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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려는 건 결국 ‘돌봄’이다. 인간은 모두 ‘돌봄’이라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돌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경험이며, 편집자의 말처럼 ‘능력주의’와 정반대에 놓여있다. 돌봄은 능력과 상관없다. 돌봄의 실재는 하나같이 혼란과 실패다. 그렇기에 돌봄은 인간이 완벽할 수 없다는, 실로 나약하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돌봄은 언제든 서로에게 의존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돌봄의 자리에는 사랑과 연대 말고는 달리 필요한 것이 없다는 저자들의 말에 동의한다. (본문 중)
김보경(전 IVF 동서울지방회 간사)
정서경 외 | 『돌봄과 작업: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돌고래 | 2022. 12. 02. | 208쪽 | 16,500원
어느덧 30대가 된 나에게는 엄마가 된, 엄마가 되는 친구들이 생겼다. 소식과 축하를 나누는 임신 초기를 지나, 마침내 출산을 앞둔 친구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고민거리는 육아에 대한 것이다. 경험상 대부분의 친구는 육아에 대해 단순히 생각하지 않았다. 육아를 받은 당사자였던 우리는 부모의 헌신을 안다. 육아는 부모의 헌신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상처와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다. 20대 내내 일궈온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타협할 준비도 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이 책은 엄마이자 다양한 직업을 가진 11명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각기 다른 배경과 직업을 가진 이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 서로 다른 경험을 나눈다. 이들이 출산 후에 경험한 공통된 정서는 ‘정말이지 이런 건 줄 몰랐다’이다. 저자 중 한 사람은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임신 당시 어른들의 ‘낳으면 알아서 다 하게 된다’라는 식의 말이 알고 보니 저주였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일을 해야 했기에, 젖을 떼기 위해 사흘 동안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았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두고 도망치듯 출근해야 했던 상황을 말하며 자신이 출산 이후 몇 번이고 아이를 ‘버렸다’라고 말한다. 비건이었던 한 사람은 임신 중 호르몬 변화로 다시 육식을 하게 되고, 페미니스트는 출산 후 자기 안에서 혐오와 모순을 발견한다. 스스로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고,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때로는 속수무책으로 가지고 있던 것들을 빼앗긴다.
그럼에도 아이가 없었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적어도 이 책 안에는). ‘내가 죽고 아이를 낳는다’, ‘아이가 죽고 내가 산다’라는 두 가지 선택지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이를 선택한다(42쪽). 물론 임신과 출산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육아 또한 돌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여전히 충분하게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20대 초반이 되기까지, 엄마의 웃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엄마는 나에게 항상 무심했고, 차가웠다. 유년 시절에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커가면서 그 시도들이 엄마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는, 어떤 방향으로도 짐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온 힘을 기울여 가정과 육아에 헌신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진심으로 인정하지만. 분명 그때의 나는 엄마의 돌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이는 엄마에게도 실패의 경험이 됐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결혼과 육아가 삶을 절벽 끝으로 내몰았고, 한순간에 모든 행복을 빼앗았다.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저 웃을 일 없던 삶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분명한 행복과 웃음도, 그보다 더 선명했을 고단함과 외로움도, 마치 내가 겪은 일 같이 느껴져 목이 멘다. 엄마와의 관계의 역동은 내게 항상 난제였으나, 책을 통해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역동은 여전히 나를 돌보려는 엄마와, 엄마를 돌보고 싶은 내가 서로를 마주했기 때문에 생긴다. 엄마와 내가 서로를 가엾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엄마는 결코 후회하지 않지만, 돌봄의 대상인 나는, 엄마가 ‘엄마’나 ‘아내’이기 전에 ‘금숙’이길 언제나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엄마가 뒤늦게나마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진심으로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자신을 잃지 않고 나를 돌볼 수 있었다면, 그런 기적이 엄마에게 있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11명의 저자들이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 순도 높은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너무나 그러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에 놓인 양육자들의 깊은 고통과 어려움도 자연스레 이해된다. 돌봄은 사회적 책임이고, 양육자 또한 돌봄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양육자 본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쉽게 잊힌다.
우리가 하려는 건 결국 ‘돌봄’이다. 인간은 모두 ‘돌봄’이라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돌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경험이며, 편집자의 말처럼 ‘능력주의’와 정반대에 놓여있다. 돌봄은 능력과 상관없다. 돌봄의 실재는 하나같이 혼란과 실패다. 그렇기에 돌봄은 인간이 완벽할 수 없다는, 실로 나약하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돌봄은 언제든 서로에게 의존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돌봄의 자리에는 사랑과 연대 말고는 달리 필요한 것이 없다는 저자들의 말에 동의한다.
저자들은 가족이 아니어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사회를 꿈꾼다. 그런 열망으로 가정이라는 보편적인 돌봄의 영역 너머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실현해 내려고 애쓴다. 지금도 애쓰고 있을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설령 자신을 잃었다 하더라도 괜찮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좋을 만큼 한 대상을 사랑했으니까. 몇 번이고 그런 선택을 해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다시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고, 그때는 내가 돌봤던 대상이 응원과 도움을 퍼다 줄 것이라 믿는다.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기보다, 그저 돌봄의 형태로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더 깊이 이해해 보는 시도가 필요함을 배운다. 부모가 된, 그리고 될 친구들에게 걱정과 염려를 넘어 진실한 용기를 발견하기를 응원하고 싶다. 이 책이 모든 가정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돌봄의 자리에 있는 친구들에겐 위로와 용기가, 그들 곁에 있는 나와 같은 친구들에겐 배움이 되기엔 충분할 것 같다. 더 많은 사랑과 연대의 시작을 바라며, 누구에게 보다 나에게 먼저 강권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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