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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내게는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종교와 세속 사회의 거리가 조금이나마 좁혀진 사례라는 점에서 반갑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미디어와 종교의 접점’을 연구하는 개신교인이라는 걸 아는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참 재미있다. ‘뉴진스님 현상’에 대한 나의 해석을 풀어내기 위해 그 반응들에 딴지를 좀 걸어 보자. (본문 중)

 

박진규(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 교수)

 

올 상반기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인물 중 하나는 뉴진 스님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해 주요 언론이 기사와 인터뷰를 통해 이 트렌디한 이름의 스님 이야기를 쏟아냈고, 소셜 미디어에선 그의 영상과 멘트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민머리와 승복 차림으로 디제잉 공연을 하는 이 불교 승려에 대한 대중, 특히 이른바 ‘MZ 세대’의 반응은 꽤 호의적이고 때론 열광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뉴진 스님은 정식 불교 승려가 아니다. 한때는 꽤 알려졌던 개그맨 윤성호 씨가 스님 복장으로 EDM에 맞춰 디제잉할 때 사용하는 ‘부캐’다. 그가 처음 대중의 주목을 받은 건 작년 봄 서울 연등회였다. 코로나로 갇혀 있던 시간에서 막 벗어난 젊은 관람객들은 “극락왕생”, “부처핸섬”, “극락도 락이다”를 외치는 스님을 따라 연등회를 클럽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의 뜨거운 분위기를 담은 숏폼 영상이 소셜 미디어에 퍼지면서 “불교 또 나만 빼고 지들끼리 재밌는 거 하네”라는 밈도 생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성호의 부캐는 “일진 스님”이었다. 코미디언답게 재치 있게 중의적 의미를 담아낸 이름은 작년 11월 불교신문 사장 오심 스님이 내려준 새 법명 “뉴진(새로울 New, 나아갈 進)”으로 바뀐다. 그의 활동에 대한 조계종의 승인인 셈이었다. 불교의 공식 지지를 받게 된 뉴진 스님은 올 4월 ‘불교국제박람회’에서 또 한 번 큰 화제를 낳는다. 10만 명이 넘는 누적 방문객 대부분이 2030 세대였다는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그의 공연이었고,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그에게 염주와 디제이 헤드셋을 선물하는 장면은 신문과 뉴스를 도배했다.

 

이 시대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내게는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종교와 세속 사회의 거리가 조금이나마 좁혀진 사례라는 점에서 반갑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미디어와 종교의 접점’을 연구하는 개신교인이라는 걸 아는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참 재미있다. ‘뉴진스님 현상’에 대한 나의 해석을 풀어내기 위해 그 반응들에 딴지를 좀 걸어 보자.

 

뉴진스님 2024 연등회 공연 유튜브 화면 캡처 ⓒ뉴성호 bbakoo, [단독:미공개] ‘뉴진스님’ 2024연등회 세기의 공연, 뒷이야기. 유튜브. https://youtu.be/fjwKrh3QfhE?si=TGdQNjyAsQXWcjPF

 

가장 많이 접한 반응은 “왜 우리는 뉴진 스님이 없을까요?”라는 질문이었다. 갑자기 호감도가 높아진 불교를 향한 부러움의 표현이다. 90년대부터 슬슬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팬데믹을 거치며 끝 모르게 추락하는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와는 너무나 비교되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이런 태도는 세상 자체에 별 관심을 두지 않거나, 성속(聖俗) 이분법에 따라 세상의 호감을 종교의 타락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현재 한국 교회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세상과의 관계 설정이 잘못된 데 있다고 보는 내 눈에는, 불교에 대한 세속 사회의 호감을 부러워하는 건 그나마 희망적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뉴진 스님을 둘러싼 현상을 불교 자체에 대한 대중의 호응과 열광으로 단순하게 규정짓고, 이에 대한 막연한 선망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그런 질문이라면 답을 찾는 과정에서 얻는 유익도 별로 없을 것이다. ‘뉴진 스님을 보유한 불교’에 대한 부러움이 의미가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속내를 품어야 한다.

 

첫째, 갈수록 젊은 세대와의 공감이나 접점을 상실해 가는 개신교 현실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이다. 디제잉하는 스님 콘셉트는 원래 불교가 주도한 게 아니다. 개그맨으로서 설 자리를 잃어가던 윤성호의 절박함이 만들어 낸 아이디어를 조계종이 발 빠르게 수용했다고 봐야 더 정확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날로 젊은 세대가 외면하는 “오래된 종교”로 굳어지는 불교의 현실을 바꿔 보려는 진지함이 있었다. 일진 스님으로 활동하던 윤성호를 2023년 연등회에서 공연하게 한 것도 “젊은 불교”를 표방한 청년 포교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개신교는 어떤가. 개신교를 향한 청년 세대의 시선은 불교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온갖 ‘꼰대 짓’의 근원이라면 개신교를 떠올리는 게 상식에 가깝다. 점점 더 세상과 괴리된 언어와 행동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고, 그나마 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려는 젊은이들은 교회 밖으로 내몰린다. 청년들은 이제 교회를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곳’으로 규정한다. 주요 제도 종교 가운데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가장 포용적이라고 인식되는 불교에 한참 뒤처진다. 이런 현실 인식 없이 우리에겐 왜 뉴진 스님이 없는지 묻는 건 너무 공허하다.

 

둘째, 이 질문이 의미 있으려면 개신교의 경직성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젊은 세대가 뉴진 스님에게 열광한 건, 그들에게 친숙한 문화를 종교라는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과 연결될 줄만 알았던 불교가 EDM, 디제잉, 클럽 댄스 등을 과감하게 ‘시전’했기 때문이다. 장삼 차림에 목탁을 두드리며 “부처님 잘생겼다, 부처핸섬!”을 외치는 연예인을 종교의 신성함에 대한 모독이나 희화화라 욕하지 않는 불교가 그야말로 “힙”해 보였던 거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전통과 모던, 낯섦과 친숙함이 혼재하는 불교의 새 모습이야말로 가장 동시대적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때마침 불교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종교”라고 자신을 호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상해 보자. 개신교 주변에 뉴진 스님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면 한국 교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불교와는 다른 조직 체계임을 고려해야겠지만, 교계 권력만 놓고 보면 경계와 호통의 목소리가 대세였을 것이다. 포용성이나 다양성은 고사하고, 신앙적 고백의 차이마저 쳐내기에만 골몰하는 요즘 교권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예측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간 참신한 형식을 도입해 젊은 세대와 호흡하려는 도전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만 기억해 봐도 내다보는 건 어렵지 않다. 지켜내야 할 성스러움을 형식적 경직성으로 치환하는 종교는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일 리 없다. 이런 토양에서 뉴진 스님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 질문 뒤에는 꼭 따라붙는 말이 하나 있다. “우리도 뉴진 스님 하나 만들어요!” 세상의 반응에도 관심이 있고, 젊은 세대와의 공감과 접점을 늘려 가려는, 한국 교회의 경직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이기에 나름 진지한 요청이다.

 

하지만 뉴진 스님의 인기를 잘된 마케팅 기획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라면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조계종 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이번 불교 박람회에서 청춘 남녀 데이팅 이벤트 <나는 절로>를 진행하고, 부처님 오신 날 총무원장 봉축사에서 선(禪) 명상을 K-콘텐츠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발표하는 조계종의 기획력이다. 그러나 종교를 둘러싼 대중의 호불호를 설명하는 건 그리 간단치 않다. 여러 복잡한 조건과 사회적 맥락이 결합한 고차 방정식의 결과여서 그 최종 열매만 간단히 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어리석다.

 

더구나 “개신교판 뉴진 스님”이 ‘대박’을 향한 환상이라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대박은 곧 하루아침의 폭망을 수반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힐링 문화의 대표 주자였다가 이른바 “풀소유” 논란으로 자취를 감춘 혜민 스님의 사례도 우리는 잘 안다. 사실 뉴진 스님에 대한 호감을 불교의 가르침이 젊은 세대에게 통했다고 해석하는 미디어의 호들갑 역시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변하겠다는 불교에 마음을 열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 메시지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이제 불교가 정작 그들에게 제공할 종교적 본질은 무엇인지를 지켜봐야 한다.

 

나는 세속 사회가 종교에 보이는 진정한 호감과 칭찬의 원천은 대안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가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그 다름이 세상이 말하는 가치와 질서 속에서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대안을 상상하도록 돕는 것이 이 시대 종교가 담당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정리한 뉴진 스님 현상에 대한 개신교인의 반응은 조급증에 가깝다. 부러움과 선망, 복제와 대박에 대한 강박이 뒤섞여 나온 반응이다. 거기에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직면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과 성찰이 부족하다. 그런 조급함으로는 이 현상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뉴진 스님으로 인해 종교로부터 멀어졌던 젊은 세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렸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남겨진 숙제는 종교가 그들에게 진짜 줄 수 있는 것,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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