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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우리의 온갖 선택 밑바닥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묻게 만든다. 죽음의 두려움은 우리를 신중하게 만들고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여 겸손하게 만들고 똑같이 죽을 존재들에 대한 연민을 품게 만들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를 노예로 삼고 지독히 악한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 두려움에 빠진 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박흥용 작가의 웹툰 <소쩍이 운다>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자 무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활극이다. 남장을 하고 세상 구경에 나선 양반집 규수 진경과 호위 무사 소쩍이 떠나는 여행기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장면들, 그 장면들을 수놓는 시 같은 대사와 묘사들. 정적(靜的)이면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하는 무사의 결투 장면들, 시크한 무사와 당돌한 진경 사이의 티키타카와 애틋한 낭만까지…. 이 웹툰의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묵직한 주제까지 담고 있다. 오늘은 박흥용 작가의 기독교적 관점이 종교적이지 않은 모양새로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된 이 작품을 생각해 보려 한다.

 

소쩍

 

소쩍은 조선 제일의 무사다. 최고의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말타기를 제대로 배울 형편이 안 되어서 무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도와 도적질을 일삼고 관에서 보낸 이들을 상하게 만든 산적 무리 한복판으로 홀로 쳐들어가 그들을 제압하고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내려오면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현상금 사냥꾼이 되어 수많은 흉악범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외의 소쩍의 과거 행적과 내면의 상태는 진경의 호위 무사로 동행한 여행길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산 사람을 상대로는 누구도 무서울 것 없는 최강의 무사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못하다. 그가 죽인 사람들의 곡두1)가 그를 따라다닌다. 흉악범을 처단하는 일은 그 가족들의 원망과 여러 부수적 피해를 낳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기에 그냥 일로 끝나지 않고 깊은 충격과 상처를 남긴다, 죽은 자들이 주위를 맴돌고 그의 내면은 삭막하고 비참한 상태다. 사회를 어지럽히고 약자들을 괴롭히는 흉악범들을 처단한다는 명분이 그의 내면을 위로하지는 못한다.

 

최고의 현상금 사냥꾼으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을 것 같은데, 소쩍은 부유해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가 현상금으로 노비들을 면천시켜 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가 힘들게 번 돈으로 그런 ‘남 좋은 일’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내가 짐작하는 이유는 조금 후에 밝히기로 하겠다. 그런데 그가 목숨값으로 벌이는 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늘 아름다운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니다.

 

땅쇠

 

소쩍이가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선사한 사람 중에 땅쇠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소쩍이가 현상금으로 면천을 시켜준다는 얘기가 뜬소문이 아니었음을 몸소 체험한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된 것도 잠시, 얼마 후 그는 다시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간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소쩍은 참을 수가 없어서 기어이 땅쇠를 찾아가 묻는다.

 

“왜 다시 종이 됐습니까?” 땅쇠의 대답이 기가 막힌다.

 

“주인을 모시는 것은 익숙한데 내가 내 주인 노릇을 하려니까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서 무서워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굶고 헐벗다가 도둑질을 했고 숨어 있다가 잡혀서 배상할 능력이 없어서….”

 

땅쇠는 자유를 얻었지만 평생에 한 번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자유와 책임은 도저히 감당 못 할 짐에 불과했다. 그래서 땅쇠는 이렇게 단정적으로 대답한다.

 

“면천됐다 뿐이지 좋은 게 하나도 없었어요. 종살이하면 굶지는 않거든요.”

 

<소쩍이 운다>가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작품이었다면 소쩍이 덕분에 자유를 얻고 행복해진 사람의 이야기만 그려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우리는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막막한 일인지 잘 안다. 그래서 우리 중 상당수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고 책임져 주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고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 살아간다. 그러니 누구도 땅쇠의 선택을 함부로 조롱하거나 비웃을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자유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부터 자기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 자유라는 문제에서 그가 생각하는 인간 조건의 더 깊고 근본적인 문제로 곧장 들어간다. 소쩍은 땅쇠와의 일을 회상하며 진경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면에서 <소쩍이 운다> 전체를 관통한다고 볼 수 있는 주제가 이 대사에 담겨 있다.

 

“죽음은 두려움을 이용해서 오래전부터 인간을 노비로 삼아왔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종입니다.”

 

작가는 소쩍의 입을 빌려 땅쇠가 노비로 돌아간 결정의 근본적 원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유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쩍이 볼 때 땅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본질적으로 땅쇠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말이겠다. 이것이 소쩍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뛰어난 검술 솜씨를 갖고 있는 그는 죽음과 가장 먼 것 같지만 흉악범들을 상대하면서 죽음과 늘 가까이 있었고, 자신이 죽인 자들의 곡두로 형상화된 죄책감과 두려움, 영혼의 피폐함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 두려움, 종살이는 바로 소쩍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 그가 목숨의 위험을 무릅써가며 번 돈으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준 것은 인도주의적인 선택인 동시에 인생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그는 인생의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고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가 추구하는 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200필’이라는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웹툰 <소쩍이 운다> 포스터.

 

200필

 

300필의 현상금이 걸린 살인범을 자처하며 소쩍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소쩍에게 목을 들이대면서 자기를 죽이고 현상금을 받으라고, 다만 그중에서 일부(200필!)는 종이 된 누군가를 풀어주는 데 써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숱한 경험과 뛰어난 눈썰미를 가진 소쩍은 그가 범인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본다. 살인자를 사칭한 사람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소쩍은 진짜 살인범을 찾아내어 잡고 그 현상금 중 200필로 살인범을 사칭한 자의 소원을 들어준다. 나중에 진경은 소쩍을 따라가 살인범 행세를 했던 사람을 만나서 묻는다. 그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아니 ‘죽었던’ 남편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나요?”

 

남편 왈. “남의 집 종살이하는 아내가 불쌍하니까 뭐 두렵고 뭐고 그럴 겨를이 없었죠.”

 

죽었던 남자의 이 한마디에 무사가 웃는다. 진경은 무사가 그렇게 활짝 웃는 것을 그때 처음 본다. 무엇이 무사를 그렇게 환히 웃게 만들었을까?

 

소쩍은 그들 부부에게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힘과 자유가 만나는 사례를 발견했다. 소쩍의 대사를 떠올려보자. “죽음은 두려움을 이용해서 오래전부터 인간을 노비로 삼아왔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종입니다.” 이 작품은 죽음과 두려움에 매여 있는 현상금 사냥꾼 소쩍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자유를 얻을 길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무사는 아내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그 남편에게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렇기에 그 남편과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던 것이리라.

 

소쩍의 선택

 

그리고 마침내 소쩍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에게 막강한 도전자가 나타난 것이다. 상대는 관에 속한 무사다. 소쩍으로서는 싸울 이유도 없고, 싸워서도 안 되는 상대였다. 소쩍은 실력의 우위를 보여주는 정도에서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상대는 순순히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소쩍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그로 인해 곡두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 대결한 모든 상대를 이기고 목숨을 부지하고 뛰어난 무사로 인정받았지만 승리의 결과로 죽음보다 나을 것 없는 비참한 상태의 삶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거기까지였다. 소쩍은 그 상태에서 빠져나갈 자유의 길, 생명의 길을 계속 모색했던 반면, 도전자 무사는 탈출구가 없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기에 소쩍을 이용하기로 한다. 물론 소쩍이 자기보다 약하다면 최강자로서의 위치를 확인하고 직업적 관성으로 비참한 삶을 좀 더 이어갈 수도 있을 터였다. 어느 쪽이든 소쩍이 죽을 각오로 덤벼들어야 기대할 수 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소쩍은 그런 그의 놀이판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로서는 이겨도 져도 손해인, 절대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 도전이었다. 도전자는 애초에 소쩍의 처지 따위는 관심이 없다. 소쩍의 의향을 확인한 도전자는 진경을 끌어들인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그 여자를 죽이겠다. 선택해라. 소쩍은 말하자면 진경의 목숨이냐, 자신의 목숨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소쩍은 여기서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그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그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인가?

 

우리 삶의 선택 배후에 놓인 것

 

신약성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죽음은 두려움을 이용해서 오래전부터 인간을 노비로 삼아왔습니다”라는 소쩍의 대사를 듣고 히브리서 2:15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죽음을 겪으시고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새번역)이라는 말씀 말이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이 박흥용이라는 뛰어난 만화가의 손을 거쳐 구체적이고 생생한 생명력을 얻는다.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소쩍은 부부의 사랑이라는 구체적 사례 안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승리의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자신도 그저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사랑 때문에 죽음을 감수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는 데 주목하고 싶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옭아매는 ‘죽음의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는 것 자체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휘둘려 종처럼 매여 살아가는 것이 문제다. 예수님은 이 공포와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러 오셨고, 소쩍은 그 가능성을 한 남편에게서 보았으며, 자신도 그와 같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작품은 우리의 온갖 선택 밑바닥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묻게 만든다. 죽음의 두려움은 우리를 신중하게 만들고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여 겸손하게 만들고 똑같이 죽을 존재들에 대한 연민을 품게 만들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를 노예로 삼고 지독히 악한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 두려움에 빠진 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런 해방은 삶의 방식과 구체적인 결정 가운데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이 웹툰은 그것을 묻게 하고, 신자에게는 성경이 약속하는 바를 급진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아름다운 그림과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멋진 캐릭터들에게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1) 눈앞에 없는 사람이나 물건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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