 여자들은 빨래도 세탁기가 다 해줘, 건조까지 알아서 다 되는 세상이잖아요!’ 그 말을 듣는데 제가 여기를 박차고 나가야 하나, 했던 것 같아요. 그냥 시대가 좋아졌다고 하면 되지, 저런 얘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책에 나오는 사례들인데, 보고 있자면 이러한 언행의 대부분은 여성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특정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여성혐오가 바로 이것이다. 흔히 여성혐오라고 하면 여성에게 가지는 부정적 감정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저자는 여성혐오를 “단순히 여성에 대한 혐오와 비하가 아니라 여성을 일반화·대상화하는 배제와 차별 일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우에노 지즈코의 주장을 가져온다. 또한 ”호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맥쿼리 사전은 여성혐오의 정의를 개정하여 ‘여성에 대한 미움·반감’이라는 기존 의미에 ‘여성에 대한 확고한 편견들’을 더했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처럼 여성혐오가 여성을 대상화하고 편견 속에 가두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다음의 증언을 그저 무시할 수 없다. “나는 교회에 하나님을 빼앗긴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남성이라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했고, 결국 내게서 하나님을 빼앗아 갔다.”
“이제 난 내 하나님을 되찾고 싶다.”
여성신학에 중점을 둔 책은 더러 있지만, 이렇게 당사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책은 드물다. 현장의 목소리는 언제나 분석과 이론보다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다. 책에는 차별당한 이야기도 많지만, 그 속에서 동료들을 만나고, 변화를 모색하는 분투와 기쁨도 담겨 있다. 절망과 희망, 자조와 열정이 굽이치며 이어진다.
분명한 것은 아직 더 많은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책과 서사가,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이, 더 많은 고민과 싸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통 감각을 가진 “지지 집단”1)이 필요하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아픔에 공감하고, 전진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연대 말이다.
그러므로 변화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언니네 교회도 그래요?”
1) “지지 집단이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여성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이 주제를 탐색해 왔고 한 연구자는 이것을 ‘삶을 재해석해 내는 자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지지 집단이 상호 지지와 격려, 치유의 과정을 만들고, 그 지점에서 새로운 역할 모델이 제시되어 삶을 재해석하는 자원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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