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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단순화하자면,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인간주의를 계승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고, 트랜스휴머니즘은 계몽주의의 인간에 대한 신념을 더 확장하려는 일련의 정신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앞서 언급했듯이, 포스트휴머니즘은 고전적인 인간 개념의 해체라는 이념에 합류하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강화를 통한 인간 기능의 향상에 더 초점을 맞춘다. (본문 중)

 

김동규1)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은 최근 약 30-40년 내 가장 주목받고 논쟁적인 사유의 흐름을 담고 있다. 또한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든 학자들끼리도 어떤 통일된 사유의 내용을 주제화하는 것은 아니라서 이 개념을 해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여기서는 이 사조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이해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여 해당 사조를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휴머니즘 정신을 공유하는 사상가들 사이에 공유되는 분명한 공통 강조점이 있으므로, 이 점에서 초점을 맞추어 포스트휴머니즘을 해명해 볼 것이다.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주의로도 번역될 수 있는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에도 다양한 정신이 서려 있을 것인데, 기본적으로 인간주의는 본래 “중등 교육 과정에서 그리스와 라틴 문헌 교육을 일컫는 말”(강영안 2002: 59)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문헌 연구를 기반으로 삼는 인문학적 교육을 강조하는 특성 때문에 휴머니즘의 번역어인 인간주의는 인문주의로도 번역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문헌 연구 및 문헌 읽기를 통해 올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길러내고자 하는 인문주의 또는 인간주의의 정신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선함이나 가능성을 발전시켜 인간과 세계를 둘러싼 현실의 문제에 대응하고, 올바른 사회를 구축하기를 목표로 삼는다. 비록 인간주의의 구체적 구현 방향은 다를지라도 유한한 인간 안에 있는 잠재적 힘을 계발하여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고,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구축하며,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재구성하려고 하는 욕망은 대체적인 인간주의 철학이 공유하는 정신이다.

이에 20세기의 여러 사상가들은 이러한 인간관이 인간의 위상을 과대평가했으며, 인간 개념 자체가 역사의 구성물이자 특정 지식 담론의 산물이라고 보고, 이러한 낙관적 인간관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반인간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포스트휴머니즘이 바로 어느 정도 이 반인간주의의 이념과 공명하는 함의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포스트휴머니즘 역시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라는 특정 시기에 형성된 “인간 개념의 해체”( Ferrando 2013: 31)를 꾀하기 때문이다. 이때 반인간주의나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념을 해체하는 시도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인간 개념 자체가 어떤 해체할 수 없는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지적 담론에 의한 형성물이고, 더 나아가 이렇게 형성된 개념으로서의 인간이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한 더욱 혁신적인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해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포스트휴머니즘의 중요한 통찰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개념으로서의 인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발전이나 혁신을 저해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면, 인간 개념을 세계와 사회에 중심에 둠으로써 인간에게 어떤 본질적 형상을 부여하게 되면, 오히려 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이 설정된다. 또한 이렇게 고정관념화된 인간 개념은 사회나 세계를 허구적 인간을 중심에 놓고 배치함으로써 사회와 세계의 역동성 역시 가로막는 잘못을 범한다. 이를테면 인간이 신의 형상이라는 말은 많은 경우 인간만이 신의 형상이라는 생각을 낳는다. 이 경우 인간은 해체하거나 파괴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고정된 존재가 되고, 인간 이외의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 동물이나 식물은 인간의 지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껏 변형하고, 파괴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이 점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해체해야만, 인간에 대한 변형 역시 가능하고, 이에 따라 사회와 세계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포스트휴머니즘의 기본 관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인간을 해체하고, 변형한다는 말인가? 포스트휴머니즘은 대체로 고전적인 인간 개념을 해체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자체를 지우거나 흐릿하게 만들고자 한다. 고전적으로 인간은, 동물이건 식물이건, 아니면 기계건,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위상과 본질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에 의하면, 그러한 인간 개념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어떤 고유한 본질적인 인간의 요소가 특정한 시대 담론을 따라 임의로나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면, 그러한 인간 본질을 둘러싼 개념들 전체를 해체함으로써 대안적인 인간, 또는 비인간으로서의 인간을 벼리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은 (전통적 의미의) 인간 이후의 인간, 비인간과도 같은 인간을 의도한다.

 

특히 이 맥락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우리 시대 확장된 기술과 기계와의 접속에서 찾는다. 이미 우리는 의학 기술이나 인공지능 기술, 유전자 조작이나 변형 등의 다양한 생명 조작적 기술의 발전을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의 문제로서 인간은 이런 기술에 크거나 작게 관여하거나 가담하고 있다. 기억력 상승이나 정서적 통제나 조절을 위해 약물에 의지하기도 하고, 자신의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해 AI 프로그램에 의존하기도 한다. 이것은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생명 존재의 개선과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포스트휴먼 과학기술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기반으로 삼아 “인간의 ‘신체’는 말 그대로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하드웨어를 조작하는 컴퓨터 인간’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Herbrechter 2009: [80-81]).

 

 

이렇게 여러 비인간인 기계-기술과 접속함으로써 새로운 인간 능력의 향상을 긍정하고, 이렇게 변화된 인간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 현실을 재배치하고 재구성하는 시도를 우리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중요한 단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개념은 인간 향상 또는 강화(human enhancement)이다. “…‘인간 향상’이라는 호칭 아래에서 ‘향상의 에토스’는 분명 인간 한계의 초월에 관한 이념, 심지어는 인간의 조건 자체를 초월하는 이념과 결부되어 있다. 신체적 개조는 인간이 새로운 수준의 운동 능력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거나 새로운 감각 양태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기억력, 집중력, 기분 등에 대한 인지적 변조, 급격한 수명 연장, 사이버-강화, 인간과 기계의 융합 등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은 기존의 인간 존재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Juengst 2019).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일련의 인간 능력 향상이나 강화의 기술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변형을 시도하는 이념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앞서도 조금 언급했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은 왜 이런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가? 내용의 갈무리를 위해 이 점을 다시 구체적으로 톺아보자. 여기에는 사실상의 이유와 권리상의 이유가 있다. 사실의 문제로서 인간은 예로부터 기술과 접속해 있었다. 의학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기계와 기술의 발전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의학 기술의 발전에 의존하면서 끊임없이 수명을 연장하고, 자기 능력을 향상해 왔다. 또한 운송 수단을 통해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공간 이동력을 향상시켜 왔고, 시력이나 청력의 한계도 극복해 왔다. 이렇게 엄청나게 기술에 의존해 있으면서도 인간은 순수한 인간 개념을 고집해 왔을 뿐이며, 최근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이처럼 맹목적인 인간관의 몽매함을 일깨울 정도로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을 뿐이다.

 

권리상 포스트휴머니즘은 더 나은 삶과 사회를 꿈꾸며, 이 이념이야말로 최근의 기술 발전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급격한 삶의 발전과 변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러 생명 조작적 기술이나 인간 기능 향상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이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세계에 대한 재구성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스트휴머니즘은 단지 인간의 삶의 질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데만 관심을 두는 사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여서 단지 인간을 강화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인간을 과거처럼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거나 독보적 위상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기술과 사회에 접속해 있고, 이미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비인간적 인간임을 강조한다. 즉, 포스트휴머니즘은 분명하게 휴머니즘과 구별되고, 휴머니즘을 극복하며, 비인간적 인간을 세계와 사회의 요소로 삼은 세계와 문화를 지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일종의 비판철학의 지위를 함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을 함축하며,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현재의 위기에 대응하고, 조금 더 환경친화적이고, 기존의 질서 체계에 균열을 내는 사유의 원천을 제공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의 전유와 활용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만 유의미하다. 그것은 인간의 순수한 인간성을 자연스럽게 극복하게 해주며, 우리를 새로운 삶의 번영으로 이끌어 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때의 번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만을 위한 번영이 아니라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해체한 새로운 사회적 질서의 번영일 것이다. 이런 새로운 체제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전망이 필수적이며, 이런 점에서 권리상 포스트휴머니즘은 이렇게 현재와 미래에 가장 적합한 사유일 수 있다는 것이 여러 포스트휴먼 사상가들의 강조점이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재정의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상적 사회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강화의 사회적 모형은 강화 기술이 각자의 이해에 따라 ‘좋은 삶’을 성취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만이 아니라, 좋은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사회적 규범과 조건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도 관심을 기울이도록 장려할 수 있다”(Chan 2020: 225). 즉, 인간 강화를 위한 노력이 일반화된다면, 우리의 좋은 삶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 있고, 이렇게 새롭게 규정된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사회 규범과 조건에 대한 재정립도 요구될 수 있다. 기술 발전에 따르는 여러 규제를 푼다거나 기술을 통한 강화 사업에 더 많은 재정 지원을 요구하고 사회문화적 존중심을 고양하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욕구와 전망도 변화될 것이다.

 

한 예로 인간 개념의 해체는 그 자체로 정상적 인간 개념의 해체를 통해 평등한 사회를 전망하는 데 이바지할지도 모른다. “불과 1~2백 년 전만 해도 침해 불가능한 자율적 권리를 갖는 표준적인 정상 인간은 서구(유럽)-백인-이성애-비장애-남성을 의미했다. 거기에 속하지 않는 수많은 인간들은 성별, 인종, 지역, 장애 등의 범주를 통해 타자화되어 ‘정상’에 미치지 못하는 혹은 ‘인간 이하의’ 부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스트로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은 포스트휴먼을 똑똑하고, 빠르고, 강하게 변형된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적 이해의 틀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서사의 상징적 캐릭터로 전유하고자 한다”(신상규 2021). 즉, 분명 포스트휴먼의 이념은 과학기술의 진보나 인간 강화에 개방적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기존의 인간 개념에 균열을 내고, 정상성의 사회 이념과 충돌하는 함의를 지닌다.

 

혹자들은 포스트휴머니즘을 트랜스휴머니즘과 혼동하기도 하는데, 양자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차이가 있다. 양자 모두 기술의 발전이나 인간 능력의 향상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이 반인간주의라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한 흐름과 분명하게 공명하는 반면, 트랜스휴머니즘은 반인간주의의 색채가 옅거나 오히려 인간주의의 연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즉,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수명, 지능, 질병에 대한 감수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현재의 신체 형태에 대한 의존성을 없앨 가능성을 제기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이성과 인공물에 대한 계몽주의적 신념의 연장선이자 인간을 완전히 초월하여 순수한 정보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새로운 영지주의적 열망이기도 하다”(Blake, Molloy. and Shakespeare 2012: 3-4).

 

조금 단순화하자면,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인간주의를 계승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고, 트랜스휴머니즘은 계몽주의의 인간에 대한 신념을 더 확장하려는 일련의 정신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앞서 언급했듯이, 포스트휴머니즘은 고전적인 인간 개념의 해체라는 이념에 합류하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강화를 통한 인간 기능의 향상에 더 초점을 맞춘다. 이를테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포스트휴머니스트들보다 인간 장애 극복이나 수명 연장에 더 천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장애를 비정상, 비장애를 정상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인간 정상성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포스트휴머니즘은 많은 의문과 논쟁도 함께 불러왔다. 기술과 기계의 진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기술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이를테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더라도 기술을 지배하는 체제나 집단과 그것을 수용하는 집단 사이의 위계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는데, 포스트휴머니즘 일각은 해당 문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도덕과 관습, 법을 통해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려고 하는 소위 “인간 길들이기”는 실패했고, 유전자 조작 등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사실상의 인간 개조에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길들여지지 않을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인간주의는 인간 번영의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만행의 자연적인 공범자로 자청하고 나설 수밖에 없다”(Sloterdijk 1999: 30-31[59]).2) 즉, 역사적으로 볼 때 현재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간을 중심에 두는 것은 일종의 걸림돌이 될 뿐이고, 새로운 종이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 진화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전쟁과 폭력 같은 “무시무시한 배척과 전도를 고려하면 인간 길들이기(Menschenzähmung)와 인간 형성의 근거에 관한 물음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Sloterdijk 1999: 31[60])라고 주장한다.3) 이에 그는 오히려 “종적 특성의 유전학적 개혁”(genetischen Reform der Gattungseigenschaften) 및 “장래의 인간기술”(künftig anthropotechnologie)이 새로운 인간 “진화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고 전망한다(Sloterdijk 1999: 46-47[73]).

 

그런데 유전학적 개혁이 인간의 도덕적 능력까지 향상시킬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유전학적 조작의 기술을 지배하는 계층이 그 기술을 수용해야 하는 형편에 놓인 인간들을 폭력적으로 다스리게 되지 않을지를 염려해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슬로터다이크의 입장이 포스트휴머니즘 전반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분명 포스트휴머니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이고, 기술 진보를 통한 인간 강화나 종적 개선이 낳을 위험성에 대한 인식 또한 고려해야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더 나은 전망이 열릴 것이다. 실제로 로지 브라이도티와 같이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을 개진하는 일련의 학자들은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문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더 깊이 고찰하면서, “현재의 세계 질서에 의해 지속되는 권력 관계와 배제와 지배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분석”하면서, 포스트휴머니즘의 바람직한 윤리-정치적 함의를 전개하고자 한다(Braidotti 2019: 43). 이러한 탐구는 현재 활발하게 진행 중인 논제이므로, 확정적으로 평하기보다 앞으로의 귀추를 주목하는 가운데 향후 그 명과 암에 대한 더욱 건설적인 논의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2) RM, 30-31;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한에 대한 답신」, 59.

3) RM, 31;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한에 대한 답신」, 60.

 

 

참고문헌

 

강영안 (2002).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서울: 소나무.

 

신상규 (2021).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의 의미?」. R&E FOR YOU 2 (2021년 2월).

 

Blake, Charlie, Molloy, Claire, and Shakespeare, Steven (2012). “Introduction.” Beyond Human: From Animality to Transhumanism. Edited by Charlie Blake, Claire Molloy and Steven Shakespeare., 1-10. London and New York: Continuum.

 

Braidotti, Rosi. “A Theoretical Framework for the Critical Posthumanities.” Theory, Culture & Society 36:6 (2019): 31-61

 

Chan, Sarah (2020). “Therapy, Enhancement, and the Posthuman.” The Bloomsbury Handbook of Posthumanism. Edited by Mads Rosendahl Thomsen and Jacob Wamberg. London and New York: Bloomsbury Academic.

 

Herbrechter, Stefan (2009). Posthumanismus: Eine kritische Einführung. Darmstadt: Wiss. Buchges. 국역본: 『포스트휴머니즘: 인간 이후의 인간에 관한 문화철학적 담론』. 김연순·김응준 옮김.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Juengst, Eric and Daniel Moseley, “Human Enhancement/”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ummer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um2019/entries/enhancement/>.

 

Sloterdijk, Peter. Regeln für den Menschenpark: Ein Antwortschreiben zu Heideggers Brief über den Humanismus. Berlin: Suhrkamp, 1999. 국역본;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이진우·박미애 옮김. 서울: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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