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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전도사 한 분이 대법원을 통하여 교회와 담임 목사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처벌과 배상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확정판결이기에 앞으로 판례로 인용될 수 있다. … 가장 아름다워야 할 교회와 교역자의 세계가 갑질로 점철된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살피고 대안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문 중)

 

신동식1)

 

최근에 전도사 한 분이 대법원을 통하여 교회와 담임 목사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처벌과 배상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확정판결이기에 앞으로 판례로 인용될 수 있다. 이러한 소송 사건을 보면서 한국 교회가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든다. 성경의 지침은 물론이고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터진 것이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교회와 교역자의 세계가 갑질로 점철된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살피고 대안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곡된 비빔밥 리더십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간의 반복되는 충돌에는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리더십의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 무의식중에 심어진 리더십에 대한 인식이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 점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유교적 리더십이다. 한국 교회 성장기를 함께했던 목사들은 현재 50대 이상이다. 이들은 척박한 현실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되었다. 이들이 살던 시대는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보다 유교적 그리스도인이 더 많던 시대였다. 그래서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장유유서’는 당연한 가치관이다. 몸은 기독교인이지만 생각은 유교적으로 하면서 살았다. 이러한 세계관이 목회 현장에도 자연스럽게 발현되었다. 그래서 동역자 의식이 아니라, 유교적 계급의식이 리더십의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둘째, 군대식 리더십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군 생활을 하였다. 군대식 리더십의 특징은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것’이다. 철저히 상명하복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군대식 정신을 가지고 목사가 되었다. 이 사실만 미루어 보아도 현재 기성세대 목사들의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의 신학교 시절에 후배들을 모아놓고 몽둥이를 들었던 선배가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군대식 리더십의 문제는 윗사람의 결정에 대해 무조건 복종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면 여지없이 내친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일방적이고 무례한 부교역자 해임의 현장에는 이러한 세계관이 깔려 있다.

 

셋째, 닭대가리 리더십이다. 거친 표현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닭대가리 리더십이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소의 꼬리가 되느니 닭대가리가 되라’는 속담이 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일등을 하거나 주인이 되거나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성장의 이면에도 닭대가리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여기에는 닭대가리를 좋아하는 신자들의 성향도 한몫하였다. 영적인 겸손함보다. 학력, 실력을 우선시한다. 큰 교회 목사 앞에서는 졸고, 작은 교회 목사는 불쌍하게 여긴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게 되면 묵묵히 자신의 은사에 따라 섬기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러한 능력주의와 고지론은 닭대가리 리더십을 고취한다. 그러니 일찍 담임목사가 되었거나, 큰 교회의 청빙을 받았거나, 개척하여 교회를 좀 키웠거나 하면, 닭대가리 됨을 마음껏 표출한다. 이러한 인식이 부교역자를 대할 때 은연중에 나타난다. 닭대가리 세계관은 건강한 동역자 관계 맺는 것을 방해한다.

 

넷째, 카리스마 리더십이다. 이것은 특별히 한국 교회를 가장 멍들게 한 리더십이다. 뛰어난 은사를 가진 목사가 되면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목사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대단하다.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시대였다. 마치 천재는 개차반으로 살아도 용서된다는 의식이 카리스마를 가진 목사에게도 적용되었다. 도덕적 범죄도, 세습도, 모두 ‘큰 목사’에게는 허용된다. 더구나 한국 교회는 은사를 가진 목사에게 대들면 저주받는다고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이렇게 유교와 군대식 정신과 닭대가리 의식과 카리스마를 적당히 비벼놓은 것이 왜곡된 비빔밥 리더십이다. 이런 리더십 개념으로 무장한 목사들이 어떻게 목회를 하였겠는가? 사실 그 시대에는 목사뿐 아니라 학교의 선생, 기업의 CEO도 다 비슷하게 행동했다. 성장 이면에 있는 어두움이다.

 

담임 교역자와 부교역자의 동역자 관계는 과연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답을 찾아야 한다. 불가능하다면 교회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 교회를 세우기 원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세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세대 간의 충돌을 감당해야 한다. 동역자 관계를 위해서 반드시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여기에는 현상 수준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관의 충돌이 있다. 위와 같은 ‘비빔밥 리더십’이 몸에 밴 세대와 서번트 리더십을 강조하는 세대의 충돌, 순종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세대와 자기주장을 미덕으로 아는 세대의 충돌,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와 경제 민주화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의 충돌, 소명을 위하여 열정 페이가 가능한 세대와 소명도 법을 존중하며 감당해야 한다는 세대의 충돌, 정보가 한정되어 있던 세대와 모든 정보가 열려 있는 세대의 충돌, 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세대와 법을 마음껏 사용하는 세대의 충돌이다.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인식하고 적응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건강한 동역으로 가는 길은 험난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둘째 동역자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필자가 오랜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담임 교역자와 인격적 교제를 갖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부교역자는 목회를 함께 의논하는 관계가 아니라, 철저하게 담임 교역자를 보조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함께 성경을 읽고 토론하고 나누는 상황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담임 교역자들은 감시자의 위치에서 부교역자를 감독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부교역자들 역시 현재의 사역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한다. 그래서 의견을 말해서 부딪치기보다는 순종해서 관계를 좋게 유지하고자 한다. 인격적 관계가 아니기에 좋은 관계는 대부분 사례비 액수에 달려 있다. 그리고 개척이나 청빙할 때 주어질 조건에 집중한다.

 

 

또 많은 교회가 2, 3년 정도 지나면 부교역자를 바꾸려고 한다. 2, 3년 안에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역자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요원한 일임이 분명하다. 동역자 의식은 인격적 관계를 기반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역자 의식 회복은 한국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 길이다. 상업적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 관계를 만들어야 모두 살 수 있다.

 

셋째, 부교역자는 한국 교회의 미래라는 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김상복 목사는 참다운 리더는 사역자를 발굴하고, 훈련하며, 자원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효율적인 조직에 힘쓰고, 권한을 위임할 줄 아는 자라고 하였다.2) 이 말을 두고두고 곱씹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부교역자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역사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담임 교역자와 교회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키우고 있음을 자각하여야 한다.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일에 열심을 내는 한국 교회가 미래를 짊어질 교역자를 키우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부교역자들은 현재의 사역지가 잠시 스쳐 가는 곳이 아니라, 미래 한국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훈련의 장임을 인식하고, 소명에 합당하게 사역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가 된다면 건강한 동역은 분명하게 회복될 수 있다.

 

건강한 동역을 위한 기본적 제안

 

그렇다면 건강한 동역을 위하여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첫째, 부교역자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사역의 내용과 조건에 관해 정직한 논의를 해야 한다. ‘비빔밥 리더십’ 시대에 부교역자는 하루살이와 같았다. 해고를 당하면 바로 교회를 떠나야 했다. 교회가 사회보다도 더 악한 일을 수없이 저질렀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투명하고 정직해지고 있다. 지금은 사회의 기본적인 인식의 틀이 교회보다 더 앞서고 있다. 그러므로 시작부터 정직하게 사역 논의를 하고 서로가 동의하고 인정한 자리에서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윤실이 발표한 “한국교회 청빙과 사역에 관한 서약”은 작지만 도움이 될 것이다. 교단들도 표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전도사 시절부터 부교역자의 2대 사회보험(건강보험, 국민연금)을 최소한 절반 이상 납부해 주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준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열정 페이가 불가능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전도사를 비롯한 부교역자들은 한국 교회의 자산이므로 상처받으며 성장해서는 안 된다.

 

둘째, 부교역자를 키워내는 것이 현재 교회와 담임 교역자의 책무임을 기억해야 한다. 부교역자는 현재와 미래 한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데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신학대학원 입학생이 줄고 있다. 출산율 저하와 함께 신학생 수의 감소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목회자를 바르게 키워내는 것이 현재 교회와 담임 교역자의 중대한 책무다. 단지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는 동역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사역과 함께 목회, 신학, 가정의 형편 등에 관해서도 정기적으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또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예방하는 완충의 시간이 될 것이다.

 

셋째, 서로 자발적으로 불편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발적 불편’이란 이웃 사랑이라는 더 큰 가치나 더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의식적으로 불편을 선택하고 감수하는 것이다. 교역자는 사역을 경제적 조건으로만 보지 않고 소명으로 생각하므로, 자신의 불편함을 자발적으로 감수할 수 있다. 목회의 현장은 기계를 다루는 곳이 아니다. 사람을 대한다. 그러므로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발생한다. 전도사가 가르치는 중고등부의 아이가 상처를 받고 가출을 했다면 찾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돈으로 계산하는 것은 씁쓸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사역에 임할 때 자발적 불편의 마음을 가지고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와 담임교역자 역시 자발적 불편을 감당해야 한다. 현재의 부교역자들이 자신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로부터 어떤 배려를 받으면 좋겠는가? 부교역자들의 가정과 공부와 휴식의 시간을 위하여 교회가 조금 불편을 감당하려는 정신이 필요하다. 서로가 자발적 불편을 감당하지 않으면 교회는 부교역자를 잃고 부교역자는 훈련의 장을 잃게 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교회가 부교역자를 찾을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이것은 서로에게 손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큰 손실이다.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을 자발적 불편 정신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담임 교역자와 부교역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이다.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복된 관계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서로 존중하지 못하고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가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와 담임 교역자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부교역자를 지지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가 사회보다 못한 가치관을 보임으로써 부교역자들이 도덕적으로 상처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비빔밥 리더십’은 이제 내려놓고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모범인 서번트 리더십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한다(갈 6;2). 부교역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잘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건강한 동역자 관계들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1) 빛과소금교회 목사, 기윤실 교회신뢰운동본부장.

2) 김상복, 『목회자의 리더십』, 엠마오, 1992, p. 130-133,

 

※ 관련 자료 다운로드

[자료집] 기윤실, “전도사의 근로자 인정 판결이 교회에 미칠 영향과 대책”(2023. 12)

[자료집] 기윤실, “부교역자 사역계약서, 필요합니다.”(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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