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해석은 바로 이런 실존론적 존재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안다고, 또는 알아 간다고 할 때, 혹은 세계와 삶을 알아 간다고 할 때, 어떤 공식을 외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수학적 명제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아는 게 아니다. 삶의 이해, 자기의 이해에는 복잡한 삶과 세계의 구조와 더불어, 어떤 기분과 정서가 동반되기까지 한다. (본문 중)

김동규1)

 

이해와 해석은 슐라이어마허 이후로 일부 영역의 해석학이 아니라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기 시작했음을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에 이르기까지 이해와 해석은 대체로 인식론적 의미에 가깝게 이해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이 경우 여전히 이해와 해석은 다소간 기술적인(technical) 의미로 국한되기 쉽다.

 

하이데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해와 해석의 의미에 또 한 번의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자신의 독특한 존재 이해 방식을 설명하면서 이해와 해석을 단지 인식론적 의미가 아닌 존재론적 의미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론적 의미란 실존론적 의미의 존재 이해를 뜻하는데, 조금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 보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전까지 우리는 존재 자체를 사유하기보다 존재자를 사유해 왔다. 이를테면 신, 존재 일반, 영혼과 같은 특수한 존재자들을 마치 존재에 대한 이해 전부인 양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존재를 단지 대상으로, 또는 ‘무엇’으로만 제한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해, 또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물어 왔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이때 존재는 더 이상 특정 존재자가 아니라,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 더 특정하게는 나의 실존에 대한 이해로 변경된다. 여기서 실존이란 또 무엇인가? 이는 다름 아닌, 나의 존재를 고정된 어떤 존재자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삶의 가능성으로 보는 말이다. 아주 단순하게 이를 이해해 보자. 내 앞에 커피가 놓여 있다. 나는 이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 커피를 버릴 수도 있고, 기분 나쁜 상대에게 던져버릴 수도 있다. 이런 삶의 방식, 행동 방식의 가능성으로 나는 던져져 있다. 조금 범속한 예이긴 하겠으나,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가능’, 또는 ‘나는 할 수 있다’(Ich kann; I can)로서의 실존의 의미와 가깝다. 이 사소한 삶의 방식 이외에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할 선택의 순간이나 유한한 한계 안에서 자신의 할 수 있음, 곧 가능성을 돌아본다. 하이데거에게는, 불안, 죽음 등이 그러한 본래적인 삶의 현상이고, 이 현상 앞에서 나는 나의 존재 방식, 나의 삶의 가능성을 돌아본다.

 

이해와 해석은 바로 이런 실존론적 존재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안다고, 또는 알아 간다고 할 때, 혹은 세계와 삶을 알아 간다고 할 때, 어떤 공식을 외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수학적 명제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아는 게 아니다. 삶의 이해, 자기의 이해에는 복잡한 삶과 세계의 구조와 더불어, 어떤 기분과 정서가 동반되기까지 한다. 자기 삶을 바꿀만한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 보자. 이것은 종교적 체험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에서 비롯된 일일 수 있다. 그런 체험 안에서 나는 어떤 심경의 변화나 자기 존재의 위기, 또는 행복감이나 만족감을 경험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런 정서를 기반으로 삼아 나는 나의 삶과 실존의 변경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이런 식의 이해는 어떤 명료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답이 있는 잘 짜여진 문제들은 어떤 명료성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서의 변화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들은 그런 식의 명료함보다는 일종의 불투명성과 더불어 일어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존재론적인 이해의 선-구조를 갖는다.

 

이를테면, 내가 전에 가본 적이 없는 어떤 카페에 들어섰다고 해보자. 나는 그 카페를 어떤 투명성 아래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이 체험하는가? 나는 본 적이 없어도, 이미 어떤 기분과 정서와 더불어 그 카페 문턱에 들어선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이전에 가본 다른 카페와 그 카페를 비교하기도 하고, 그 카페를 둘러싼 어떤 분위기를 애써 체험하면서 나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 한다. 이를 더 개념적으로 표현하자면, 가다머의 말을 빌려 해석학적 선입견이나 선이해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선입견은 옳지 않은 이해의 틀, 또는 편견과 유사한 말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것은 명료한 어떤 인식을 위해 극복해야 할 계기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나 가다머에게 선입견은 자연스러운 이해의 방식이요, 우리 존재의 이해를 위한 조건이다. 선입견은 달라질 수 있지만,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는 선입견 안에서 이해하고 해석한다.

 

정리해 보자. 해석학적인 의미에서 이해와 해석은 단지 텍스트나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 내 앞에 놓인 대상, 나 자신을 객관적인 태도로 분석하고 인식하는 작업과는 그 결을 달리한다. 이해와 해석은 자기 실존에 대한 앎을 뜻하며, 우리의 선입견 아래, 선입견과 더불어 일어나는 인간 실존의 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해석한다고 할 때, 영화를 볼 때나 어떤 문학 작품을 볼 때, 단지 그 작품의 구조나 내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나의 삶에 적용하거나 자기 삶의 지평에서 다채롭게 수용한다. 책의 1장을 볼 때 그 내용에 대한 이해와 책 전체를 읽고 이해한 바가 또 다르며, 그 책에 비추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른다. 또한 이 이해는 책을 새로이 볼 때마다 달라지며, 시간상에서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해석을 동반하는 사태로 나아간다.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나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현상들이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거듭 다른 이해의 의미를 가져온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현상들이, 텍스트가, 세계 내에 있는 여러 사태들과 문화적 기호와 현상들이 나와 관련할 때,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다양하고 상이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의 실존적 삶과 언급한 것들이 마주칠 때, 거기서 나는 단번의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이해로 사태를 포착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고, 이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해석의 과제를 부여한다. 이처럼 이해와 해석은 연결된 것이며, 그것들은 자꾸만 세계와 분리된 객관적 태도의 나가 아니라 세계에 실존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나를 호출한다.

 

 

혹자는 과학의 시대에, 객관적인 접근이 중요한 영역에서도 이러한 이해가 과연 존재론적인 제일 철학의 지위에 머무를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가다머에 의하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접근한다고 간주하는 삶의 영역에서조차도 이해와 해석은 동반된다. 이를테면, 법적 상황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법조인들을 통해 법전을 기반으로 삼아 객관적 이해를 따라 판결이 내려진다고 보지만, 실제로 그렇게 건조하게 판결이 내려지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이해와 해석의 계기인 적용은 시대마다, 피고나 원고의 사정에 따라, 판사의 성향을 따라 법의 이해가 달라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이는 마치 법의 적용이, 설사 쟁점이 되는 사건과 관련한 법전의 내용이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달라지는 이유이다. (양심에 의한 병역 거부를 위법으로 간주하는 법원의 선고와 태도를 합헌으로 규정했다가, 수년 전 다시 위헌으로 판결한 사례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달라진 선이해와 시대의 반영일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이해와 해석의 구조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다머는 이해와 해석이 특수한 삶의 영역이나 기술적인 방법으로만 다뤄지는 게 아니라, 삶 전체의 근간을 이룬다고 본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법과 판례에 따라 법전 텍스트의 내용에 접근할 때조차도, 그 내용을 실제 삶의 자리에 옮겨 와서 적용하는 순간 상이한 이해의 방식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법정은 이해와 해석의 각축장, 해석의 충돌이 일어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법학적 해석학에서 해석의 과제는 곧 구체적 사례마다 법을 구체화하는 것, 다시 말해 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 따라서 기존 법질서를 그 자체로 파악하는 것은 원리상 언제나 가능한 일이며, 그것은 곧 모든 구체적 판례가 다시 법리에 비추어서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학적 해석학과 법리학 사이에는 해석학을 그 바탕으로 삼는 본질적 상관성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판결에 자동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완벽한 법리학의 이념은 성립될 수 없다. (Gadamer 1990, 334-35[224-26])

 

이처럼 법과 같이 판례나 법조문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자리에서도, 이해와 해석이 우리의 실제 삶과 연동되는 것들이라면, 이는 어떤 대상이 객관적이건 과학적이건 간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우리 삶과 존재에 대한 이해에 접속할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준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가히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부를만한 시기를 우리는 통과하고 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인간을 압도하는 사건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고도 한다. 알파고나 이와 유사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 인간 최고수를 압도했다. 인간이 이해하는 바둑보다 인공지능이 더 높은 차원에서 바둑을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실존이 바둑의 의미와 접속하는 순간 바둑은 단지 정수와 악수, 확률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삶의 태도와 관련된 것이 된다. 바둑은 승부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 삶의 축소판이고, 삶을 향유하는 놀이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더 나은 바둑의 수를 배울 수는 있지만, 실제 바둑을 두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고,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가치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해서도 해석학적 의미의 이해와 해석이 지닌 가치를 더 깊이 평가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은 ‘책의 사람들’이라고 불릴 만큼 텍스트, 곧 경전을 존중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책에 대한 접근은 해석학적 의미의 이해와 해석, 삶과 실존의 의미에 대한 접근보다 객관적인 의미,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객관적으로 선입견 없이 인식하는 태도로 귀결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의 실존 구조,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세계의 지평 속에 텍스트의 의미는 우리의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상이하게 이해될 수 있고, 상이하게 해석되어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교리나 신조라는 이름 아래 상이한 이해와 해석을 가로막는 권위적 태도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성서는 여성에게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부여하는, 소위 여성 안수 행위를 긍정하는가? 여기서 나는 어떤 교리적 논쟁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해석의 작용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효과에 대해 말한다. 무수히 많은 교파들이 성서 텍스트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한다고 보기도 하고, 그렇게 보지 않기도 한다. 또한 각자의 시대적 제한과 삶의 자리를 따라 텍스트 해석을 변경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은 우리의 복잡다단한 변화하는 삶과 텍스트가 마주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이해와 해석의 효과를 보여주며, 대다수의 교리적 진리나 법도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실은 어떤 객관적 인식의 결과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해석학적 이해와 해석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유연한 상대주의로 이끈다. 이 상대주의는 상대주의 자체를 신봉하라는 게 아니라, 이해와 해석의 결과로 얻어지는 많은 진리의 이해를 긍정하라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러한 상대주의라는 말 자체를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해석학적 의미의 상대주의는 우리에게 이해와 해석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의미의 풍요로움을 안겨주며, 우리 인간 실존의 근본적 특성 하나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유한성이다. 다양한 이해와 해석의 의미가 가능한 것은 인간이 실존론적으로 유한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 한계, 시대적 한계, 죽음 앞에서의 한계, 인식 능력의 한계 등에 의해 유한한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앞서 언급한 존재론적 선-구조나 선이해 역시 인간 이해의 능력이 가진 한계를 입증하는 개념들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독자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주장하기보다 슐라이어마허, 하이데거, 가다머 등 철학적 해석학의 계열에 속한 모든 철학자들이 예외 없이 긍정한 인간 유한성의 한계 안에서 우리의 진리 이해, 해석학적 진리가 일어남을 긍정하는 것이 우리가 이해와 해석의 탐구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또한, 앞에서 살폈듯이, 이런 인간 유한성과 더불어 이해와 해석은 어떤 직관이나 예감과 같은 직접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일어나는 사태가 아니라, 삶의 지속 가운데 끊임없이 일어나는 작용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앞서 보았듯이, 인간의 선이해는 반복되지만 색다른 이해와 해석을 따라 늘 달라질 수 있고, 늘 변경될 수 있다. 선이해가 없는 이해는 없지만, 선이해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변화와 삶의 의미의 침전 속에 인간의 이해, 서로의 이해도 달라지고 깊어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또한 성서에 대한 접근에서도,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비단 기술이 아니다. 원어에 대한 이해, 귀납적 연구 같은 성서 접근법, 주석에 대한 참조 등이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근본은 아니다. 또한 혹자들에게는 교리의 철저한 기획 아래 성서를 읽어내는 게 일종의 이해의 첩경으로 간주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과 성서에 대한 믿음에서도 우리의 이해와 해석의 상대성, 선이해라는 인간의 유한성과 존재론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그보다는, 한 사람의 신자는 유한하므로 이해와 해석을 삶의 계기로 삼아야 할 존재라는 점, 그러므로 나의 진리 이해가 잘못될 수 있고, 나의 이해가 변경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텍스트에 접근하는 것. 이것이 이해와 해석의 개념적 배경에 자리한 철학적 해석학의 가르침이다. 실제로 가다머는 성서 해석과 관련해서 이런 권고를 한 바 있다.

 

신앙의 고지는 그것이 수행되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신앙의 순수한 가르침을 교리로 고정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부차적 문제일 뿐이다. 성서는 신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세운 교리에 비하면 성서 자체가 절대적 우위에 있다. … 불트만도 강조하는 대로, 모든 이해 과정에는 해석자 그 자신의 삶이 텍스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또 텍스트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와 잠정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 (Gadamer 1990, 336[226-27])

 

이처럼 성서에 대한 이해의 기술이나 교리와의 상관성을 고려하기 전에 더 근본적인 것은 나의 구체적 삶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존재론적 이해의 조건이다. 이 조건 아래서 우리는 해석의 절대성을 강조하기보다 우리의 이해의 유한성과 다원성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해석학적 이해와 해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 나는 이 점을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잘 강조한 철학자로 메롤드 웨스트폴을 꼽는다. 우리 시대의 해석학적 철학자 중 한 사람, 메롤드 웨스트폴의 말을 되새기며, 이해와 해석에 대한 이해를 마무리하자.

 

이 [해석학적] 상대주의는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최상의 근거로 뒷받침되는 해석, 우리가 발견하거나 만들 수 있는 최상의 해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추구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보고 있음을, “부분적으로”(고전 13:12) 알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를 잊지 않기를 의도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대적이라는 점을, 언어와 문화에 의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음을,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이시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서 안에서, 성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점이 피조물이라는 우리의 지위를 말소하고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해석에 신적인 종결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서와 다른 이들이 성서에 부여한 해석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고 우리의 이해가 넓어질지 말입니다. (웨스트폴 2019, 14-15)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문헌

Gadamer, Hans-Georg. Wahrheit und Methode: Grundzü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 Gesammelte Werke 1. Tübingen: Mohr Siebeck, 6. Auflage. 1990. 국역본: 『진리와 방법 2: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임홍배 옮김. 서울: 문학동네, 2012.

메롤드 웨스트폴 (2019). 「한국어판 저자 서문」, 『교회를 위한 철학적 해석학: 누구의 공동체? 어떤 해석?』. 김동규 옮김. 고양: 도서출판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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