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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와 국가 공동체가 함께 다루어야 할 영역으로 점차 인식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외로움이 우울과 고립, 정신건강의 위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체계적인 관리와 함께 사회적 대응과 예방 체계를 만들고자 시도 중이다. 영국의 외로움부(Minister for Loneliness) 장관직 도입(문화·미디어·스포츠부 장관직과 겸직)과 ‘외로움 연례보고서’ 활동이나, 일본의 고독·고립대책 담당실 출범과 중점 계획 수립 등이 대표적이다. (본문 중)

 

이은경(희망제작소 소장)

 

인간은 외로운 존재로서 하나님과 홀로 마주하는 근원적인 고독함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외로움’은 사회적인 현상이며, 인위적이며 불공평하고 또 매우 광범위하다. 3년이 넘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인류는 격리와 단절을 동시에 경험했으며, 정보통신 기술은 빠른 속도로 비대면의 일상을 새로운 표준으로 만들고 있다. ‘연결된 개인’의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존재 방식과 활동 유형은 전통적인 의미의 직접적 연결과 교류의 경험을 점점 축소하거나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중심의 관계 맺기는 편리하고 즉각적인 소통의 효능감을 극대화하지만, 동시에 파편화되고 단절된 집단화의 위험 속에서 경쟁적이고 휘발적인 콘텐츠 소비가 주는 무력함과 피로감 속으로 우리를 내몰고 있다.

 

외로움을 광범위하고 인위적이며 불공평한 사회적 현상으로 만들고 있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디지털 기술이 하나의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철학자 김만권은 지적한다.1) 디지털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소수(플랫폼 기업이나 그 소유자, 고도의 전문적 기술이나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디지털 경제의 이득이 몰리며, 특유의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 그 이득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지고, 분배의 격차는 매우 크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는 양극화된 채 단절과 불신을 가속화하고, 사람들은 쉽게 외로워진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사무자동화와 같은 중숙련 일자리를 주로 대체할 것으로 예측되며, 배달·택배·분류 등의 저숙련 플랫폼 종사자와 같은 일자리만 양산하는 반면, 인공지능 정보의 정확성을 판별할 수 있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혜택이 커지는 방향으로 일자리 지형을 바꾸고 있다.2) 챗GPT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의 등장 또한 외로운 개인들이 인간들 사이의 관계 대신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더 몰두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현실화하고 있다. 이렇듯 초연결망의 시대라 불리는 21세기는 가장 ‘외로운 세기’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류는 ‘론리 사피엔스’(Lonely Sapience)로 불리기 시작했다.

 

외로움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와 국가 공동체가 함께 다루어야 할 영역으로 점차 인식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외로움이 우울과 고립, 정신건강의 위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체계적인 관리와 함께 사회적 대응과 예방 체계를 만들고자 시도 중이다. 영국의 외로움부(Minister for Loneliness) 장관직 도입(문화·미디어·스포츠부 장관직과 겸직)과 ‘외로움 연례보고서’ 활동이나, 일본의 고독·고립대책 담당실 출범과 중점 계획 수립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세계보건기구(WHO)는 2023년에 외로움이 국경을 초월해 건강, 복지, 발전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치는 공중보건 의제가 되고 있음을 선언하고, ‘사회적 연결 위원회’(Commission on Social Connection)를 만들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1인 가구의 증가와 혼밥·혼술과 같은 ‘나홀로 라이프스타일’의 확산과 더불어 외로움이 시민들의 생활 속으로 성큼 들어선 의제가 되고 있다. 또한, 세계 최저 수준의 낮은 출생률과 코앞으로 다가온 초고령 사회 진입은 외로움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거나 심화할 수 있다. 최근 발표되는 외로움 관련 조사 결과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외로움과 연결성에 대한 한 국제 조사에서 한국인의 외로움 정도(57%)가 독일(27%)이나 스위스(32%)보다 높은 것으로 보고됐다(갤럽인터내셔널/메타 공동 조사, 2023). 이는 국내 조사 업체의 2023년 외로움 인식 조사(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에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의 수준에 대해 53%의 참여자가 ‘꽤 많은 사람들이 외로울 것’이라고 답한 수치와 비슷하다. 한국인의 고립감 정도에 대한 조사에서는 3명 중 1명 이상이 고립감 수준(30% 이상의 동의율)으로 나타났다(국민일보/피엠아이, 외로움척도지수와 종교 상관관계). 또한,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2022년 고독사 실태조사에서 고독사 발생 건수가 3,378명으로(2021년 기준) 하루 평균 9명꼴로 역대 최대 수치를 보였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외로움이 가져올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비용에 대비한 정책적 접근이 시작되었다. 보건복지 차원의 예방의학적 접근, 사회복지 차원의 안전망 대응은 물론 문화예술 차원의 ‘사회적 처방’ 정책까지 제시되고 있다. 사회적 처방은 외로움을 약물과 같은 의료적 처방이 아닌 사람 간의 소통, 지역 사회와 개인의 촘촘한 연결 및 관계망 회복으로 예방하고 대응하고자 하는 접근이다. 문화예술 활동이 이러한 과정에 주요한 연결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종교 또한 이러한 ‘사회적 처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종교 활동과 종교적 신념을 통해 내적 평안과 연결의 활동을 하는 것은 주요한 외로움 대처 방법의 하나이다. 하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이 외로움의 위험에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일반 국민들의 외로움 수치(54%)보다는 낮았지만 개신교인도 절반 가까이(46%) 외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3) 특히,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 중 36%가 가끔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고 답해 3명 중 1명 이상이 교회 내 외로움에 대해 호소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외로움의 시대에 대한 대처로서 국가나 기업에만 역할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회 또한 외로움에 취약한 이들을 찾고 만나고 연결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특히 외로운 개인이 자기 돌봄, 서로 돌봄의 힘을 기를 수 있도록 교회가 먼저 손 내밀고 도와야 한다. 1인 가구의 욕구와 필요에 대한 조사에서 남성들의 경우 ‘식사’가 경제나 건강과 함께 높은 순위에 있다든지, 평균 수명의 연장에 따라 함께 나이 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커진다든지 하는 부분은, 우리가 스스로를 잘 돌보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근본적으로 타인을 돌보는 존재임을 배워야 함을 보여 준다. 교회는 이러한 역량을 습득하고 체화하는 데 더없이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또한, 교회에서 ‘가족을 강조하는 설교 혹은 성경 공부를 할 때’와 ‘부부끼리 모일 때’ 외로움을 느낀다는 그리스도인이 10명 중 1명가량 된다는 한 조사 결과는, 이제 교회도 정상 가족 중심의 접근에서 벗어나 1인 가구를 비롯한 비혼, 이혼, 사별 등의 다양한 가구 형태와 생애 단계를 고려해야 할 때임을 말해 준다. ‘가족이 돌보는 것’을 넘어서 ‘돌보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말처럼, 다양한 삶의 형태와 방식을 인정하고 열려 있을 때 우리는 외로움과 고립에서 더욱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의 전환기의 다양한 순간에 외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여러 층위의 연결망 중에 가장 힘이 되고 다정한 연결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면, 노리나 허츠의 말처럼, 무심한 이방인에서 적극적인 연결자로, 소비자에서 시민으로,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이 역할을 해 나간다면, 교회가 외로운 이들 곁에서 “외로운 세기의 해독제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4)

 


1)  김만권, 『외로움의 습격』(혜다, 2023).

2)  김만권, 같은 책.

3) 지용근 외, 『한국 교회 트렌드 2024』(규장, 2023)

4)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홍정인 옮김(웅진지식하우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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