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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저자의 출애굽기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해방신학에서 중요한 본문으로 삼고 있는 출애굽기는 주로 바로와 여호와, 이집트와 이스라엘로 대비되는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와 달리, 공동선과 진정한 번영의 관점으로 출애굽기를 해석한다. (본문 중)
최경환(인문학 & 신학 연구소 에라스무스)
송용원 | 『성경과 공동선: 모든 사람을 향해 열린 문』
성서유니온선교회 | 2023년 10월 25일 | 284쪽 | 15,000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가지 신학이 있다. ‘동물’신학, ‘퀴어’신학, ‘장애인’신학, ‘도시’신학 등,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고 있다. 아무리 최신 트렌드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학이라면, 성서와 기독교 신학을 존중하고 어느 정도 참조해야 한다. 단지 한두 개의 성서 구절만을 근거로 인용한다거나 특정 시대, 특정 신학자의 개념만을 참고하는 신학이라면, 그 신학은 금세 사라질 시대의 유행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 그리고 여성신학은 그런 점에서 성서와 기독교 신학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나름대로 구축한 신학이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지금도 꾸준하게 성서학자와 조직신학자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공신학은 어떨까? 최근 몇 년 동안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공공신학은 현대 사회와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과 신앙의 실천을 주로 다루는 공공신학은 이제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중요한 자료이자 방법론이 되었다.
그럼, 공공신학은 어떤 성서적,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공공신학은 그동안 그 토대를 탄탄하게 만들지 못했다. 예를 들어 보자. 여성신학자들은 여성의 눈으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읽은 저술들, 여성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신론, 기독론, 인간론 등의 연구를 상당히 축적해 왔다.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도 마찬가지다. 의외로 이런 이데올로기 신학의 성서적 기초는 ‘나름’ 탄탄한 편이다. 하지만 공공신학은 그렇지 않다. 공공신학이라는 렌즈로 성서를 해석한 연구도 찾아보기 어렵고, 공공성이나 공동선의 관점으로 신학의 각 분야를 연구한 논문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신학계도 마찬가지다. 공공신학의 역사가 짧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공공신학의 이론적 작업이 쉽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다행히 송용원 교수가 지난 몇 년간 공동선의 관점으로 신학과 성서를 연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면서 가뭄의 단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송용원 교수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한 『칼뱅과 공동선』(IVP, 2017)에서 개혁신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칼뱅의 신학을 공동선의 관점으로 재서술했다. 하나님의 형상, 성화, 율법, 교회 등 신학의 중요한 주제를 공동선과 연결해서 서술했는데, 이는 공공신학과 조직신학의 가교를 놓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송용원 교수는 『하나님의 공동선』(성서유니온, 2020)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공동선의 개념과 신학적 의미를 일상의 언어로 쉽게 소개했다. 이 책에서는 주로 삼위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하나님 나라를 공동선과 연결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번에 나온 『성경과 공동선』은 마치 공동선 프로젝트 3부작의 마지막 편이기라도 한 듯, 성서 행간에 담긴 공동선 주제를 포착하며 공동선의 관점으로 성서를 읽어낸다. 「매일성경」에 연재했던 글을 토대로 구약 본문 12개, 신약 본문 4개를 선별했고, 시대와 사람들의 삶을 드러내는 다양한 이야기를 성서와 연결한다.
이 책은 그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이라면 익숙하게 알고 있던 말씀이라도, 공동선의 렌즈로 읽으면 얼마나 풍성하고 새롭게 성서의 세계가 열리는지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를 공동선의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창조의 본래 모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따라 ‘홀로 좋음’이 아닌 ‘더불어 좋음’이었다. 창조 질서에 깃든 공동선은 각각의 개체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가운데 빛을 발한다(10쪽).
반면, 더불어 좋음이 깨지더라도 나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바로 타락의 핵심이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11쪽).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인류가 바벨탑을 건설함으로 다국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공동선의 분열을 상징하며, 이후에 인류는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44쪽).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공동의 비전을 만든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접했던 아브라함의 소명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된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창 12:3)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단지 개인의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부족 신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을 향해 개방된 하나님, 모두를 위한 하나님임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특별한 소명을 주시지만, 이 역시 일반 은총을 위한 특별 은총의 일부였을 뿐이다. 아브라함의 부름은 타인의 복지를 위한 부름이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었다(55쪽). 결국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인류의 영적 복지와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저자의 출애굽기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해방신학에서 중요한 본문으로 삼고 있는 출애굽기는 주로 바로와 여호와, 이집트와 이스라엘로 대비되는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와 달리, 공동선과 진정한 번영의 관점으로 출애굽기를 해석한다. 거대한 시스템, 경쟁과 성장으로 대표되는 이집트와 다르게, 하나님은 “독재자의 두려움을 이기고 혐오를 배제하며, 타인을 포용하는 연민”을 중시하는 공동체를 세우고자 한다(115쪽). 또한, 이집트의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의미 없이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 소외를 비판하면서, 볼프의 “일의 신학”으로 저항과 연대의 노동을 끌어낸 부분도 인상적이다(138쪽). 결국 정치적 투쟁으로 현 상황을 전복하려는 급진적 태도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약자들과 연대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할 것을 요청한다. 민감한 독자라면 이런 부분에서 해방신학과 공공신학의 해석학이 어떻게 다른지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저자가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균형을 잡아준 내용이다(12장).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자비롭고 니느웨 백성들에게는 정의롭기를 바랐던 전형적인 “자기 섬김 유형”의 인간이었다(179쪽). 그런 점에서 요나서는 우리가 말하는 공동선이 과연 어디까지 그 경계를 확장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책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너무나 잘 알았던 요나는 그래서 더 하나님이 미웠다. 자신의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 하나님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결과뿐 아니라 그 원인과 구조, 그리고 더 깊은 사회 시스템과 역사적 배경을 함께 고려하시기에 단순히 징벌의 차원이 아닌 회복적 정의를 위한 자비를 선언하셨던 것이다. 죄의 깊은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죄의 본성 자체를 고치길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요나보다 더 큰 이”(마 12:41)였고, 예수의 십자가와 무덤은 공적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근원적인 밑바닥이었다.
공공신학과 성서를 연결하는 길은 애매하고도 모호한 사잇길을 걷는 것과 같다. 인간, 시간, 공간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군상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비아 메디아”(via media)라 할 수 있다(13장). 한편에서는 세상을 뒤집어 버릴 강렬하고도 자극적인 매운맛을 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순한 맛의 힐링 담론을 원한다. 하지만 공공신학은 이 두 가지 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간다. 때로는 하나님의 언약이 언제 성취될지 모른 채 한없이 기다리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과 전 인류를 품어내기 위해 인격이 발효되기를 견디기도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내어 줌을 본받아, 공동체를 위한 섬김과 헌신이 필요한 동시에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운동성도 필요하다. 공동선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적 친밀함과 이웃을 향한 경계 없는 사랑이 절묘하게 만나는 해석학적 중심축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일과 소명, 사물과 생명, 지나간 역사와 도래할 미래를 온전히 품어낼 공동선의 베이스캠프가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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