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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열정을 품고 운동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이면, 필요한 재정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돈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면 뭔가 돌아가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일으킬 수 있지만 이내 그 동력은 돈과 함께 사라진다. 로잔이 운동이 되려면 진정성 있는 사람들과 건전한 방향성 제시가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결합이 매우 취약해 보였다. (본문 중)

 

김종호[화해포럼 나리(NARI) 대표]

 

제4차 로잔대회(2024/9/22-28)가 인천 송도에서 열렸다. 74년 첫 대회가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이후 꼭 50년 만에 한국으로 왔고, 마닐라(1989년), 케이프타운(2010년) 대회와 달리 한국 교회가 재정 대부분을 책임질 만큼 한국 교회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확인된 대회였다. 그런데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대회장 앞에는 로잔의 ‘신학적 자유주의, 동성애에 대한 모호한 입장’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시위대가 있었다. 그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다 싶었는데, 사실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빨간 십자가를 들고 캠퍼스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다니던 동문 선배였다.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80년대 말에 내 입에서 로잔 얘기를 처음 들었단다. ‘뭔가 대단한 희망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더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정작 이번 로잔 대회 현장에서의 내 정서와 과거의 내 모습 사이의 거리감 때문에 아이러니를 느꼈다. 과거의 내 모습이 이 시위대가 로잔 대회 앞에 모이게 된 원인(遠因)이 된 것은 아닐까 하여 살짝 미안함도 밀려왔다.

 

로잔은 이벤트가 아니라 운동이다. 운동에 동력이 생기려면 같은 꿈과 열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연결되어야 하고, 방향을 제시할 문서가 나와야 한다. 운동에도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돈 때문에 운동이 생기는 건 아니다. 순수한 열정을 품고 운동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이면, 필요한 재정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돈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면 뭔가 돌아가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일으킬 수 있지만 이내 그 동력은 돈과 함께 사라진다. 로잔이 운동이 되려면 진정성 있는 사람들과 건전한 방향성 제시가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결합이 매우 취약해 보였다.

 

첫 번째 유감은 방향 제시의 결핍을 보여준 서울 선언문의 내용이었다. 전 세계 복음주의자 수천 명이 모인 대회에서 남기게 된 핵심 문서의 내용치고는 너무 실망스러웠고, 이것이 복음주의의 미래 방향을 제시할 대표적인 목소리가 된다는 게 동의가 안 되었다. 로잔 대회의 문서가 아니라 어떤 교단 총회의 문서 같은 느낌이었다. 코로나 이후 주일 성수는 크게 흔들렸고 교회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은 데다, 세속화와 상대주의 등의 위협을 겪으며 목회자들이 갖게 된 위기의식이 선언문에서 엿보였다. 실제로 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여러 명의 기고자들은 자신들의 원고가 나중에 선언문에 담겨 나온 걸 보면서, ‘내가 쓴 원고와 너무 달라 서울 선언문이 우리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했고, 그중에는 선언문의 개정을 요청하는 공개서한에 서명한 사람도 있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은 도구일 뿐인데, 교회가 선교를 비롯한 모든 것의 중심이 되길 바라는 기대감이 읽혔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 전체를 향한 선교적 부르심이 매우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가슴 설레고 영광스러운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방어적인 문서가 나오고 말았다. 선언문이 동성애 이슈만 집중해 다루는 동안 전 세계의 교회가 주목해야 할 창조 세계 돌봄, 일터 사역, 전쟁과 폭력 등의 긴급한 이슈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회 기간 중에 65명이 급히 모여 의견을 수렴하고 총 286명의 서명을 받아 로잔 리더십에 서울 선언문의 개정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부디 이런 의견이 반영이 되어 미래를 견인할 선언문이 도출되길 기대한다.

 

로잔운동 로고 ⓒ로잔운동 공식홈페이지 https://lausanne.org/about/blog/accelerating-global-mission-together

 

두 번째 유감은 서구와 한국 교회의 의제들과 분위기로만 이끌고 간 대회라는 점이다. 세계는 얼마나 크고 넓고 다양한가. 그리고 그 안에서 겪는 실상과 고민과 도전은 또한 얼마나 복잡한가. 그런데 무대에 올라온 주요 메시지는 한때 자기 문화의 중심을 차지했으나 이제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서구 및 한국 교회의 고민이었다. 세상 속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수많은 나라와 문화권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삶의 현실과 고민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미국에서 온 찬양팀이 아주 흥겹고 신나는 연주와 함께 찬양을 인도하는데, 거대한 화면 위에 중계되는 메인 싱어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혼의 고통이 느껴져 걸어 나오고 말았다. 그날은 레바논 공습으로 1,8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한 날이었다. 내 옆에 앉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출신 형제의 전화기로는 폭격의 현장에서 찍은 영상과 사진, 눈물의 호소가 담긴 메시지들이 속속 들어오는 중이었다. 현실의 아픔과 고민으로부터 이렇게 분리되어 우리 중심의 관심사들만 다루면서 치르는 선교 대회라는 것이 개탄스러웠다.

 

그 외에도 많은 유감이 있었지만 한 가지만 더 나누자면, 재정에 관한 아쉬움이다. 한국에서 재정을 충분히 마련했지만, 로잔 리더십은 과도하게 책정된 참가비를 낮추지 않고 끝까지 고수했다. 이것은 로잔에 왔어야 할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장벽이 되었고, 많은 이들이 결국 참여를 포기했다. 다수 세계라 불리는 비서구권의 여러 지인들이 실제로 돈 때문에 대회 참가를 포기했고, 상대적으로 재력이 충분한 북미에서 1100명, 한국에서 500명이 참가하는 불균형이 발생했다. 최소 몇백 불에서 2천 불에 이르는 돈을 거둬 무엇에, 어떻게 쓸지에 대한 투명한 공개나 동의 과정이 없이 끝까지 ‘준비 과정에 돈이 필요하고, 앞으로 사역에 필요하다’는 말로만 일관하며 강행된 회비 정책을 보면서 50주년을 맞아 미국도 아니고 굳이 한국에 와야만 했던 그 동기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돈이 운동을 일으킬 수는 없다.

 

물론 로잔을 통해 얻은 여러 은혜와 선물도 있었다. 우선 전 세계에서 온 소중한 친구들과 재회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도전과 영감을 얻는 자리였다. 북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따로 사흘간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나온 대화와 담론은 감동과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북한을 주적으로만 보고, 긴장을 높이기만 해온 정책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남북은 헤어진 가족이며 화해가 필요한 형제, 자매라는 관점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극도로 어려운 환경인 북한에서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도 확인했고, 오직 사랑과 용서만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닫힌 문을 열 수 있음도 확인했다.

 

또 다른 교훈은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는 서로 의견이 다르고 어떤 지점에서는 동의가 안 되는 생각을 갖고 있어도, 여전히 가족과 친구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하루는 전체 집회의 강사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상황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에 인질이 잡혀 있는 상황, 세대주의 신학의 잘못된 적용이 낳는 이스라엘의 무력 행위 정당화’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일부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다. 그 논란이 확산되어 결국 대회 디렉터가 전체 참가자들에게 강사를 대신해 사과하는 이메일을 발송했는데, 그로 인해 이번에는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형제, 자매들이 마음에 큰 아픔을 겪었다. 결국 로잔의 리더십과 한국의 준비 위원회 일부 리더들이 그들을 초대해 마음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도 그 자리에 초대되어 이렇게 첨예하게 갈등을 유발하며 민감하고 아픔이 담긴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볼 수 있었는데, 내게 너무나 큰 교훈의 자리가 되었다. 동의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인정하는 성숙한 태도, 자기의 아픔을 명확히 얘기하면서도 관계를 차단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면서, 갈등이 곧 관계의 종말로 이어지기 쉬운 한국 문화 속에서 어떤 태도로 대화하고 소통해야 할지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모든 화해와 갈등 조정의 핵심에는 경청이 있다는 점을 보았고, 서로 견해가 달라도 여전히 서로 존중하며 각자의 고유한 역할에 대해 인정해야 하는 점도 배웠다.

 

이제 로잔 대회의 막은 내렸다. 앞으로 로잔 본부는 어떤 방향을 향해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투입되는 비용 대비 이런 대형 집회의 효용은 많은 의문을 남겼으니, 이 점을 깊이 성찰하길 바란다. 아울러 복음주의권 전체는 새로운 방법과 전략과 태도로 이 세상의 아픔과 필요에 반응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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