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컬리가 힘겹게 찾아낸 하나의 길은 기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분노와 절망조차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소망을 찾는 길은 언제나 고통 속에 기꺼이 들어오신 분 앞에 절망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상기해 낸다. 매컬리는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십자가라는 근본을 놓지 않았던 흑인들의 성경 해석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본문 중)

박은영1)

 

나는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마이너리티와 장애를 공부하고 있다. 내가 보는 글들은 대부분 서론부터 결론까지 어두침침한 내용들로 그득하다. 폭력, 학살, 차별, 고문, 통증, 질병…. 가족들은 내 책장 한가득 꽂혀 있는 검거나 붉은 책들을 보며 내 정신 건강을 걱정하곤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는 일은 늘 두렵다. 권력과 돈은 오직 그것을 소유한 자의 욕망과 안전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 사회는 철저하게 비장애인만을 위해 구성되어 있고, 장애인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하지 못하며 툭하면 혐오 발언에 노출된다.

 

우리는 최소한, 권력자들은 비윤리적이고 상호 분열하지만,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서로 끈끈히 연대한다고, 차별받던 장애인들과 소수자들의 말과 행동이 이 세상에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시민 사회의 운동가들과 사회를 면밀히 고찰하는 연구자들은 그조차도 핑크빛 환상이라고 다시 한번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들은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욕망 혹은 불안에 사로잡혀 이합집산할 때가 많다고 고백하고,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역사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인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갑갑한 이야기들을 얌체같이 굳이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럼에도 지쳐서 주저앉아 있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것은 희망찬 격려보다는 세심한 절망일 때가 많다. 재빨리 희망을 내뱉지 않고는 눈앞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오래 머물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섣부른 희망에 기대지 않는 사람들이 절대 쉽게 풀리지 않는 복잡한 상황에 불쑥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되 섣부른 희망의 언어를 삼간다. 현실이 얼마나 지독하게 꼬여있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그런 상황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존중한다. 그중 일부는 멈추지 않는 혐오 발언과 차별적인 사회가 부과한 곤란들을 기어이 살아 내는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들을 억압하는 불의한 사회 구조를 최대한 세밀하게 분석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도 한다.

 

사회적 불의가 삶에 어떤 분탕질을 하는지 들려주는 목소리와 글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노래하는 것 같다. 거기에 몰입해 있다 보면 어느새 희망보다는 절망에 더 가까운 곳으로 둥둥 떠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얼마 전 문득, 약간의 우울감이 내 감정의 기본값이 되어있다는 생각에 좀 겁이 났다. 사회의 부정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우울에서 벗어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어둠에 지기 위해 어둠 앞에 서는 게 아니란 점이다! 사회 운동가도, 사회상을 표현하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어둠 이상의 것을 바라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어둠을 증언한다. 그들이 어둠을 증언하는 목적은 기쁨과 소망, 새로운 나라에 대한 꿈이다.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축제 같은 일상, 크고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보란 듯이 기뻐해야 한다. 여기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면 다른 이유도 추가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피조물들을 사랑하여 그들이 매일매일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는 창조주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내 안에 기쁨의 역량이 아직 남아있긴 한 걸까? 아니라고 하는 편이 정직한 고백일 것이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나는 아직 절망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내게 기쁨의 기술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들을 꽤 알고 있다.

 

먼저 나는 절망의 순간에 기쁨의 근원으로 돌아갈 줄 아는 신앙인들을 안다. 최근에 읽은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IVP)에서 아서 매컬리는, 기쁨의 기본기를 내게 다시 알려주었다. 매컬리의 책은 역사 속에서 진행된 미국 흑인들의 성경 해석이 백인의 관점으로만 구성된 신학을 더 적실한 신학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한다. 매컬리는 길고 긴 고난의 목록에도 흑인들의 역사와 정체성은 하나님 안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자리를 차지한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흑인들의 고난 목록을 상기할 때 그의 시도는 금세 다시 무력해진다. 여전히 흑인들은 아무 때나 경찰에 붙잡혀 불심 검문을 당하고 자신이 원하는 동네로 자유롭게 이사하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분노를 용서로, 절망을 용기로 전환하라는 구호는 불의와 타협하는 언어일 뿐이다. 히지만 그럼에도, 불의에 끝까지 눈감지 않으면서도 정의를 희구하는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매컬리가 힘겹게 찾아낸 하나의 길은 기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분노와 절망조차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소망을 찾는 길은 언제나 고통 속에 기꺼이 들어오신 분 앞에 절망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상기해 낸다. 매컬리는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십자가라는 근본을 놓지 않았던 흑인들의 성경 해석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매컬리가 흑인 신앙인들의 역사에서 배웠듯이, 나는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구했던 선배들의 신앙에 기댈 수 있다. 그들은 확고한 기본 진리에서부터 시작하는 소망 연습은 결코 무력하지 않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준다.

 

이 땅에서 소망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소망의 근력을 더 키워야 한다. 글 몇 편 읽고 기사 몇 개 접했을 뿐인데 우습게도 난 벌써 기뻐하는 데 서툴어지고 있다. 이대로는 시대의 절망과 그것을 감당하는 분들의 곁에서 금방 도망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내가 부딪히는 소소한 차별과 조그만 절망조차도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난 아무래도 기쁨과 소망의 근력운동을 정기적으로 해줘야 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게 기쁨을 가르쳐줄 사람들, 기쁨을 배울 수 있는 곳을 계속 찾아다닌다. 때로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글 쓰고 연구하는 사람들 옆으로 간다. 그들은 현실의 왜곡된 사회 구조를 스케치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위한 밑그림을 준비한다. 그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도 결국 누군가에 대한 비판을 글에 담을 수 있는 힘은, 사람이란 비판받아야 하는 면 이상의 존재라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기 때문이다.

 

차별에 쉽사리 노출되고 사회의 어떤 기관도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동료들도 있다. 그들은 매일 서로 유머를 주고받기를 잊지 않는다. 누군가 듣고 온 말도 안 되는 혐오 발언에 함께 분노하는 데도 최선을 다한다. 때로는 시위를 조직하고 때로는 은근슬쩍 정면 대결을 피해 스스로를 지킨다. 그렇게 서로의 희로애락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난 희, 노, 애, 락 모두에 성실한 삶을 배운다.

 

기쁨의 근원을 매일같이 찾아가기, 현실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장난기와 유머 감각을 탑재한 기쁨의 기술자들을 만나 밥 먹기…. 이 방법들 모두 친구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내가 제일 자주 사용하는 전략은 무엇보다 ‘사실 되뇌기’다. 우리가 선하게 창조되었고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대개 나보다 나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꾸 되뇌는 것이다. 엉망으로 보이는 현실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도, 나의 좁디좁은 마음에 비친 희미한 상일 뿐이다. 대신 우리라는 복잡한 존재가 얼마나 재미있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는지 상기해 본다. 그렇게 오묘한 존재들이 모여 함께 살고 있다는 자체가 경축할 만하고 소망으로 가득한 것임을 기억하는 순간, 조금씩은 다시 설레기 시작한다.

 

늘 기쁨의 연료가 충분히 구비되어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물론 불가능에 가깝게 보일 만큼 나는 오늘도 희망보다 절망에 눈이 먼저 간다. 하지만 내 심각한 어깨를 툭 치며 유머를 부어주는 사람들처럼, 나도 연료가 바닥난 동행에게 기쁨 한 사발 듬뿍 퍼줄 수 있는 사람이 고 싶다.

 


1) 『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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