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 22일, 동짓날 즈음이면 어김없이 서울역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홈리스·무연고 사망자’를 추모하고 공론화하기 위해 모인 활동가들과 홈리스 당사자들이다. 어엿한 영정 한 장 남기지 못하고 황망히 떠난 이웃과 동료들은 거멓게 처리된 간이 영정으로 걸개에 빼곡히 걸려있다. 사진은 남지 않았지만 고인이 어디서 사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떤 사정과 마음을 가지고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는 정보와 글귀들이 적혀 있다. (본문 중)

이종건(옥바라지선교센터)

 

매년 12월 22일, 동짓날 즈음이면 어김없이 서울역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홈리스·무연고 사망자’를 추모하고 공론화하기 위해 모인 활동가들과 홈리스 당사자들이다. 어엿한 영정 한 장 남기지 못하고 황망히 떠난 이웃과 동료들은 거멓게 처리된 간이 영정으로 걸개에 빼곡히 걸려있다. 사진은 남지 않았지만 고인이 어디서 사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떤 사정과 마음을 가지고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는 정보와 글귀들이 적혀 있다.

 

‘무연고’라 하지만 어디 정말 연고 없는 이가 있을까. 무연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장례를 치를 가족과의 연결고리가 없을 뿐이지 그이의 삶을 기억하고 함께 풍파를 견뎌 온 동료들이 있다. 70% 달하는 대다수의 무연고 사망자는 이미 관계가 끊긴 가족들이 시신 인수를 기피하며 장례를 포기함으로써 ‘무연고 사망자’가 된다. 그이들을 기억하는 동료들은 장례를 치르고 싶어도 치를 수 없는 형편이 대부분이다.

 

2021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며 무연고 사망자의 공영 장례의 행정 책임이 국가로 확대되었으나, 부고에 관한 규정이 없어 고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장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울시의 경우 무연고 사망 후 화장까지의 소요 시간은 평균적으로 한 달이라고 하는데, 부고 게시의 의무가 없으니 정작 고인을 추모해야 할 당사자들은 장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영 장례조차 보장되지 못하던 때에 비하면 공적 책임이 더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여전히 죽음에 ‘위계’를 두는 사회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죽음에 이름을 붙이고,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을 매년 부르며 잊지 않으려 한다. 지난해 12월 22일 진행된 홈리스 추모제의 주제는 “코로나 종식을 넘어, 홈리스 차별과 배제가 종식된 세계로!”였다. 지난 몇 년간은 코로나 확산세가 심해질수록 거리 홈리스에 대한 차별과 배제, 의심의 눈초리가 더해졌다. 우리 사회는 너무 쉽게 2미터 거리 유지를 이야기하며 그것이 윤리의 잣대인 것처럼 들이밀었지만, 방과 방 사이의 거리, 아니 방과 방 밖의 거리가 2미터가 될 수 없던 쪽방 사람들의 사정, 화장실을 공동으로 써야 하는 열악한 사정들을 생각하면 그 시기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정들을 생략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홈리스가 코로나19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어떤 근거도 없음에도 역사와 거리 곳곳에서 지독하게 홈리스를 괴롭혀 온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죽음에 위계가 있기 전에 삶에 위계가 있다. 위기 상황이 고조될수록 근거 없는 낭설과 그에 기반을 둔 혐오는 짙어진다. 문제의 본질은 가려지고 현상만이 남아 회자되며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존재를 삭제하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거리로 나오게 되기까지, 쪽방이라는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구조적 폭력이 작동했을까? 안전하고 따뜻한 거주 환경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이 권리로서 보장되는 사회라면, 그 누가 거리에서 영위하는 삶을 선택할 것이며, 그 누가 연고 없는 죽음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려 할까?

 

 

그렇게 무연고 사망자가 늘어나는 사이,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하고,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할 집은 투기의 산물이 되더니, 이제는 경제 위기에 공실이 늘어난다고 한다. 가난한 이들이 몸 뉠 공간이었던 저렴한 월세의 동네는 쓰레기 더미 치우듯 철거하고 허울 좋은 재개발만 하더니 왜 집이 없느냐고 묻는다.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민주 사회에서, 왜 죽음과 거주는 위계가 되고 으스대는 자랑거리 정도로 전락했을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 여건이 ‘권리’로 보장되지 못한 곳에서 ‘무연고 사망자’의 사례는 늘어만 간다.

 

2022년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은 “전국 무연고 사망자는 3,600여 명으로 3년 전보다 1.4배 증가했고, 10년 전인 2012년보다 3.5배 이상 증가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 정책은 무연고 사망자 시신 처리, 공영 장례 지원 정도에만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주된 원인으로 꼽히는 것에는 가족 구조 변화와 1인 가구 증가가 있다. 변화된 사회 구조 속에 가족의 의미가 달라졌다. 관계가 단절된 가족의 죽음을 재정적 어려움 등의 이유로 책임질 수 없어 무연고 사망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정말 연고 없는 죽음이 어디에 있을까. 그이의 죽음을 기억하고 책임지려 하는 ‘연고자’들이 장례를 주관하며, 그 비용을 공공이 부담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법적인 제도 마련이 시급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야 한다. 거리에서 삶을 보내거나 취약한 주거 환경에서 위험에 노출되어야 하는 이들 앞에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된 현재의 ‘주택’과 주택 정책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되묻고 이 사회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는 집이 없어 거리에서 죽어야 하고, 누군가의 재산 증식을 위한 주택과 건물은 텅 비어있는 이 도시의 시스템이 정당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말이다.

 

2019년 12월 22일, 홈리스 추모제에 가수 정태춘 선생이 오셨다. 한 곡만 하기로 하여 추모제를 찾은 그이는 한 곡을 끝내고서는 한 곡 더 해야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를 가장 진정성 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내고 있는 민중 운동 진영의 모든 젊은 활동가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릅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이 죽음을 기억하고, 공론화하며 우리 사회를 가장 저변에서부터 바꾸려 하는 활동가들과 단체들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등 살을 부대껴가며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며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단체들과 종교인들이 있다. 매년 동짓날이 되면 그이들과 더불어 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동짓날을 넘어 우리 일상과 교회의 일상 속 구조적 빈곤의 문제에 대해 도전하는 실천적 신앙 고백들이 이어지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홈리스추모제 기획단은 2023년 추모제의 슬로건을 정했다. “말해지지 않는 이들의 죽음, 홈리스의 목소리를 들어라!” 12월 22일 동짓날이면 서울역 광장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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