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이란, 좋은 연기처럼, 자신의 내면에 숨겨 놓은 취약한 영혼을 드러내는 일이다. 좋은 배우는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어 관객과 공유한다. 작중 인물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건 배우가 자신의 취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연기란 어떤 인물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연기를 닮은 건 이 때문이다. (본문 중)

이정일(작가, 목사)

 

“아무리 치매 환자라도 감정은 남아 있대.”1)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에 나오는 문장인데 가끔 이 문장을 곱씹을 때가 있다. 삶이 편리해질수록 많이 아는 게 중요하지 않고 뭘 아는가가 중요해지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강물은 지금도 계절을 담아 흐르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바쁘게 자라온 우리는 계절의 변화에 무덤덤하다.

 

다들 사랑하고, 감동하고, 갈망하고, 전율하며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사는 이는 적다.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주간 몰두했던 일이 잘 끝났을 때 만족감이 찾아온다. 편한 마음으로 퇴근하는데 문득 노을이 눈에 들어왔다면 그 느낌의 순간이 갖는 맥락이 있다.

 

뭐든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노을이 눈에 들어왔다면 그 느낌이 분명하지 않아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때 일에 치여 무뎌졌던 감정이 되살아나며 순간적으로 긴장이 이완된다. 노을이 눈에 든 건 그 때문이다. 노을을 바라보는 그 찰나의 순간 감정이 이완되니 ‘아름다움’이라는 쾌감이 느껴진다.

 

마사지를 받으면 쾌감이 어마어마하다. 긴장하여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때를 놓친 후 뒤늦게 먹는 밥맛이 유독 맛있다. 배고픔이 주는 긴장을 밥이 풀어주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는 긴장과 해소를 탁월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시나리오 작가이다. 작가는 대사와 서브텍스트를 통해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바쁜 직장인이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맛집을 찾는 건 긴장을 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운 음식이나 스릴러물을 찾는 건 뭉쳐 있는 마음을 풀고 싶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초기 논문 「쾌락 원칙」에서 말했듯이 “모든 쾌감은 긴장이 이완되면서 온다.” 쾌감은 긴장이 높아질 때도 찾아오지만 긴장이 풀어질 땐 더 강렬하게 찾아온다.

 

 

영화에서 인물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관계망에 걸려 허덕이고, 예기치 않은 순간 그 인물의 속마음이 삐져나온다. 나라면 그 순간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나는 인물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떤 영화를 보든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면 그것이 내가 처한 상황이거나 내가 풀고 싶은 긴장된 감정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감정을 느꼈다면, 이런 감정을 왜 느꼈는지, 또는 어쩌다가 느꼈는지에 대한 정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 감각 기억을 내가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연기파 배우들이 있다. 그런 배우들의 공통점은 인물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인물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읽어내는 감각이 놀랄 정도로 좋다.

 

연기파 배우일수록 작중 인물이 숨겨 놓았을 속마음을 찾아내는 힘이 남다르다. 배우에게 대사를 치는 힘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대사로 표현되지 않는, 대사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생각, 느낌, 판단 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게 서브텍스트인데 배우는 이것을 목소리의 억양, 눈빛, 표정, 몸짓, 감정 표현 등으로 드러낸다.

 

몰입감을 주는 영화에는 배우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그걸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는 서브텍스트로 숨겨놓은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 가득 찬 자신의 지하 동굴을 뒤져 인물에 적합할 것을 찾아내어 연기한다. 인물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서브텍스트가 사실은 배우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낸 것이다.

 

좋은 삶이란, 좋은 연기처럼, 자신의 내면에 숨겨 놓은 취약한 영혼을 드러내는 일이다. 좋은 배우는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어 관객과 공유한다. 작중 인물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건 배우가 자신의 취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연기란 어떤 인물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연기를 닮은 건 이 때문이다.

 


1)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복복서가, 2020),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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