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화 옆 당신의 슬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글_진느(조혜진 기윤실 청년위원)

 

화창하지만 햇살이 적당히 들어 따갑지 않은 날, 잔잔히 흐르는 강가 옆에 피크닉 매트가 깔려있다. 준비해 간 음식을 즐기며 편안한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더워지면 수영을 하고 지루해지면 근처를 산책하며 베리를 딴다.

널찍한 집 안 곳곳은 청결하고 살림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서랍과 옷장엔 취향의 옷과 화장품이 가득하다. 집 앞 정원엔 수확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채소와 허브들, 철마다 빛깔을 달리하는 들꽃들이 정렬해 있다. 한쪽엔 작지 않은 수영장이 있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동네 유원지가 되기도 한다. 주인을 잘 따르는 충직한 개와 영리한 말도 있다.

자연친화주의를 지향하는 자연인의 삶 혹은 목가적 화풍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타샤 튜더의 정원을 묘사한 글도 아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바로 옆에 위치했던 실존 인물 독일인 장교 루돌프 회스 가족들의 정경이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영화 평론가들이 연달아 고점을 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엔 힐링을 주는 아름다운 풍경이 가득하다.

영화는 3분가량의 암전과 기괴한 소리로 시작하는데, 많은 관객이 상영 파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항의가 많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쉽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는 감독의 고뇌와 먹먹한 감정이라고 이해되기도 하고 이후 보여줄 풍경과 장면들에서 소외된 진짜 주인공들에 대한 추모라고도 읽힌다.

긴 암전 뒤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화면은 밝은 호숫가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평화로운 장면으로 전환된다.

 

가족의 안락한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휴일엔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 감각적이고 섬세한 안목으로 집 안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살림을 꼼꼼히 챙기는 어머니, 그 안에서 마음껏 뛰놀며 건강하게 자라나는 자녀들. 딸이 풍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양에 감격해하는 친정어머니. 영화 속 악의 얼굴은 평범하며 나아가서 근면하기까지 하다. 배경지식이 없거나,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배경과 비명을 무시한다면, 이웃의 일상이자 모두가 꿈꾸는 삶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은 나쁘다. 유대인 학살에 동참하거나 침묵한 독일인도 나쁘다. 그 명제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 담장 너머의 행복은 소름 끼치게 잔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인간다움의 성정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절제된 평화로 마주하다 보면 ‘그 시절의 나치는 정말 고약했군’이라며 함께 손가락질하기보다 내 일상의 평화, 내가 만들고 지킨 경계 안의 행복에 묵직한 질문이 던져진다.

비신자인 어머니는 이제 막 20세가 된 내가 갑자기 종교에 열정을 갖게 된 일에 우려가 크셨다. 내가 속한 곳은 사이비가 아니라고 거듭 얘기했지만, 어머니에겐 신학적 건전함은 큰 상관 없었다. ‘자기들끼린 열정적으로 모이고 오만 것을 나누지만 전도 대상이 아닌 타인에겐 물 한 잔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라는 교인들에 대한 인상이 이유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자녀가 집단 이기주의에 함몰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감사히도 발을 잘 들인 덕에 내 주변엔 구제와 자선이니, 사회 참여니 해외 선교니, 교회 밖 삶에도 관심을 가진 믿음들이 많지만, 나는 어머니가 그 이기심의 인상을 어디에서 받으셨는지 공감한다.

역사와 타인이 나와 우리를 관객처럼 관망한다면 가족을 살뜰히 챙기고 친구에게 다정하고, 성도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고, 예배의 감격에 눈물지으며 만들어 낸 평화와 행복이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야기로 쓰일지 의문이 생긴다.

나는 기질적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감각이 발달했는데, 내 생각, 행위, 감정의 범주와 같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역부터 공동체적 소속감 같은 좀 더 공통의 영역까지. 옳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경계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장점은 정의에 대한 기준이 높은 편이라 불의한 일을 금방 찾아내서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고, 아쉬운 점은 세밀한 작업을 통해 구분한 경계이기 때문에 경계 안의 세상에선 관용적이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담장 너머에 사는 회스 가족에겐 밤낮 없이 들리는 비명이 들리지 않고, 허공 위로 솟구치는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 방문한 외지인 장모님에겐 그 소리와 매캐한 공기가 딸에게 인사도 못하고 떠날 만큼 생경하고 무서운 것이었지만. 고귀한 생명과 저마다 풍성한 서사가 있는 인생들이 바로 옆에서 하룻밤에도 몇천씩 사그라지는데, 회스 가족에겐 그저 강가에 떠내려오는 잿가루 유해 물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에게도 그렇게 눈앞에 존재하지만, 맹점이 되어버린 미미하게 스러져가는 인간성은 정말 없을까. 비명 지르고 있지만 이명처럼 퍼져나가 구분할 수 없게 된 타인의 슬픔이 없을까.

유명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해 ‘이미 다 소화해 버린 악에 대하여, 체온으로만 볼 수 있는 선에 관하여.’ 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소각 전의 유대인들에게 빼앗은 여성들의 쓸만한 아이템은 나치 장교의 부인들에게 먼저 배달된다. 티타임으로 모여 이런저런 가십거리를 나누며 패션과 뷰티를 논하는 모습이 여느 여성들과 다르지 않다. 회스의 부인은 반려견이 문을 열어달라고 낑낑대는 것도 무시하고 방문을 꼭꼭 닫고 서랍 속 감춰놓은 립스틱을 발라보거나 밍크코트를 걸치며, 눈에 띄게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지 않으려고 애도 쓰고. 하녀들에겐 속옷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며 자비도 베푼다. 인격적으로 사람들과 교제도 잘하고, 자랑을 감출 줄도 알고, 관용을 베풀 줄도 아는 교양이 온몸에 배어있다. 점잖다.

회스는 밤낮없이 일하는 헌신적이고 일 잘하는 근로자다. 조직의 목표를 토대로 성과 관리도 할 줄 알고 이행 관리도 잘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설립과 운영을 총괄하며 더 많은 유대인을 효과적으로 호송하고 소각하는 데에 남다른 공을 세웠다. 윗사람들에게 문안 인사도 잘하고,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전체 군의 흐름에 대한 이해도 남다르다. 승진이 빠르고, 좋은 자리를 보전할 줄 아는 성공의 향기가 난다. 타당하다.

철저히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것처럼 클로즈업이 거의 없는 카메라 뷰엔 독특한 미쟝센이 종종 등장한다.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하여, 물체나 사람의 형체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고, 집중해서 봐야만 행위를 겨우 짐작만 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원작인 소설엔 없는 내용이지만 감독이 자료 조사를 하다 알게 된 소녀의 이야기를 첨가한 것인데, 당시 아우슈비츠 근처에 살던 10대 소녀는 밤마다 유대인들에게 줄 선물을 숨겼다. 몰래 유대인이 지나는 길이나 노역 장소에 사과 같은 과일이나 희망의 노래를 적어 내린 악보, 용기를 주는 시를 적은 종이를 갖다 놓은 것이다.

어느새 몸의 일부가 되었거나 혹은 이미 배설해 버려 더 이상 책임을 지지 않게 되어버린 젠틀한 포장으로 감추어진 행복.

암행을 하느라 가쁜 숨소리가 따라오는 평화롭지 않은 카메라 워킹과 흑백으로 번져나가는 영화의 번외편과 같은 선행.

이 대비 속에 나의 집단과 생활 방식은 악을 다 소화해 버린 방식으로 교묘하게 악과 공존하고 있지 않은지 되묻고, 마음의 따뜻함으로 선함을 행했는지 돌이켜본다.

폴란드 여행을 했었다. 아우슈비츠 지역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가는 버스 티켓을 구매하며 행선지를 말할 때 독일어 발음인 ‘아우슈비츠’가 아닌 ‘오슈비엥침’이라는 폴란드어 단어를 사용했더니 티켓 판매원이 활짝 웃었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슬픈 이들의 편으로 기울어진 경계를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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