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화가 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 분노는 나와 관련 없는 단어 같아도 화가 몇 분이 지나도 식지 않는다면 그게 분노의 전조 증상이다. 누구랑 말다툼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분노가 있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는 ‘분노’란 휴화산이 있고 이게 가끔 터지는데 문제는 그때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중)

이정일(작가, 목사)

 

다들 사는 게 피곤하다고 말한다. 피곤하다는 말속엔 힘들다는 느낌도 있지만, 화가 난다는 느낌도 있다. 동네 과일가게에 들리니 주인아저씨가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한다. 전날 무화과를 팔았는데 다음 날 상했다고 항의해서 환불해 주었는데 억울한 것이다. 손님이 무화과를 따뜻한 아랫목에 보관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과일가게 주인이 억울해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일 것이다. 그런 감정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돈다. 1980년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마야 리 랑그바드는 자신이 수출품이었다는 게 화가 난다고 말한다. 입양은 그에게 분노이고 슬픔이다. 그걸 시를 쓰면서 이겨 내려 하지만 화병이 나기도 했다고 말한다.

 

과일가게 주인이나 덴마크 시인이 화가 나는 건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속마음을 얘기했는데 그게 약점이 되어 돌아올 때, 갑작스럽게 목돈이 필요한데 대출이 쉽지 않을 때, 꿈을 포기하고 그저 하루를 버텨 내며 살아갈 때, 괜찮다 싶다가도 화가 나고 울컥한다.

 

우리가 화가 나는 건 원하지 않는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극에 대응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될 때 우리는 무능력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외부 요소에 분노를 터트리지만 그게 엉뚱하게도 가족이나 약자에게 향하기도 한다. 어른으로 사는 건 쉽지 않다. 어른이 된다는 건 돈 걱정을 많이 한다는 뜻이기에.

 

다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눈물 흘려도 된다고 위로하지만, 너무 지쳤을 땐 그마저도 쉽지 않다.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개 보면 화를 내기보다는 참는다. 화를 낸 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를 억누르거나 부정해 버린다. 이게 반복되면 엉뚱하게 터져 나온다.

 

 

통계를 보니 묻지 마 범죄가 최근 5년간 270건 일어났고, 그 76퍼센트가 강력 사건이다. 이유도 모른 채 당하는 묻지 마 폭행도 매일 3건씩 일어나고 있다. 작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피고인은 플라스틱 파이프를 들고 주차된 승용차 창문을 깨부쉈고 그곳을 지나던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때린 뒤 걷어차고 짓밟았다.

 

우리는 화가 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 분노는 나와 관련 없는 단어 같아도 화가 몇 분이 지나도 식지 않는다면 그게 분노의 전조 증상이다. 누구랑 말다툼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분노가 있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는 ‘분노’란 휴화산이 있고 이게 가끔 터지는데 문제는 그때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디퓨징』이란 책에 보니 저자들은 화라는 감정이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 진화된 인간 나름의 생존 전략이라고 쓰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잘못되어갈 때 부아가 나고, 이게 짜증으로 바뀐다. 이 짜증이 동료나 상사에게로 향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배우자나 자녀 혹은 부모에게 향한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묻지 마 범죄, 데이트 폭행, 층간 소음 살인, 무고나 악플, 학부모와 교사 간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분노 중독 사회가 되어버렸다. 사건마다 상황은 다를 테지만, 분노의 이면에는 본인의 스트레스와 화를 풀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과 불안, 열등감, 피해의식, 낮은 자존감, 좌절감, 상대적 박탈감 등이 있다.

 

범죄로 이어지지 않아도 분노가 위험한 이유가 있다. 분노는 순간의 광기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른 화를 참지 못해 사람을 공격하고 때론 자신도 파괴한다.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은 외부의 일들 때문이 아니다. 눈빛이 바뀌고 관자놀이가 팽창하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약간의 자극에도 거칠게 반응할 때 이 말을 기억하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데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이 아니라 그날의 나의 기분, 나의 취향, 나의 상황, 바로 ‘나’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 없이 누군가 미워졌다면 자신을 의심하라.

 

김은주 작가의 『달팽이 안에 달』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화가 날 때 이 문장이 주는 느낌을 떠올리기만 해도 분노가 식는 걸 느낀다. 최은영 작가도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말했듯이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화가 치민 건 이해해야 하는 쪽이 언제나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화가 날 때, 이 말이 힘이 되었다.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일상이 주는 삶에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면, 『분노의 포도』 같은 소설을 읽어보길 권한다. 『분노의 포도』에서 작가는 태양은 선혈처럼 붉고 옥수수밭과 지붕 위에도 흙먼지가 쌓인 모습을 묘사한다. 동이 텄지만 낮은 오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밤도 칠흑 같았다. 별빛이 허공을 메운 흙먼지를 뚫지 못한 탓이었다.

 

남자들은 망가져 버린 옥수수밭을 바라본다. 한참 후 남자들의 얼굴에서 망연한 표정이 사라지고 분노와 저항이 나타났다. 여자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는다. 이제 남자들이 주저앉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구나 화는 쉽게 낼 수 있지만 올바른 대상에게 분노하면 삶은 감춰둔 삶의 비밀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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