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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의 혼동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 혼동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다. 정치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신앙만의 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상대적인 활동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어떤 방법도 허용되며, 이는 이내 폭력으로 이어진다. 종교 근본주의가 그래서 위험하다.(본문 중)

 

권수경(일원동교회 담임목사)

 

2024년 10월 27일 주일에 서울 한복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다고 한다. 이름이 “악법 철폐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 찬양 페스티벌 & 큰 기도회”다.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자는 모임이다. 주체는 교회다. 목사들이 앞장서고 교회들이 참여한다. 몇몇 교단은 총회 결의로 동참한다. 행사 내용은 예배와 찬양과 기도회다. 한 마디로 기독교인들이 모여 갖는 종교 행사다. 그런데 목표가 악법 철폐다. 법을 만들고 없애는 것은 정치 행위다. 그렇게 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번 행사는 정치 활동이다. 종교와 정치가 뒤엉켰다. 형식은 종교인데 내용은 정치다. 10월 27일 행사는 한 마디로 정치적 목표를 가진 종교 행사다.

 

종교와 정치를 잘 구분해야 한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그건 짧은 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 영역 주권 원리도 그렇고 그 원리의 현장 적용은 더 간단치 않다. 이번 행사가 주일 낮에 치러지는 까닭에 주일의 의미, 예배의 가치, 교회와 정부, 이념의 우상화 등 논란이 될 만한 부분도 많다. 그런데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신앙과 정치의 혼동이다. 둘의 관계가 아무리 복잡해도 구분은 필요하다. 큰 줄기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정치는 소중하다. 그리스도인도 시민이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는 참정권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스도인도 정치를 한다. 정당에 가입할 수 있고, 투표도 하고, 공직에 선출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모여 정당을 만들 수 있고,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 목표와 방법에서 성경적 가치를 아름답게 구현할 수 있다. 반성경적 법안에 대해 반대 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주일과 예배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주일 낮에 서울 한복판에 모여 정치적 운동도 얼마든지 벌일 수 있다. 다만, 그런 행위들이 정치인만큼, 정치의 원리와 방법을 따라야 한다. 정치 영역의 핵심 원칙은 투표를 통한 다수결의 원칙이다. 서로 겨루어 호응을 더 받은 쪽이 권력을 쥐고, 법도 만들고, 집행도 한다. 소수는 언제나 다수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이며, 이 원리를 거부하면 폭력이 되고 공동체는 혼란에 빠진다.

 

종교와 정치, 둘은 다르다. 종교는 절대적이고 정치는 상대적이다. 동성혼이 죄라고 믿고 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한다. 동성혼을 반대하고 합법화를 막는 운동은 정치 행위다. 찬성과 반대부터 정치적 개념이다. 상대적이기에 밀고 당기고 한다. 정치에서 칼은 애초에 집에 두고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신앙으로 하므로 정치 활동 역시 신앙의 구현이다. 투표하기 전에 기도하고, 믿음에 따라 표를 던진다. 그런데 내가 믿음으로 참여하는 그 행위가 사회에서는 정치적 활동이 된다. 내 절대적 결정이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만 수용된다. 이 점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내가 신앙에 따라 정치 활동을 하듯, 남들도 불교, 이슬람교, 미신, 무신론, 유물론, 범신론, 회의론 등 자신의 신앙에 따라 활동한다. 우리와 달리 신앙이 절대가 아닌 이들도 있겠지만, 정치 현장에서는 모두가 똑같다. 정치적으로 공존하는 관계이므로, 합의된 목표, 원리, 방법을 함께 존중해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동성 결혼 찬반 투표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반대표를 던졌다. 신앙에 따라 정치 활동을 한 것이다. 나는 신앙으로 투표했는데 동성 결혼은 합법이 되었다. 정치적 결과가 나온 이유는 내 투표부터 이미 정치였기 때문이다. 신앙으로 투표했다고 정치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 신앙으로 그치려면 밖으로 나가지 말고 우리끼리 해야 한다. 우리가 모여서 하는 예배, 기도, 찬양 그 어느 것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며 공적인 장소에 다수가 모이기로 했으므로 당연히 정치적 행사다. 10월 27일 행사가 정치 활동이 아닐 방법은 없다. 교회가 신앙으로 행한다고 해서 정치가 무정치, 초정치가 되지 않는다.

 

이번 행사의 의미는 성경의 절대적 가치를 상대적인 정치 현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적인 자리로 가지고 온다면 그 자리에 맞는 원리와 방법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찬성 아니면 반대다. 표를 더 많이 얻은 쪽이 이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낙태는 살인이라 믿지만, 정치 현장에서는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인다. 낙태가 살인이 아니라 믿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악법 철폐나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은, 혹 그 악법이 통과되어도 그대로 따르겠다는 약속이다. 동성 배우자에게 세금 혜택, 보험 혜택을 주고, 자녀 입양을 하게 해도 수용하겠다는 뜻이다. 그게 정치다. 그게 우리가 벌이는 반대 ‘운동’에 담긴 뜻이다.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내 뜻대로 안 됐다고 판을 엎을 생각이라면, 애초에 반대 운동도, 그런 정치적 뜻을 담은 집회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와 종교의 혼동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 혼동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다. 정치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신앙만의 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상대적인 활동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어떤 방법도 허용되며, 이는 이내 폭력으로 이어진다. 종교 근본주의가 그래서 위험하다. 낙태를 죄라 믿는 사람이 낙태 반대 자체를 신앙적 목표로 삼으면, 낙태 클리닉 운영자를 살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인류 역사에 있었던 가장 크고 잔인한 전쟁이 종교 전쟁인데, 그 대부분이 정치를 신앙과 혼동하여 절대화했기 때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탄절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찬양하는 우리가 정치를 신앙과 혼동하여 그 평화를 깨뜨리는 주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행사를 두고 찬반 논란이 거세다. 모처럼 접해 보는 성숙한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 생각을 개진하고 사람들의 의견도 청취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도덕적 타락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 순수한 열정은 참으로 귀하다. 그와 더불어 그 열정의 표현 방식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과 비판에 대해서도 귀를 열어야 한다. 상대를 마귀로 몰아 버리면 마귀만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우리는 몇천, 몇백만 남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교회를 위한다면, 정죄하거나 싸우지 말고 진지하게 논의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는가. 찬‧반을 기준으로 편을 갈라 서로 적대시하는 일은 마귀에게 부전승을 안겨 주는 일이다.

 

이번 활동이 정치 행위임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앙이라면 목숨을 걸겠지만, 정치라면 목숨을 거는 대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정치는 수 싸움이다.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냉철한 지혜가 필요하다. 흥분하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낙태 반대를 분노를 담아 외치다가 혐오를 부르면 낙태 합법화를 돕게 되고, 태아를 살리자는 운동을 하다가 태아를 죽이게 된다.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사랑으로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일 뿐이다. 이백만 명을 모으겠다고 하는데 한국 교회 성도를 다 모아도 천만이다. 전체 유권자의 반의반도 안 된다. 악법을 막거나 없애는 일은 다수의 국민이 동의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통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이 정치권이다.

 

이번 집회는 불신자들의 호응을 얻기에 도움이 되는 모임인가? 아니면 섣부른 정치 행동으로 상대편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는가? 교회가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성경이 가르치는 온유와 두려움을 구현하고 있는가? 교회가 사회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대규모 집회가 국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건축 비용을 따져 보았는가? 양쪽의 군사 수는 헤아려 보았는가? 이런 세상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각오로 모였다가 오히려 그런 세상을 조기 상속하는 비극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이번 집회는 대한민국에서 동성혼 논의를 공적으로 벌이는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교회가 공론의 판을 깔아 주었으니 정치권도 금방 호응할 것이고 논의의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세상은 교회만큼 동성애를 거부하지 않는다. 교회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다수를 설득해 악법을 막을 준비는? 아니면 법안이 통과될 경우를 대비한 준비라도? 그런 준비에 대해 들어본 일이 없어 심히 두렵다. 이 행사를 신앙 집회로 오해하고, 행사의 정치적 함의를 생각지 않고, 열정 하나를 너무 앞세워 무모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 같아 글을 쓰는 지금도 손이 덜덜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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