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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불편했던 것은, 경연에서 이긴 참가자에게 판정의 결과를 안내하며 사용했던 “생존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이었다. 경연에서 이겼을 경우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표현으로는 “합격하셨습니다” 혹은 “통과하셨습니다” 등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생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으로부터의 생존인가? 이는 <흑백요리사>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 (본문 중)

 

이민형(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교수)

 

흑백요리사

 

오랜만에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오직 먹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먹방 콘텐츠에 질려가고 있던 요즈음, 수준 높은 셰프들의 창의적인 요리를 통해 상상력과 미각을 자극해 줄 프로그램이 방영된다는 것이다. 낯선 여행지에서도 맛집부터 찾는 유일한 민족, 먹거리에 진심인 우리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방영이 시작되자, 너도나도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유명 OTT 플랫폼의 오리지널 프로그램인 만큼 넉넉한 제작비를 기반으로 상당히 높은 품질의 요리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는 평도 있었다. 여간해서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업로드되기 전까지 OTT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편인데, 내면에 쌓여있던 좋은 요리 프로그램에 대한 목마름 탓인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칭찬 일색의 평가에 묘하게 뒤틀린 마음이 동해서인지, 나 역시도 완결이 되지 않은 프로그램의 시청을 시작했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역시는 역시 역시다 싶었다. 무엇보다 출연자들 대부분이 오랜 경력으로 다져진 상당한 내공을 가진 요리사들이었다. 그들은 차분하게 자신의 실력을 뽐내며, 프로의 경연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의 실력을 비교하기 위한 경연 내용이나 주제도 흥미로웠다. 다양한 조건과 형식을 갖춘 미션은 참가자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에 적절했고, 경연 과정에서 벌어진 참가자들 사이의 긴장은 프로그램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적어도 전반부 에피소드에서는 그랬다.) 심사 위원으로 출연한 두 사람 역시 프로들의 요리를 평가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대한민국 요식업의 정점에 올라있지만, 사업 수완뿐 아니라 음식에 대한 지식 또한 대한민국 최고라 할 수 있는 심사 위원과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단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받은 셰프이면서도 결코 거만하지 않은 심사 위원. 이 둘은 비록 음식을 평가하는 관점은 달랐지만, 그 둘이 합쳐져 오히려 음식에 대한 깊은 평가를 내린다는 점에서 엄청난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흑백요리사>는 경연 중간에 일반인 판정단을 대거 투입하여 대중의 입맛과 전문가의 미각 모두를 만족시킬 음식을 판단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이 둘을 모두 만족시키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최고의 셰프라는 프로그램의 취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흑백요리사>는 지금까지 공개된 요리 경연 프로그램 중에서는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포스터. ⓒNETFLIX

 

요리 계급 전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청을 마치고 가만히 앉아 대다수의 사람들이 편하게 즐기는 이 프로그램을 왜 나는 불편해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는데,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역시 프로그램 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부제는 “요리 계급 전쟁”이다. “계급”이라는 표현에 매우 민감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저 표현을 “전쟁”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한 점이 불편했다. 사실 <흑백요리사>는 초반의 한, 두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계급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이라는 것도 매우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주방에서 사용하는 직급, 즉, 특정 사회에서 공인한 계급과도 큰 연관이 없다. 이 프로그램에서의 계급은 잘 알려진 셰프와 그렇지 않은 셰프를 나누는 기준일 뿐이다. 유명세를 놓고 전쟁을 벌인다는 매우 상식적이지 않은 제목부터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사람은 시청자의 마음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있었겠다 싶다.

 

이러한 불편함은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더욱 심해진다. 프로그램의 초반 잘 알려진 셰프와 그렇지 않은 셰프를 나누는 명칭인 “백수저”와 “흑수저”가 그 이유다. 누가 봐도 한국 사회에서 한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수저 계급론”의 그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이쯤 되면 앞서 언급한 “계급,” “전쟁”과 같은 표현도 “흑수저”와 더불어 이 프로그램의 노이즈 마케팅을 의도한 결과라고 판단할 수 있다. 다만 의아했던 것은, 이 부분에 불편함을 표현한 시청자들이 의외로 적었다는 점이다. 예능을 예능으로만 소비하자는 의지의 반영인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논란이 될 만한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프로그램을 제작할 이유가 있을까를 묻는 것이 책임 있는 시청자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기실 저런 표현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는 것인데, 이에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이미 “계급론”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마저 든다.

 

또 하나 불편했던 것은, 경연에서 이긴 참가자에게 판정의 결과를 안내하며 사용했던 “생존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이었다. 경연에서 이겼을 경우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표현으로는 “합격하셨습니다” 혹은 “통과하셨습니다” 등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생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으로부터의 생존인가? 이는 <흑백요리사>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 서바이벌 예능을 표방하는 <흑백요리사>는 고용을 목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오디션이나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선보이는 경연과는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비록 여러 감동 포인트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프로그램은 승자독식의 논리에 맞게 경쟁과 승리, 생존만을 목적으로 한다. [후반부 에피소드로 갈수록 이러한 성향은 강해진다. 팀전(팀 경쟁)과 방출은 이 프로그램이 철저하게 서바이벌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그 결을 같이 한다. 아닌 듯 포장해 놓았지만, 냉정한 경쟁과 철저한 생존만이 삶의 지혜로 여겨지는 사회 말이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여러 참가자들은 요리에 대한 자신의 진심과 실력을 보여 주기 위해 대결에서 승리하겠다는 포부를 인터뷰를 통해 지속적으로 밝힌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대결에서 이겨야만 그들의 실력과 진심을 볼 수 있다는, 아니 세상이 그들의 실력과 진심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경쟁이 당연한 조건인 사회에서는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기 위해 타인을 이겨야 한다는 논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통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 소름 돋는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흑백요리사>는 요리를 만드는 과정이나 요리에 대한 설명보다는 요리를 통한 “경쟁”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100인의 참가자에서 시작하는 경연 대회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편집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요리를 하는 짧은 순간마저도, 완성된 자신의 요리조차도 화면에 비추지 못한 참가자들도 있다. 그들은 경쟁에서 졌고, 생존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실력과 진심을 드러낼 기회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을 보며 갑갑함을 느꼈던 것은 결국 미디어에 의해 재현된 우리의 현실, 즉 지독한 경쟁 사회 속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마치 그것이 자신을 입증하는 길인 양 피와 땀을 갈아 넣는 참가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우리네 삶과 결코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 누군가와 이러한 불편함을 나눌 수 있을까 싶어 소셜 미디어를 살펴보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탈락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참가자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각 식당의 정보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굳건하게 쌓아 올린 계급 경쟁의 논리를 또 다른 미디어가 파괴하고 있다. 진정한 언더독의 반란이 흑/백으로 나뉜 요리사들이 아닌 이들을 지켜보는 이들에게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며 간신히 숨을 돌리게 되었다.

 

<흑백요리사>를 보는 내내 오롯이 미식의 세계에 빠지지 못하고, 도리어 우리네 현실의 또 다른 모습에 시달리고 나니, 속이 더 헛헛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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