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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만 가득한 선거법을 창의성 넘치는 선거법으로 바꾸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 문화에 이어, 이제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선거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공정 선거의 취지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각종 규제를 포함한 덕분에 선거법은 선거 운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법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문 중)
김희원(섀도우캐비닛 대표)
“전과 3범, 이제 끝장내 주십시오.”
“84채 임대업자는 명백한 팩트!”
“식품위생법 위반 전과자”
선거철이 되면 곳곳에 자극적이고 비방 가득한 각종 현수막이 어지럽게 널립니다. 매번 ‘현수막 공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이번 4·10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길목마다 ‘네거티브’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2018년 7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행한 “지방선거 캠페인 홍보 효과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현수막이 홍보 효과에 도움이 되었다는 응답은 45.4%로 최하위를 기록하였습니다. 춘천시에서 2023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현수막이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답변이 응답자의 94%였습니다. 인천시의회에서 5,3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당 현수막 철거와 관련한 질문에서도 응답자의 94%가 “정당 현수막들이 교통, 보행, 안전, 도시 미관 등을 위협하고 있어 제한해야 한다”라고 답했습니다. 거의 모든 유권자가 현수막 정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효과도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역효과만 가득한 것 같은데, 왜 정당 현수막은 이렇게 많이 나타나는 걸까요?
첫 번째 이유는, 확실히 할 수 있는 선거 운동이 몇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거법은 ‘된다고 표기한 것’ 빼고는 다 안 되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후보자 명함의 크기까지 가로 9cm 세로 5cm 이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사할 때 목에 걸고 있는 피켓은 몸에서 떨어지면 선거법 위반이 될 수 있기에 잠시 쉴 때는 피켓을 땅이 아닌 발등에 얹어 놔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렇기에 선거 때마다 ‘이것은 되는지, 안 되는지’ 물어보는 선거관리위원회 유권 해석 요청이 빗발치게 됩니다. 상대방 측으로부터 선거법 위반으로 공격받게 되면 심각한 경우 의원직 상실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습니다. 한시가 급한 선거 상황에서 선관위 해석을 묻고 답변을 기다리기도 어렵지만, 답변을 받더라도 위반 염려가 있는 상황에서는 마음껏 선거 운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선거 환경에서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거 운동 방법이 바로 현수막입니다. 그래서 현수막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유권자와의 접촉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행 선거법에서는 명함을 직접 ‘배포’할 수는 있어도 대면하지 않고 ‘살포’할 수는 없습니다. 우편함에 넣어두거나 아파트 출입문에 끼워두는 것은 선거법 위반입니다. 대면하여 명함을 배포할 수 있는 사람은 후보자 본인 외에 배우자와 직계존비속, 그리고 지정 1인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거나 가족이 없는 후보자는 본인과 지정 1인의 힘으로만 명함을 나눠 주어야 합니다. 문자로 자신의 출마 소식을 알리고 싶어도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연락처 정보를 얻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릴 SNS 계정이 있어도 계정 정보를 알릴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알릴 방법은 ‘현수막’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에게 “네가 출마했는지 사람들이 모르니 현수막을 걸어 알려야 한다”, “네가 누구인지 알리려면 현수막에 선명한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 “그래, 현수막을 보니 요즘 좀 눈에 띄는 것 같더라”라고 주변에서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선거 환경에서 현수막을 안 걸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뽑히는 게 중요한 선거가 아닌 상대방이 떨어지는 게 중요한 선거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우리 선거를 차악을 뽑는 선거라고 합니다. 둘 다 악한데 그중 덜 악한 사람을 골라내는 선거를 하고 있습니다. 당선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더 나쁘다는 것을 강조해야만 합니다. ‘잘한 것’과 ‘잘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나쁘고’ ‘더 나빠질 것’을 강조하는 것이 더 강력한 선거 운동이 됩니다. 그렇기에 심판해야 하고, 그렇기에 상대방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네거티브가 생겨납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악한 점을 퍼뜨려야 합니다. 그럴 때 현수막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선거 환경 때문에, 모두가 지나가는 길목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번씩은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큼지막한 글씨의 네거티브 현수막이 걸리게 됩니다.
우리 선거의 현실이 이 단순해 보이는 ‘현수막’에 담겨 있습니다. 자유 없는 선거, 접촉 없는 선거, 최선 없는 선거라는 우리 선거의 어려운 점이 현수막을 남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4·10 총선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곧 2026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습니다. 2027년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2028년 제23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전국 단위 선거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이런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이어지는 세 번의 선거 내내 다시 현수막 공해에 시달리며 고개를 가로젓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먼저는 규제만 가득한 선거법을 창의성 넘치는 선거법으로 바꾸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 문화에 이어, 이제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선거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공정 선거의 취지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각종 규제를 포함한 덕분에 선거법은 선거 운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법이 되어 버렸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와 기술의 진보를 선거 운동에 활용하고자 하지만, 이를 이전 시대의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 시대에 뒤처진 법이 되어 버렸습니다. 1994년 기존의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선거법”, “지방의회의원선거법”과 “지방자치단체의장선거법”이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으로 통합되었고, 2005년 8월 “공직선거법”으로 축약된 이후, 이 법은 행정법 중 가장 많은 수정이 이루어진 법이 되었습니다. 2018년 한 해에만 무려 9회 개정되었고, 2024년 1월 말까지 103번 개정된 누더기 법안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꿔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소통하는 정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정치를 바라보면 소통보다는 서로 간의 일방적 의견 전달만이 있습니다. 정치인은 언론이나 SNS 게시 글을 통해 의견을 개진만 하고, 이를 본 유권자들은 문자 폭탄과 댓글 테러로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내용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게 됩니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한국 문학과 영화, 대중문화를 가르치며 동아시아연구센터장도 겸임하고 있는 다프나 주르(Dafna Zur)교수는 K-컬처의 핵심을 관객 및 팬들과의 ‘공감력’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예측성과 독창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게 만드는 팬들의 요구와 이에 대한 공감, 팬들과의 소통을 통한 유대감이 우리의 K-컬처를 만든 힘이라고 했습니다. 더 좋은 정치를 만들기 위한 유권자의 요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공감의 문화, 이를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며 만들어가는 유대감의 문화가 이제 우리 정치에도 생겨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차악이 아닌 최선이 있는 정치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정치를 저평가하고 정치를 혐오하고 아예 정치를 반대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정치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고 정치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정치 참여를 촉구하는 문화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다양한 배경과 전문성을 가진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인재들이 정치에 뛰어들어 풍요로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 위에서 유권자들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며 나쁜 이력을 골라내는 선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며 좋은 가치를 선택하는 선거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현수막을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읍·면·동 행정 면적에 따라 정당 현수막을 2개 이내로 제한한다고 해서 정치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규제에 규제를 더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자유롭게 하지만 치열하게, 정치권과 시민이 소통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함께한다면 최선을 다하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던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떠올려 봅니다. “Oscar goes to Parasite!”(오스카상 수상작은 기생충입니다) 이후 우레와 같이 쏟아지던 박수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던 우리 영화인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날 마지막으로 소감을 발표한 CJ 이미경 부회장의 말을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히 우리 영화를 응원해 주시고,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주저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전달해 주시는 한국의 영화 관객들에게 정말정말 감사드리고 싶어요. 이런 한국 영화 팬들의 지지와 비판은 우리를 절대 기고만장해지지 않게 만들었고, 오히려 감독과 창작자들이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어요. 한국 영화 팬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곳에 있지 못했을 것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현수막 공해로 상징되는 우리의 정치는 달라질 수 있을까요? K-Pop, K-Movie, K-Drama처럼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K-Politics가 될 수 있을까요? 여기 영화 팬 못지않게, 아니 더 강렬하게 의견을 전달하는 우리 유권자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 문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서로에 대한 응답이 되어 심판의 바람을 넘어 변화의 흐름으로 이어지길 바라봅니다. 분명 그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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