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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를 낳은 고정관념이 아직 여전하다. “나를 만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과 ‘마치 ~가 아닌 듯 살아야 한다’는 바울의 말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것이 ‘왜 아직 세월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책에서 캐낼 수 있는 것이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백상현 지음 |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위고 | 2017년 4월 16일 | 110쪽 | 10,000원

 

10년이 되었다. 10년이나 된 건지 10년밖에 안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짧은 세월은 아니다. 이번 서평은 세월호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으나, 이제 세월호를 이야기할 때면 (적어도 나는) 아직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언제까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왜 아직도 세월호인가’라는 질문에는 사실 나열이나 수치만으로는 대답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 ‘무엇’을 응시하는 눈이 철학이다.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이 ‘무엇’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정지된 시간

 

1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이유. 먼저 10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라캉 연구자인 저자 백상현은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개인 또는 공동체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보해 간다고 믿는 시간관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라캉은 자신의 임상 이론을 통해 시간은 결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을 한 편의 여행처럼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여정으로 사고하는 습관은 반복되는 시간의 정지된 속성을 은폐하는 가장 기만적인 환상이라고, 사실 우리의 욕망이란 타자에 의해서 결정된 이후 동일한 구조를 반복하는 도돌이표 운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학습된 삶의 패턴을 반복한다. 과거의 반복일 뿐인 현재 속에 미래를 위한 자리는 없다. …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타자의 인생 여정을 내 안에서 반복하는 우리는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 안에서 반복되는 타자의 시간, 그것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간, 정지된 시간, 즉 가짜 시간이다.

 

우리 사회가 줄곧 타자의 욕망을 욕망해 왔다면, 즉 이전에 해 왔던 것들을 열렬히 답습하고 낡은 고정관념과 체제를 굳건히 유지해 왔다면, 그것은 그저 과거를 반복해 온 것일 뿐이다. 여전히 참사가 일어나고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오늘,1) 우리 사회가 10년 동안 얼마나 나아졌는지, 10년의 거리만큼 전진했는지,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다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6년이 지난 시점에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가 그때 한 번 침몰한 것이 아니라, 매년 혹은 매달 침몰한다는 생각이 [든다.]”2)

 

그렇다면 이 반복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방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철학이 방황을 지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조난과 방황만이 사이비-시간의 환영적 흐름을 정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성의 안정된 궤도로부터 벗어난 일탈만이 미래로 향하는 발걸음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지지하는 방황은 그렇게 시간의 정지를 정지시킬 수 있다.”

 

방황이 정지된 시간을 정지한다. 그것은 “고정관념의 권력으로 지탱되는 현재의 세계로 들어서는 입장권을 정중히 거절”한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표지, ⓒ위고

 

나를 만지지 말라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3) 부활한 예수가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이다. 왜 만지지 말라고 했을까? 오히려 부활의 확실성을 보증할 기회인데 거부한 이유가 무엇일까?4)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당대의 고정관념에 의존하여 해석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을 것이다. 당신들 세계관의 한계 안에서 나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그리하여 슬픔이 봉합되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나의 죽음은 당신들이 속한 세계의 균열이므로, 영원한 상처로 남게 하라고 말이다.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리하여 애도의 작업이 완료되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죽지 않은 존재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그의 죽음의 의미가 슬픔 속에서 다시 사유되는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속한 세계를 위협하는 상처와 같은 존재”였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는 구약에 의존하는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 같은 위협에 맞서 유대의 율법 학자였던 바리새인들이 앞장서 예수를 비난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은 유대적 고정관념의 한계를 표지한다. 분명 동일한 구약의 질서에 속해 있는 듯했지만, 예수가 말하는 신은 달리 해석된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가 뱉은 단어와 문장들은 신약을, 새로운 규범의 도래를 준비하는 담론이 된다. 예수라는 균열점을 중심으로 구약의 질서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시신(屍身)이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하며 섣부른 애도를 거부한 데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영원한 상처로 남기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신의 영원한 상처,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영원한 상처. 그러므로 이 상처를 언제고 슬퍼하는 이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이 세상의 고정관념과 영원히 불화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를 기억하는 자들은, 세계와 갈등하는 자들이며 ‘가만히 있지 않는’ 자들이며 방황하는 자들이다.

 

‘마치 ~가 아닌 듯’ 살아가기

 

현재 시스템과 권력은 고정관념에 의해 지탱된다. 지금 현실이 꽤 안전하고 나름 정의로우며, 다른 대안은 없다는 고정관념 아래서 우리는 정말 그런 것처럼 살아간다.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마치 세월호를 침몰시킨 원인들이 전부 해결된 것처럼.

 

이러한 현실에 맞서 방황하는 삶, 그것은 지금의 세계가 안전하다는 통념에 대한 거부다.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로마 제국 아래서 ‘방황’했던 사도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이야기한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hos me’, 즉 ‘마치 ~가 아닌 듯’ 살아야 한다고. 이것은 바울의 로마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명제이기도 하다. … 바울에게 메시아적 소명을 받은 자는 세상이 강제하는 모든 종류의 ‘마치 ~인 듯’의 허구성을 깨달은 자들이기 때문이다.5)

 

방황은 ‘마치 ~인 듯’의 세계에서 ‘마치 ~가 아닌 듯’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방황하는 자들은 마치 모든 문제가 종결된 듯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듯 살아가며, 마치 정의가 이루어진 듯 떠드는 권력 앞에서 그것이 도래하지 않은 듯 살아간다.

 

그러므로 응답하기

 

세월호 참사를 낳은 고정관념이 아직 여전하다. “나를 만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과 ‘마치 ~가 아닌 듯 살아야 한다’는 바울의 말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것이 ‘왜 아직 세월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책에서 캐낼 수 있는 것이다.

 

매년 돌아오는 4월 16일은 우리에게 대답을 요구한다. 매년 함께 돌아오는 사순절과 부활절 역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응답해야 한다. “세계의 균열”이 된 예수에, 방황하는 삶으로 초대하는 바울에, 정의의 회복을 요청하는 이 세계에.

 

세월호가 가라앉고 백 일이 되는 날, 안산에서 서울광장까지 꼬박 하루를 걸어온 유가족을 대표해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그녀는 말했다. “엄마·아빠는 이제 울고만 있지는 않을 거고, 싸울 거야.” … 다 같이 망하고 있으므로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내가 생각해 버린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이미 믿음을 거둬버린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뭘 할까.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6)

 


1) 2023년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는 598명이었다. 김지환, “산재사망 첫 500명대로 줄었는데…‘중대재해법 효과’ 선 긋는 노동부”, 「경향신문」, 2024. 3. 7.

2)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백상현 정신분석학자 인터뷰).

3) 요한복음 20:17, 공동번역.

4) 그러나 도마에게는 몸을 만지는 것이 허락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해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복음에서는 부활체를 만지지 않음에 중점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 공동번역.

6)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눈먼 자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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