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는 모두에게 동일한 정도의 어려움으로 닥쳐오지 않습니다. 약자와 차별받는 자들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재난이 되고, 강자에게는 더 강해질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 기울어질 수 있는 이런 기후 위기의 시대에 ‘기후 정의’는 더욱 강조되어야 합니다. ‘기후정의행진’은 사회적 약자들이 서로 연대함으로써 기후 위기와 부정의를 함께 이겨낼 것을 선언했습니다. (본문 중)

윤동혁(기윤실 활동가)

 

대낮에 아스팔트에 등을 대고 누웠습니다. 지난 9월 23일 토요일 오후, 종각에서 안국역으로 가는 조계사 앞 도로 위였습니다. 파란 하늘과 무성한 가로수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달랐던 것은 주위를 둘러싼 펄럭이는 깃발들과 함께 누운 수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2시, 시청 앞 세종대로에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형형색색의 깃발을 앞세우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단체들과 유아차에 피켓을 붙이고 나온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자전거면 충분해”라는 메시지를 자전거에 붙이고 끌며 행진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준비해 온 피켓을 들고 거리에 앉아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빈곤사회연대, 반핵아시아포럼,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모임, 오송참사 시민대책위, 삼척석탄화력반대투쟁위원회, 전국철도노동조합 등의 대표자들이 발언에 나섰습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기온 상승을 막자, 기후 위기로 더 심해지고 있는 불평등과 부정의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외침이었습니다.1)

 

이번 기후정의행진의 주제는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위기’는 ‘기후 위기’이기도 하고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부정의에 의한 위기’이기도 합니다. 집회 끝자락에 낭독된 선언문의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립되거나 혼자가 아닙니다. 신림동 반지하 세입자와 태평양 섬나라 원주민, 뙤약볕 아래 농민과 발전 비정규 노동자, 새만금의 흰발농게와 설악산의 산양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삼척 석탄 발전소 공사를 멈춘 행동과 민영화를 멈춰 세운 철도 파업, 금강에 펼쳐진 농성장과 핵발전소로부터 이주를 요구하는 천막, 오송 참사의 책임을 묻는 싸움과 이동권을 위해 몸을 던지는 장애인의 투쟁, 이 모든 싸움들은 하나입니다.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연대가 곧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입니다.2)

기윤실 자발적불편운동 가을캠페인 <참여로운 기후실천> “923 기후정의행진 참여” 포스터

 

 

기후 위기는 모두에게 동일한 정도의 어려움으로 닥쳐오지 않습니다. 약자와 차별받는 자들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재난이 되고, 강자에게는 더 강해질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 기울어질 수 있는 이런 기후 위기의 시대에 ‘기후 정의’는 더욱 강조되어야 합니다. ‘기후정의행진’은 사회적 약자들이 서로 연대함으로써 기후 위기와 부정의를 함께 이겨낼 것을 선언했습니다.

 

아스팔트에 누운 건 집회가 끝나고 이어진 행진에서였습니다. 행진 도중 갑자기 울린 사이렌은 ‘다이-인(die-in) 퍼포먼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행진하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아스팔트에 누웠습니다.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이-인’은 ‘기후 위기로 인해 죽은 생명들’과 ‘종들의 멸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기후 위기를 가속하는 ‘부정의한 체제를 멈추자’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조계사 앞 우정국로에 누워 생명의 멸종과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성장이 멈추기를 바랐던 그 순간은 여기가 서울 한복판인가 싶을 정도로 고요했고 마치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고개를 돌려 정류장을 보니 기다리는 버스가 오지 않았는지, 한 시민이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행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성장과 속도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차도를 막고 드러누운 이들이 불편한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노들야학의 활동가였던 홍은전 씨는 그의 책 『그냥, 사람』(봄날의책, 2020)에서 속도가 중요한 사회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촘촘하게 과속하는 사회에서 촘촘하게 고통이 전가된다. 제 속도를 고집하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욕먹기 십상이므로 사람들은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몰아붙인다. (44쪽)

 

기후정의행진이 외친 정의로운 사회, 약자들의 연대는 ‘빨리 가는 모두가 조금씩 느려지고, 걸음이 느린 사람을 친절히 도와주는 사회’일 것입니다. 조금 더 불편해지고 답답하더라도 모두가 속도를 줄여 느리게 함께 걷는 ‘기후 정의 사회’를 꿈꿉니다.

 


1) ‘923기후정의행진’에서 발표한 ‘우리의 요구’ 5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기후 재난으로 죽지 않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 ②핵발전과 화석 연료로부터 공공 재생 에너지로,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하라. ③철도 민영화를 중단하고 공공 교통을 확충하여, 모두의 이동권을 보장하라. ④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 위기를 가속하는, 신공항 건설과 국립공원 개발 사업을 중단하라. ⑤ 대기업과 부유층 등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고, 기후 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2) 923기후정의행진, “923기후정의행진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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