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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24년은 늦봄 문익환이 소천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문익환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그는 용서를 통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언급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민주화·인권 운동과 통일 운동에 뛰어들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본문 중)

 

이유나(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국제 정세가 신냉전의 분위기로 접어들고 북한은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으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주변 강대국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안보 위기 및 경제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가 동북아에서 균형적 역할을 취할 것을 강조하며 인생의 후반기를 ‘생명 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민주화 운동과 민족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늦봄 문익환의 삶과 정신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민족이 평화 번영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는 데 중요한 영감과 지침을 제공해 줄 것이다.

 

올해 2024년은 늦봄 문익환이 소천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문익환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그는 용서를 통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언급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민주화·인권 운동과 통일 운동에 뛰어들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문익환은 1918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분단 이후 통일을 강조하였다. 어머니 김신묵 여사도 자녀들에게 민족 사랑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문익환은 은진중학교 시절 절친이었던 윤동주와 스승인 장공 김재준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윤동주의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은 문익환의 통일 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38년 일본신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며, 이때 이곳에서 장준하를 만나게 되었다. 1947년 조선신학원(현 한신대)을 졸업하고 1949년에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한편, 문익환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에 지원하여 정전 회담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전쟁 이후, 그는 1955년 한빛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였다. 1968년에는 신구교 공동성서 번역 책임위원으로 8년간 일하면서 구약의 예언자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문익환은 김재준으로부터 역사 참여 신학과 예언자적 신학을 계승하였다.

 

1970년에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으며, 1975년에는 그의 절친이었던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문익환은 그의 뒤를 이어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적극 참여하여 민주구국선언문을 주도적으로 작성하였고 이로 인해 처음으로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이 확산되었지만, 운동은 산발적,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1977년 12월 29일,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한국인권운동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조직이 더욱 확대되어 문익환은 조직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78년 4월 26일, 동일방직 해고 근로자들이 노동삼권 보장을 요구하자 문익환은 결의문을 통해 이들을 지지하면서, 근로자에 대한 인권과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였다.

 

그해 7월 문익환, 윤보선 등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여한 민주주의 국민연합을 발족하고,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문익환은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하고 통일문제를 정부가 독점할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으로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 집행 정지가 취소되고 재수감되었다.

 

문익환 목사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회

 

문익환은 3·1민주구국선언으로 인한 첫 번째 출옥 이후부터 민주화와 통일은 하나라는 ‘민주 통일 병행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관련되어 1980년 5월부터 1982년 12월까지의 세 번째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민주화도 통일도 민족 화해이자 평화 운동임을 깨닫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 세력이 위축되다가 전두환의 유화 조치로 활동이 재개되었고, 문익환은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으로, 1985년에는 민족 민주 운동의 구심체였던 민주통일 민중운동 연합(민통련) 의장으로 선출되어 민주화와 통일은 하나라는 인식하에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추진하였다.

 

문익환은 남한과 북한의 정부가 통일 의지가 약한 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을 실제로 앞당기고자, 1989년 3월 전민련 고문으로서 방북을 결행하였으며,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2차례에 걸쳐 회담하고 4월 2일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밝혔던 자유,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둘째, 두 개의 한국 정책을 반대하고 하나의 민족, 국가를 향한 통일을 표명하였으며, 셋째, 정치, 군사 회담 추진과 동시에 이산가족 문제 및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을 실현하기로 하였고, 넷째,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데 합의하였다.

 

4·2 공동성명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통일 방안으로 점진적 연방제를 합의하였다는 데 있으며, 또한 정치·군사적 문제와 함께 이산가족 문제 및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동안 북측의 정치·군사 문제를 우선시하려는 입장과, 남측의 이를 배제하고 교류·협력에 한정하려는 입장을 절충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북한은 1991년 신년사에서 기존의 연방제 통일 방안에서 이른바 ‘느슨한 연방제’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와 남측의 남북 연합이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방향으로 통일을 진행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아울러 4·2 공동성명에 담긴 다방면의 교류 병행 추진은 6·15 공동선언에도 반영되었다.

 

문익환의 방북은 통일의 의지가 미약했던 남북한 당국의 가교 역할을 하여 남과 북의 민간 통일 운동의 연계에 노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 문익환은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 모임’ 단체를 통해 통일을 맞이하기 위해 국민과 정부가 함께 하는 국민운동으로서 통일맞이를 구상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 등 여러 부분에서 걸쳐 통일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통일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문익환은 통일이 민중이 주체가 되며, 자주적이면서 평화적이며, 그리고 우리 민족만을 위한 통일이 아니라 동북아와 더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문익환이 추구한 통일 운동은 단순히 남과 북의 통일뿐만이 아니라, 남한 내부에서 먼저 이념과 계층, 세대와 지역 간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통합, 화합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고 통일을 이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더불어 문익환이 바라본 평화는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소극적 평화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존권, 인권,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문익환은 진정한 평화는 ‘민족 통일’이라고 하면서 통일 운동은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민족을 구하는 일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한반도에서의 평화가 확대되어 전 세계의 평화로까지 확산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가장 소외되고 낮은 자, 가장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소통하며 섬김의 자세로 일관된 삶을 산 늦봄 문익환의 민주화와 인권, 통일 그리고 평화 운동은 민족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생명 사랑’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익환은 “예수는 생명이 한없이 존엄한 것을 깨닫고 생명의 존엄성을 찾아 세우는 일을 과제로 삼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에게 안겨 준 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성서는 평화-샬롬이라고 합니다. 샬롬은 곧 생명 사랑 운동입니다”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생명 사상의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생명 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민주화와 인권 운동, 그리고 민족의 통일과 인류의 평화를 위한 실천적 삶을 살고자 했다.

 

평화란 생명을 사랑하는 일이요, 생명을 풍부하고 즐겁고 아름답게 키우는 일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일이 선이라면, 평화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선이 아니겠는가! (늦봄 문익환)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이유나. 『문익환의 삶과 분단극복론』. 선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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