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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을 전하자는데 어떤 기독교인이 반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데, 교회를 확장하자는 십자군 운동에 대해서 국민/시민들은 외면했다. 뜻있는 애국지사 교인들은 조용하지만 비판적 태도로 임했다. 교회의 대세가 전도 캠페인이요, 100만, 100만이라는 구호에 그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그들 일부는 한국을 떠나 만주로 가거나 미국으로 떠났다. (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1. 이승만의 옥중 서신(1903) 입장에서

 

120년 전 청년 이승만은 광화문 종로에서 정치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인도하며 청년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음모에 휘말려 종신형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다행히 감옥 행정 개혁으로 전옥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전도하며 신문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그 가운데 “두 가지 편벽됨”이라는 글은 당시 그리스도인이 가진 두 가지 확증 편향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두 가지 극단은 1) 정치로 만사를 해결하겠다는 정치 진보주의자의 개혁 조급증과 2) 교회 일에 치중하는 보수적인 개인 구원 중심의 각자도생 신앙이었다. 이승만은 사회 변화는 집회를 통해 일시에 해결되지도 않고, 한번 그렇게 된 것처럼 보여도, 정치가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도루묵이 되고 만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교회가 교화를 통해 사람을 바꾸고, 바뀐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점진적 개혁을 추구해야지, 세력 과시나 정치적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말한다. 교회는 정치하는 집단이 아니다.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이 맑다. 위에서 아래로(top-down)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bottom-up)이다. 시민을 교화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 후에라야 정부도 맑아진다. 정권을 바꾸어도 변하는 게 없는 이유는 섬기는 좋은 정치가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사람을 만드는 교회야말로 정치와 정부의 근원이다. 이 근본적인 일을 교회가 포기할 이유가 없다. 교회의 아랫물은 섬기는 종인 목사다. 목사가 맑으면 교인이 맑아지고, 교회가 맑아야 정치가 맑아진다. 아랫물에서 표절하고, 세습하고, 횡령하고, 간음하면, 큰 기도회가 아니라 큰 청소를 하고, 새 물길을 끌어와서 물갈이해야 한다.

 

2. 언더우드와 백만명구령운동(1909-1910) 입장에서

 

이번 10월 27일 집회보다 더 크고 더 전국적이고 더 장기적인 집회 운동인 백만명구령운동(Million Souls Movement)이 1909-1910년에 일어났다. 국운이 기울고 위기가 닥치자 20만 명의 신도가 일어나 1년 안에 100만 명을 구원하여 기독교 국가를 만들자는 야심 찬 거국적 운동을 진행했다. 구호도 만들고, 노래도 만들고, 포스터에 신문 광고도 하고, 국내외 유명 부흥 강사를 동원하여 대규모 집회도 하고, 전국 각지에서 70만 부의 마가복음을 배포하며 전도 캠페인을 했다. 기도와 성경과 개인 전도로 이루어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운동이었기에 반대하는 이도 적었다. 서울에서는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지도 아래 1910년 10월 한 달간 대규모 전도 집회를 집중적으로 개최했다.

 

1910년 10월 서울의 모든 선교사와 목회자가 연합하여 대규모 전도 대회를 열고 유명 강사들이 설교했다. 그 전에 여름 동안 권서와 전도부인들이 서울의 모든 가정을 방문하고 전도지를 주고 마가복음을 전했다. 모든 극장과 오락장의 저녁 시간을 빌려 전도했다. 4,000명을 수용하는 천막 두 개를 설치하고 대중 전도 집회를 연속적으로 개최했다. 한 달 동안 ‘사탄’의 세력을 타격했다. 포스트와 전단을 붙이고 뿌렸다. 6개 일간 신문에 매일 전도 광고를 실었다. 한 달 동안 서울의 모든 가정을 두 번 더 방문하고 전도했다. 다른 도시에서는 11월에 서울을 따라 비슷한 방법으로 전도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대구의 경우 10일간 사경회를 통해 500명이 결단했으나 집회 후에 교회에 나온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 북장로회 전체로 보면 1910년 9월 보고에서 1년간 세례 교인은 25,057명에서 32,509명으로 30%가 성장했으나, 학습 교인은 23,885명에서 26,981명으로 약간 증가했고, 1911년 9월에는 오히려 25,948명으로 감소했다. 전체 교인은 1909년 96,443명에서 1910년 110,362명으로 약간 증가했으나, 1911년 108,470명으로 감소했다. 사상 첫 감소였다. 한국 개신교 전체 절반을 차지하던 북장로회의 통계이다. 다른 선교회/교단은 성적이 더 나빴다. 100만 명이 아닌 10만 명도 구원하지 못했다. 인구 증가를 고려하면 교세는 인구의 자연 증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숫자 면이나 사회적 인식 측면에서 백만명구령운동은 실패했다.

 

Horace Grant Underwood ⓒwikipedia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을 전하자는데 어떤 기독교인이 반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데, 교회를 확장하자는 십자군 운동에 대해서 국민/시민들은 외면했다. 뜻있는 애국지사 교인들은 조용하지만 비판적 태도로 임했다. 교회의 대세가 전도 캠페인이요, 100만, 100만이라는 구호에 그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그들 일부는 한국을 떠나 만주로 가거나 미국으로 떠났다.

 

114년 후, 다시 10월에 서울에서 대규모 개신교 집회가 열린다. 그때와 성격은 다르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신교인들이 대규모 집회를 통해서 “나라를 바꾸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교회의 뜻을 관철하려는 자세는 동일하다. 일부 목사의 뜻이 주님의 뜻이 아닐 때가 많다. 모임 주도자들은 이 집회가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정당화한다. 114년 전의 집회와 운동에 비해 초라하고 명분도 약하고 인위적이지만, 대단한 모임으로 자찬한다. 인위적 모임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칭하는 제2계명을 범한다.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하여 십계명의 1계명을 범하고 청년 교회의 순결과 거룩성을 훼손했다면, 2024년 10‧27 집회는 늙어버린 노인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부르는 치매 현상을 보이면서 교회의 지성과 영성을 훼손하고 있다. 신사 참배 결의 총회와 다를 바 없는 모임이 10‧27 집회다.

 

다윗은 늙었을 때 인구 조사를 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람의 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마치 하나님이 지시한 것처럼 표현한다. 사무엘하 24장 1절, “주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 ‘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 하나님이 인구 조사를 지시하거나 허락한 것이 아니라,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 지금도 동일하다. 한국 교회 보수 교단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세력과 힘을 믿고 밀어붙이려고 하자, “그래, 어디 한번 해 보거라”라고 진노 중에 부추기신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이번 집회 표어 말씀이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주변 국가의 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왕으로 삼고 왕국을 세웠다. 그것이 당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했던 본의였다. 이제 한국 교회 일부 교단과 목사들도 교세가 약해지고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교회 힘으로 악법을 저지하자며 교회와 나라를 개악하려고 한다.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방법은 숫자나 규모나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페트(S. A. Moffett) 목사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전도와 교회 성장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붙잡은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였다. 성경에 단 한 번 ‘데모’(나타나심)가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가 할 데모는 성령의 능력의 데모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유한하고 바뀌고 오류가 뒤따른다. 언더우드처럼 앞일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하는 집회는 비복음적이다.

 

바로 스가랴 4장 6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1907년 대부흥 때는 스가랴 4장 6절을 붙잡았다. 비록 계획한 부흥 운동이었으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었기에 대부흥이 가능했다.

 

그러나 1910년 선교사들과 목사들과 교회가 주도한 백만명구령운동은 실패했다. 그 운동을 주도했던 언더우드가 오늘 살아 있다면 무슨 경험담을 전해 줄까? “한국 목사들이여, 정신 차리시오. 지금 당신들이 정말 나라를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한다면, 대규모 집회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들을 돌아보고, 지난 20년간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 앞에 저지른 죄악을 하나님 앞과 사회 앞에서 회개하고, 교회 개혁에 매진하시오. 한국 사회에 문제가 얼마나 많고 중요한 의제가 많은데, 과연 차별금지법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교회가 망하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골방에서 기도하시오. 대규모 집회 후에는 교인 감소가 올 것이니 대비하시오”라고 말하지 않을까?

 

3. 한경직 설교: “신앙생활과 절제”(1955)의 입장에서

 

설교 본문은 고린도전서 9장 25절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절제는 믿음의 7개 항목 제일 위에, 성령의 열매 제일 마지막에 붙어 있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절제가 없는 목사나 신자는 불신앙하는 자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한경직 목사는 생활 전반에서 절제하라고 권한다. 그 중에 하나가 말, 언어이다. 한 목사는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절제하고 적게 하도록 힘써야 우리 신앙생활에 실수가 적을 것입니다.”라고 권한다.

 

그런데 10‧27 집회를 주도하는 한 목사는 집회를 반대하는 성도들을 바퀴벌레, 사탄, 친일파 이완용이라고 한다. 빨갱이, 신사 참배보다 열 배나 무서운 죄를 범하는 자들로 비판한다. 이는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스탈린이 사용하던 어투요 수사법이다. “유대인은 이와 같아 발진 티푸스를 일으킨다. 반면 독일인은 깨끗하고 순수하고 건강하고 해충이 없다.” 히틀러의 말이다. 스탈린도 반대자들을 향해, 벌레, 오염, 오물 등이라 칭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불렀다.

 

오늘 왜 기독교 복음주의, 보수주의가 쇠퇴하는가? 그들의 언어에 증오와 미움과 더러움이 가득하고, 사랑, 온유, 청결이 없기 때문이다. 10‧27 집회 때 설교자들이 권력자와 약자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들의 실상을 알 수 있다. 마음에 있는 것이 혀를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한경직 목사는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생활은 “나만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기 위해서 삽니다”라고 하면서 공생을 강조한다. 나만, 교회만, 보수 교회만 살기 위해서 몸을 던져 불사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절제를 통한 공감, 공생의 삶이 서로를 살리는 길임을 강조했다.

 

4. 지난 20년의 역사에서

 

과거에 보수 신앙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예수 천당”의 피안적 태도로 있다가 1970년대 이후 잘살게 되면서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개인주의와 현실주의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 3‧1절을 기점으로 시청 광장과 광화문 광장에 모여 반정부 집회에 열정을 쏟았다. 과거 사회 참여에 미온했던 콤플렉스를 해결하고자 진보주의자들이 독점하던 공적 광장에 나와 현실 참여의 명분으로 교회의 힘을 과시하며 정치 세력화했다. 그 30년의 정치 참여가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 문재인 정권 반대 집회, 기독자유민주당 집회, 전광훈 목사의 태극기 부대 집회 등으로 강화되면서 타락했다. 묘하게도 이런 정치 집회를 하자, 2005년부터 교회 성장은 멈추었고, 10년간의 정체기를 지나 2015년부터 급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힘을 엉뚱하게 쓴 결과 잃어버린 20년 동안 교회는 표절하고, 세습하고, 횡령하고, 성범죄를 저지르며, 가나안 성도 300만 명을 양산했다.

 

5. 종교개혁 주일 입장에서

 

교회가 정치 집회를 열고 아직 상정되지도 않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와 투표를 통한 다수결주의와 삼권 분립으로 운영된다. 교회는 초법적 단체가 아니다. 정치와 법에서는 여론도 중요하다. 기사연 2022년 1월 인식 조사에 따르면 차별금지법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은 2/3 이상이 찬성하고, 개신교인의 경우 42.4% 찬성, 31.5% 반대, 26.1%가 판단을 유보했다. 지금 조사하면 개신교인의 절반이 찬성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법에 대해 한국 개신교회가 악법이라고 규정하고 대형 집회를 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며, 표를 잃는 악수이다. 법 개정을 위해 지지하는 후보를 국회로 보내거나, 교육청이나 정부나 법원으로 보내려면 다양한 노력과 전략이 필요하다. LGBTQ 교육 정책에 반대한다면 전문가 집단, 학부모 집단, 정치가 집단을 조직해서 활동하고 여론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나 동성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런 운동을 조직하고 지원하고 참여하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 집회, 음모론에 기초한 연설은 청중이 외면한다. 이미 언론은 서울 시내 주말 대형 정치 집회를 지옥 집회로 규정하고 피로감을 호소했다. 주말에 서울 시내를 평화롭게 걷고 싶은 시민의 도보 통행권을 무시하는 짜증 집회가 될 것이다. 그러면 표는 떨어지고, 이후엔 반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종교개혁 주일에 묵상하고 실천할 중요한 주제는 많다. 루터가 내세운 “오직 믿음”은 인간론으로 하나님 앞에서만 책임을 지는 단독자를 세운다. “오직 성경”은 교회론으로 기업화된 사적 교회를 그리스도 중심의 공적 교회 공동체로 회복한다. “만인 목회자설”은 목회론으로 가부장적이고 목사 중심인 목회를 개혁한다. “두 왕국론”은 정교일치와 국가주의에 매몰된 교회를 개혁한다. 루터의 디아코니아 실천을 통해 맘몬주의에 빠진 교회를 사회 신용과 사회 자본을 쌓는 교회로 개혁한다. 이런 심각하고 당면한 주제를 외면해 왔기에 한국교회는 급쇠퇴하고 있다. 과연 동성애 문제가 이런 문제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가?

 

10월 27일 집회는 손현보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그 전후가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그의 기대와 반대로, 그 집회는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쇠퇴의 내리막길에 가속도가 붙을 것인가, 아니면 집회 실패로 민주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 남느냐가 판가름 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주최 측의 계획대로라면 전자로 가는 지름길이 열린다.

 

대형 교회가 대형 정치 집회 동원에 돈과 인력을 낭비하는 대신, 현안을 폭넓게 연구하는 연구자를 지원하고, 토론의 장을 만들고, 교회의 입장을 시민에게 설득하는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하고, 좋은 기독교인 정치가를 기르는 프로그램을 지원해야 한다. 과거엔 목소리가 크면 이겼으나, 이제는 게임의 법칙이 변했다. 아니, 언제나 기독교가 일하는 법칙은 폭력이 아니라 겸손이며, 세력이 아니라 희생이며, 선동적 구호가 아니라 이성적 실천이며, 이익을 취하는 강압이 아니라, 손해를 보는 사랑이다. 한국 교회가 이것을 잃어버리고 로잔 대회의 기본적인 서울 선언에 대해서도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며, 종교개혁 주일에 반동성애 정치 집회를 계획하자, 하나님은 노벨상 아카데미를 통해,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한국 교회에 경고 메시지를 주기 위해 한강에게 문학상을 주었다. 한강의 글처럼, 폭력을 행한 자들의 불의를 드러내고, 힘을 과시하는 자들에게 상처를 입은 피해자와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고, 사랑하는 인류애의 비전을 제시할 때, 교회는 소외된 자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힐링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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