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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나로 살려면 신앙과 삶을 읽는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인다고 더 지혜로워지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스러워지고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 주변에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은 많지 않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이것은 기도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몸에 밴 사고방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할 때 얻어진다. 변화와 성장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본문 중)
이정일(작가, 목사)
예수님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마태복음 9:1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사물이 인식되는 방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일 수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타락한 교회를 쇄신하고자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네덜란드에도 변화가 생겼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화려함 대신 절제미를 추구했고 이런 변화는 미술에도 나타났다. 성경 속 내용을 그린 종교화도 우상숭배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시대의 변화는 화가들에게 즉시 영향을 미쳤다. 종교화의 인기가 시들해지니 수입이 확 줄었고, 그때 대안으로 찾은 게 초상화였다. 문제는 초상화는 얼굴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이 드러나는 낯빛까지 그려내야 해서 쉽지 않았다. 초상화에 자신이 없는 화가는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렸다. 얀 베르메르의 “부엌의 하녀”나 야곱 반 로이스달의 “나무로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을 보면 느껴지는 변화가 있다.
“부엌의 하녀”를 보면 하녀가 우유를 따르는 순간의 느낌이 선명하고, 로이스달의 그림에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순간의 느낌이 신선하다. 이런 느낌을 빌렘 칼프는 1653년 작 “뿔 술잔이 있는 정물”에서 보여 준다. 선명한 붉은빛의 바닷가재, 그 옆의 상큼한 레몬, 무소뿔 장식, 은쟁반, 카펫을 생생한 질감으로 표현하고 빛과 그림자의 오묘한 조화를 보여주는데, 이건 결코 사진이 가질 수 없는 느낌이다.
혹자는 당시 해상 패권 국가였던 네덜란드 상인의 부유함을 값비싼 기호품과 사치품에서 확인하며 호기심을 느낄지 모르지만, 칼프의 그림에서 중요한 건 이제 미술의 초점이 사실의 재현에서 화가의 인식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그림은 고전주의 시대의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미술의 변화는 시와도 연결되어 있다.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Dylan Thomas)가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그의 시를 세 번이나 인용하고,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대중가수 짐머만(Zimmerman)이 성을 딜런으로 바꾼 건, 가볍지 않다. 시 “저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에서 시인은 ‘분노하라’고 외치는데 그게 일상의 틀을 거부하고 익숙한 주변과 맞서 싸우라는 느낌을 준다. 분노하지 않는 건 체념하는 것이고 늙는 것이기에.
사막화와 기후 변화로 고통받는 지구를 살리려 떠나는 우주 탐험대를 향해 브랜드 박사(배우 마이클 케인)는 딜런 토마스의 시를 읊조린다. “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무력해진 아버지에게 힘을 내라고 이 시를 썼지만, 시는 희망이 꺼져가는 데도 좌절하지 않는 주인공 쿠퍼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영화는 관객이 딜런 토마스의 시와 희망을 찾아가는 쿠퍼 이야기를 겹쳐 읽고 정서적 주파수가 맞춰져서 하나가 되게 하는데, 이런 상상 활동이 시를 읽을 때도 일어난다. 딜런 토마스가 쓴 또 다른 시 “내가 쪼개는 이 빵은”에 보면 시인은 빵 한 조각이 한때는 바람결에 흔들리던 귀리였음을 일깨워준다. 그 순간 빵을 보던 독자의 마음속 시선이 들녘으로 뻗어간다. 이런 시인의 눈을 갖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이런 눈을 가지면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 너머의 것을 상상하게 된다. 불판의 고기 굽는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무였다는 걸 상상하면, 깨진 그릇을 보는 눈도 달라질 수 있다. 오세영은 “그릇”에서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고 썼다. 심윤경은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독재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은 또 다른 독재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비옥한 밑거름”1)이 된다고 지적한다.
시인이나 소설가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역시 다른 느낌, 다른 시선을 뽑아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걸 ‘다른 세계’(은유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힘이라고 말했다. 트렌드가 바뀌어도 네덜란드 화가들이 좌절하지 않았고, 쿠퍼(배우 매튜 매커너히)가 관객에게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문구를 마음에 새기게 만든 건, 다른 세계에서 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쿠퍼일 수 있다. 진짜 쿠퍼처럼 살고 싶다면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현실을 다르게 읽어야 한다. 소설가 은희경은 『새의 선물』에서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어서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2)라고 썼다. 작가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광진테라 아줌마를 통해서 강조한다. 현실에서 체념하는 건 그것이 자기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아줌마가 자기의 삶을 한 발짝 벗어나서 바라보았으면 달라졌을 거라고.
나다운 나로 살려면 신앙과 삶을 읽는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인다고 더 지혜로워지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스러워지고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 주변에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은 많지 않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이것은 기도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몸에 밴 사고방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할 때 얻어진다. 변화와 성장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생각해 보라, 성취욕구가 강할수록 독창성은 밀려난다. 성취를 강조할수록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성공하겠다는 욕구가 강하면 ‘자신만의 시선’을 갖기보다는 시류에 영합하는 성공이 보장된 안정된 길을 택하려고 하기에, 마음속으로는 멋진 걸 꿈꿔도 현실에선 정반대로 행동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면 뻔한 현실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는 게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세상을 변화시켰다.
1)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한겨레출판, 2002), 216.
2) 은희경, 『새의 선물』(문학동네, 2022),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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