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 사회는 오히려 부모들이 실패의 시간, 잘못된 선택이라 여겨지는 시간들을 자녀들보다 더 못 견딘다. 그래서 늘 앞서 나가 장애물을 치우고, 실패 없는 평평한 길을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런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은 ‘아, 내가 틀리면 안 되는구나, 내가 실패하면 안 되겠구나’하는 맘이 자연스레 들게 마련이다. (본문 중)

김성은1)

 

MZ세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 말이다. 이들은 정말 다르다고도 한다. 정말 다른가? 아마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이 시대뿐 아니라 매 시대마다, 심지어는 고대의 벽화 한구석에도 “요즘 아이들을 우리 때와 달라”라는 말들이 있었다니 말이다. 나도 젊은 날 어느 때쯤엔 그런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나이를 꾹꾹 눌러 밟고 지나온 기억이 있다. 그러니 어느 한 세대를 이름 지어 우리와 다르다고 보는 것은 어쩜 그다지 맞는 계산법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젊기에 견디고 겪고 버티는 그들만의 방법이 있을 뿐이라고 보고 싶다.

 

다만 한 가지, 아주 작은 일에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한 걸음이라도 무얼 시도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맘 한구석이 짠하다. ‘결정 장애’라는 귀여운 말로 포장하여 자신의 선택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어서다. 이를 탓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하고 공감해 보고 싶다.

 

‘엄마 말 좀 들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엄마가 하지 말랬지.’ ‘거 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라니까. 왜 그렇게 말 안 듣고 괜한 고생이니.’ ‘그럼 그렇지. 진작 내 말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너무 많이 듣던 말이다, “이 길이 정도니 이리로(만) 가라!”라는 말이다. 히틀러의 폭력성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했던 앨리스 밀러는, 아동에게 어른들의 욕구에 맞춰 반응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하면, 자아는 왜곡되고 거짓 자아를 형성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는 무관심해지고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내면의 중심과 깊이 있게 연결되지 못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결정에도 망설이고 뒷걸음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엄마 말 들으라고 했지!”라는 권유를 지속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은 아닐까? ‘사소한 결정 장애’를 가지고 뭘 ‘거짓 자아’라고까지…. 무얼 그리 심각하게…?’ 아니다. 바로 그래서 사소한 결정 장애라도 요즘 세대의 귀여운 애교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건강한 인간은 살면서 만나는 고통이나 슬픔, 행복이나 만족감 등의 다양한 감정을 통합하면서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간다. 그런데 거짓 자아로 살다 보면 경험을 딱 둘로 나누게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성공과 실패’ ‘있음과 없음’ ‘가졌음과 못 가졌음’ 등 경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상반된 감정을 통합된 하나의 경험으로 만들지 못한다. 또, 자기 자신과 깊이 있게 연결되지 못하니 남들의 인정이 너무나 중요해진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에 자신의 가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심한 고독감이나 공허함, 무기력과 우울에 이르게 된다.

 

 

무엇이든 잘하기 위해서는 도전해 보고, 행동해 보고, 그러다 실패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파하고 무너지고, 그러다 또다시 일어나고 … 이런 과정들을 반복하며 마음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넘어질 때 무너질 때 실패할 때도 안전 기지가 되어 함께 견뎌 주고 기다려 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이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얻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오히려 부모들이 실패의 시간, 잘못된 선택이라 여겨지는 시간들을 자녀들보다 더 못 견딘다. 그래서 늘 앞서 나가 장애물을 치우고, 실패 없는 평평한 길을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런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은 ‘아, 내가 틀리면 안 되는구나, 내가 실패하면 안 되겠구나’하는 맘이 자연스레 들게 마련이다.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우리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세요”란다. 부모가 함께 견뎌 주는 안전 기지가 아니라 혹독한 평가자가 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부모가 안전 기지가 되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녀들의 마음 근육 키우기를 방해하는 존재가 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떨까? ‘교회만 가면 초라한 맘이 들어요. 나는 여기서조차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맘이 들거든요.’ ‘교회 안에는 참 잘난 사람들이 많네요.’ ‘열심히 믿어서 저렇게 성공했다는데 나는 아무래도 믿음이 없어서 요 모양인가 봐요.’ ‘내 맘은 지옥인데 늘 더 헌신하고 감사해야 한대요. 힘들다고 하면 믿음이 없어서라고 하니 … 그냥 힘들어요.’ 어쩌면 늘어나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한 가지 이유도, 믿음은 버리고 싶지 않지만 교회조차도 애쓰고 꾸미고 챙겨 나가야 하니 피곤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열심히 믿으면 성공한다.’ ‘그러니 무조건 순종해라.’ ‘무조건 감사해라.’ ‘불평하지 마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 맞다! 성경적으로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삶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틀린 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거짓 믿음’을 챙기고 ‘분리된 자신’으로 살도록 부추기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담은 다치고 상처받은 내담자들이 상담자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충분히 ‘존귀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새롭게 경험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과거 상처받은 경험을 해체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덮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상처받고 좌절했던 믿음의 경험도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새로운 경험으로 덮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교회라는 믿음 공동체가 무조건 순종과 헌신, 감사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런 돌봄과 기다림, 존중의 맘을 담아 먼저 서로에게 안전 기지가 되어 주면 어떨까?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더더욱 세상의 상처를 새로운 영적 경험으로 덮을 수 있도록 기회를 충분히 주면서, 우선적으로 안전 기지가 되어 주면 어떨까? 그래서 있는 그대로 나를 보여도 스스로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존재라고 경험하는 차별화된 공간이 되어 주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넉넉히 기다려 주는 것이다. 함께 견뎌 주는 것이다. 부모가, 믿음의 선배들이 폭풍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성장해 왔다면 그들은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그저 믿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무릎을 세워 일어설 수 있다면, 두렵지만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믿음을 가지고도 떠도는 가나안 성도 유목민들이, 우리의 청년들이 다시 돌아와 안전 기지 안에서 회복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그런 교회의 한 부분이 되길 나 또한 마음새를 다잡아 본다.

 


1) 세명대학교 심리상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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