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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 이야기가 남성중심적 본문이라는 것이 결코 남자에게 어떤 신성한 권리나 특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이 여성 중심적이지 않다는 것도 여자의 종속적 위치를 인정하는 신성한 법령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남성중심적이지만 성차별주의적(sexist)이지는 않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구약성서의 수많은 이야기는 프린터기의 종이가 인쇄되듯 한순간에 적히지 않았다. 고대 이스라엘과 그 주변 세계에 오랫동안 전수되고 회람되고 숙성되다가, 지금의 신학적 메시지를 덧입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정되었다. 그래서 본문의 표면 그 아래에는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인간 정신의 경험이 마치 수맥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본문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누구인지도 드러낸다.

 

우리는 창세기 2-3장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으며 그 표면이 전달하는 신학적 교훈을 쉽게 파악한다. 인간이 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즉 에덴을 상실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기의 나무 열매를 먹었던 불순종이 원인이다. 이 신학적 메시지 말고도 본문은 인간이 가진 가장 실존적 질문에도 답한다.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고, 남녀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사람은 왜 죽는지, 남자는 왜 땀 흘려 일하고 여자는 배 아프게 아기를 낳는지.

 

읽기 가운데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본문의 심층 세계와도 소통한다. 본문 표면 아래에 있는 문학적 구조(structure)는 눈치도 못 채는 가운데 우리의 정신 깊은 곳과 대화를 한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에는 ‘남과 여’ 그리고 ‘안과 밖’의 구조가 내재하여 있는데, 인간과 사회의 정신 심연 속 흥미로운 세계를 조명해 준다. 에덴이라는 낙원을 중심으로 안과 밖이 존재한다. 이야기는 남자를 낙원 안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남자를 낙원 밖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마친다. 그 남자에게는 여자가 있는데 안과 밖의 역학 구성에 크게 관여한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 속에서 생겨난 만큼 남성 중심적이다. 이 본문을 두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정당한 목소리지만 역사적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고대의 본문인 에덴의 이야기가 남성 중심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적혔지만, 이 본문의 표면 조금 아래에만 내려가 보면 에덴동산 이야기를 남성 우월주의의 근거로 내세우는 해석이 얼마나 수준 낮은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남성 우월주의적 해석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남자의 일부에서 만들어지고, 남자에 의해 그 이름 하와가 지어졌으며, 여자가 남자의 타락에 책임 있으므로 그에 대한 심판으로 산통을 겪으며, 남자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신중히 읽어도, 이 이야기가 신묘하게도 양성평등의 가치를 지지함을 알 수 있다. 유아적 우월주의가 아닌 남녀의 ‘일체성’이 고대 가부장적 문헌인 이 본문 안에 심겨 있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자로 탄생했다. 더 열등하거나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존재임을 말한다. 그리고 동물은 흙에서 만들어졌지만, 여자는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진 유일한 존재로서 일체다. 그녀가 왔을 때, 남자는 그녀의 성(sexuality)을 알고 감탄했으며 일체가 되길 열망했다. 그가 남자라는 것, 그녀가 여자라는 성 구분은 이때 동시에 발생했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실질적으로 남자가 아니다. 뱀이 여자를 먼저 유혹한 것은 오히려 에덴동산의 진정한 안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남자는 여자의 행동을 순순히 따랐다. 남자를 먼저 유혹했다면 뱀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남자 말을 순순히 따랐을 리 없다. 하나님이 이들을 징벌할 때도 남자, 여자, 뱀 가운데 유일하게 여자만 ‘저주’받지 않았다(3:14-19).

 

에덴동산 이야기가 남성중심적 본문이라는 것이 결코 남자에게 어떤 신성한 권리나 특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이 여성 중심적이지 않다는 것도 여자의 종속적 위치를 인정하는 신성한 법령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남성중심적이지만 성차별주의적(sexist)이지는 않다.

 

안과 밖의 이야기를 보자. 낙원 안의 삶과 밖의 삶은 대조적이다. 안에서는 농경이 쉽다. 동물을 사육하거나 이용할 필요가 없다. 남자에게는 함께하는 여자 말고는 다른 사회가 없다. 성적 자각이나 생식은 없고, 사람은 불멸(?)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위험이 있다. 유혹하는 뱀, 금기의 나무 열매다. 낙원 밖은 안과 대조적이다. 농경은 힘들다. 동물을 사육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다. 다양하고 큰 사회가 존재했으며, 성적 자각과 생식에 기반하여 존재했다. 사람은 불멸의 길이 막혔다.

 

이 읽기에 따르면, 에덴 밖에서 남자는 여자와 함께 농경이라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존재다. 금기된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져, 벗은 것을 서로 부끄러워하는 에로티시즘을 경험하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죄의 결과로 밖의 환경은 척박하여 뼈 빠지게 일해야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저주 아래에서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그냥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헐거운 나뭇잎 대신 든든한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신 행위가 이를 상징한다. 그 결과 남자는 여자를 향한 연모와 욕구에 휘둘려 살아가게 되지만, 인생 최고의 기쁨과 희락을 얻게 된다. 수고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지만 남자는 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여자는 매우 복잡하게 묘사된다. 남자의 일부에서 만들어져, 동물과 남자 사이에는 없었던 동반 관계를 이룬다. 남자와 일체지만 여자는 독립적 행동을 추구했으며, 결국 둘은 낙원 밖에 처하게 된다. 여자도 남자를 욕구하며 말 그대로 아프게 희생하여 자녀를 낳고 양육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저주로 여기며 살지 않게 하셨다.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몸이 잉태한다는 것은 고통과 동시에 여자만 알 수 있는 행복이 되었다.

 

안과 밖의 이야기는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인간의 자각을 드러낸다. 인간은 상실한 낙원 안의 삶을 바라지만, 동시에 익숙한 낙원 밖 현실을 선호한다. 남녀가 성적 자각이 없이 산다면 서로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까? 마치 사춘기 이전 벌거벗고도 거리낌 없이 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번 알면 절대 놓을 수 없는 것이 이성에 관한 관심과 즐거움이다. 이것 때문에 지옥 불처럼 고통스러운 연애사를 겪어도 인간은 그 불구덩이에 또 몸을 던진다. 에덴의 편안함? 재미없다. 사랑과 욕망이 없다면 문학도 음악도 영화도 교과서만큼이나 지루할 것이다. 에덴에서처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사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이상은? 동물을 사냥하고 지배하고 고기 맛을 한번 보고 나면, 위험천만해도 인간은 모험을 즐긴다. 바벨탑을 쌓고 하늘에 닿으려고 할 만큼. 평생 한 사람만 보고 사는 에덴은 차라리 지옥이다. 자녀를 낳고 고생하면서 먹이고 키우는 그 헌신적인 사랑은 아파도 천국이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어도 이를 역행하여 자식을 낳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지 확인하는 것은 최고의 피학적 행복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혼에 자녀 없이 사는 분의 신성한 행복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해석은 성경이 다차원의 문헌으로서 고대에서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평온하고 먹고사는 것에 신경 쓸 일 없는 낙원 같은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인간의 꿈이겠지만, 첫 인간인 하와와 아담의 DNA를 물려받은 우리는 사실 낙원 안보다는 짜릿한 밖에서 살아가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 은혜 입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평안해도 인간에게서 불안감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에덴에도 위험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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