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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장르는 이 은밀한 세계를 다룬다. 일상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원인으로 악을 지목한다. 악을 몰아낼 해결사들을 그 세계에서 소환한다. 퇴마 의식을 치르고, 악과 함께 해결사들도 물러간다. 일상은 다시 이어진다. 그런데, 2024년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파묘>는 바로 이 은밀함과 비일상성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상의 자리를 꿰차고, 중심에 선다. (본문 중)

 

성현(필름포럼 대표, 창조의정원교회 목사)

 

내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하는 세상에는 두 가지가 없다.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이다. 출발지와 목적지만 입력하면 된다. 화살표와 숫자만 있을 뿐 길을 묻는 초행자도, 낯선 이가 알아듣도록 열심히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도 없다. 길을 찾는 과정은 사라지고, 도착하는 결과만 남는다.

 

삶이라는 길도 그런 방식을 좇는 이들이 있다. 아니, 많다. 손 없는 날 이사를 하고,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를 하기 전에 수술 일자를 역술원에서 받아오며, 새해를 맞아 역술가를 찾아간다. 병, 실패, 시행착오는 몰아내야 할 악한 것들일 뿐이다. 이것들이 내 삶에 틈입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음양오행과 신령적 존재가 인간의 길흉화복과 흥망성쇠에 결정적 원인이므로 이 원리와 기운을 잘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이런 원리를 따라 산다는 걸 자랑하진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느냐며 합리화할 뿐이다.

 

오컬트 장르는 이 은밀한 세계를 다룬다. 일상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원인으로 악을 지목한다. 악을 몰아낼 해결사들을 그 세계에서 소환한다. 퇴마 의식을 치르고, 악과 함께 해결사들도 물러간다. 일상은 다시 이어진다. 그런데, 2024년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파묘>는 바로 이 은밀함과 비일상성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상의 자리를 꿰차고, 중심에 선다. “음과 양, 과학과 미신. 바로 그 사이에 있는 사람. 나는 무당 이화림이다”라는 선언적 독백을 시작으로 <파묘>는 무의식과 그림자로 머물러 있던 무속을 현실의 중앙 단상에 올려 세운다. MZ 무당 화림은 평소엔 프랑스 의류 브랜드 르메르의 옷을 차려입고 포르쉐에 기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헬스장에서 스피닝을 한다. 유행하는 ‘가시 번’ 헤어스타일을 하고, 마셜 스피커를 틀고 콘서트 같은 굿판을 벌인다. 빙의를 매개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심리적•영적 다툼을 벌이는 대신, 눈에 보이는 귀신이 직접 등판해 무당과 싸운다. 이성과 합리성, 과학과 의학의 연주자들이 혼돈의 원인을 몰라 당황할 때,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할 줄 아는 무속이라는 지휘자가 전면에 나서 문제를 해결한다. 또한 사적이고 탈역사적 차원의 기복에만 머물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들(화림, 봉길, 상덕, 영근, 광심, 자혜)이 함께 협력과 지원을 통해 임진왜란부터 오늘로 이어진 역사의 상흔을 씻어주는 공적 역할까지 수행한다.

 

영화 <파묘> 스틸컷. <파묘>(2024) | 감독 장재현 | 134분

 

왜 이렇게 무당이 일상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 지식과 권위, 전통과 공동체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불안 사회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이런 불안을 공포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인재라 불릴만한 대형 재난 사고도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다. AI가 대신할 거라며 일자리까지 위협받는다. ‘이대로 살아가는 게 괜찮을까?’라는 불안과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이 일상의 공기가 돼버렸다. 이렇게 물질과 삶, 인간이라는 주도적이고 생산적인 목소리를 내던 것들이 일상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침묵 속에 머물러 있던 정신과 죽음, 자연의 발화가 시작된다. 개인의 삶 역시, 실패를 배움의 과정으로 여기고, 병은 관리해야 할 신체 역사의 일부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안을 넘어 공포가 될 수 있다. 이 불안을 잠재워 줄 구원자가 필요하다. <파묘>의 무당과 풍수가는 은밀한 세계에 머물지 않고, 영화 시작부터 일상의 자리에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빼앗긴 이 자리를 되찾아 와야 할까? 아니다. 애초부터 성경은 그러한 지위에 관심이 없었다. 금송아지라는 가시적인 인도자를 만들어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워 달라는 요구를 죄로 규정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실용적인 제안을 사탄의 유혹이라며 거부했다. 신뢰 속에 모호한 시절을 견디고, 주린 배를 당장 채워줄 떡이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다. 신앙은 그런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며 실상은 실패하지 않을 지름길만 찾고, 어려움을 당한 이유는 기도하지 않은 탓이라거나 고난은 축복의 전조 단계라고만 여기는 이들에게 성경은 말한다.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소명의 자리’라고.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자가 있는 줄 알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당할 것을 주변 사람들이 예언해도 사명을 이루려 행선지를 변경하지 않았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판단하는 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안전함을 길이요 풍요로움을 진리요 무병장수를 생명이라 믿는 세상 속에서 창조적으로 사는 삶의 기쁨을,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나와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이며 사는 삶의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늘어갈 때, <파묘>처럼 일상의 자리에서 굿판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도 출발지와 목적지만 중요하고, 삶을 익숙한 안전함으로만 채우려는 이들에게 시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명령 – 이병률

 

내 앞으로의 소망 하나는 길을 자주 잃게 해달라는 것

 

절대 길을 안 잃어본 사람이라서

길을 잃을 것 같으면 아예 발길을 돌려 되돌아 나오거나

잃은 길을 땅바닥에 회로로 그려본 다음

그 길을 가뿐히 빠져나온다는 것

그러니 그 못된 버릇을 영영 잃게 해달라는 것

 

(중략)

 

내 이제 앞으로의 소망 하나는

 

뭔가를 그릇에 담아도 자꾸 새는 것

담으려 할 때마다 마음에 두었던 것들을 쏟고

가득 출렁이도록 채울 때마다 암초에 부딪혀

지금이 언제인지를 잊는 것

다시는 생의 낯섦 앞에서 경악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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