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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죽음’ 정도가 아니면, 인간은 자신의 삶이 옳았는지 되짚고 바로잡기에 필요한 시간을 결코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선 죽음의 고통을 지나야만 한다. 그 서늘한 단호함이 이반 일리치의 신장과 맹장을 통과하고 마침내 나에게 온다. (본문 중)
김보경(전 IVF 동서울지방회 간사)
레프 톨스토이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김연경 옮김
민음사 | 2023.12.8 | 144쪽 | 12,000원
이반 일리치의 삶은 특별히 위대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웃과 가정을 돌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직장과 친구 관계에서는 중용을 지켰다. 아내를 혼자 두었고, 자녀를 정서적으로 돌보지 않았다. 직장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조직과 동료에게 인정받는 것, 생활비를 벌어 가정을 부양하는 것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너무나 보편적인 가장의 모습이자 인간의 삶이었다. ‘죽음’은 정말이지 갑자기 찾아왔다.
1장은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이는 없다. 그의 가족은 어떻게 더 많은 보상금을 받을지에 대해 궁리하고, 동료들은 그의 죽음으로 생긴 공석은 누구의 차지인지 계산하기 바쁘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스스로 망쳐버린 삶을 어느 정도 바로잡았다는 희망을 본 채 죽었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어느 것도 바로잡지 못했음을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은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런 가정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가장 높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투쟁하려는 충동, 그가 당장 떨쳐 내려 했던 아득한 저 충동이야말로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장도, 삶의 방식도, 가족도, 사교계와 직장의 이해관계도,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돌연 스스로 변호하는 데에 참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자 변호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그렇다면’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쳤다는 의식을 지닌 채 삶을 떠난다면, 그걸 바로잡을 수조차 없다면 그때는 뭐지?’ 그는 똑바로 드러누워서 자기 인생을 통째로, 완전히 새로이 되짚어 보았다. (97쪽)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선 이반 일리치의 삶을 통해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린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기만이다. 이 질문과 답은 결코 단순하게 읽히지 않는다. 2장부터 몰아치는 이반 일리치의 투병기는 너무나 처절하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수록 투병의 고통과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공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투병 내내 아내와 가족들에게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 느낀다. 그의 시선으로 본 아내와 가족들의 모습은 파렴치하기만 하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젊음과 건강함은 파렴치하고 역겨운 것일 뿐이다.
이반 일리치는 끝에 와서야 ‘죽음’을 똑바로 마주한다. 그는 키제베터 삼단논법을 이용해 생각한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 그러나 자신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특수한 별개의 인간이다. 그렇기에 죽음이 자신을 덮쳐온다는 사실은 실로 압도적이다. 그조차도 압살하는 통증은 너무나 생생하다. 마침내 죽음을 인정한다.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톨스토이는 ‘죽음’ 정도가 아니면, 인간은 자신의 삶이 옳았는지 되짚고 바로잡기에 필요한 시간을 결코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선 죽음의 고통을 지나야만 한다. 그 서늘한 단호함이 이반 일리치의 신장과 맹장을 통과하고 마침내 나에게 온다.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난 시가 있다. 작가 한강의 “서시”이다. 이 시는 시집의 처음이 아니라 끝에 등장한다. 죽음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서시”에 대해, 평론가 신형철은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우리는 ‘인간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것을 알지만, 인간 일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죽음은 언제나 아직은 아닌 일처럼 생각하며 산다. 본래성이 아닌 일상성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거짓된 망각의 세계 속에서 말이다. …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서 내 죽음과 대면해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으니 바로 그런 가능성의 지평으로 나아가라는 것. 그런데 그것은 무엇일까?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본다는 것은? 한강의 시를 읽으며 그 물음과 또 한 번 대면했다. 서시란 서문을 대신하는 시이므로 시집 맨 앞에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한강의 서시는 시집의 끝에 있는가. 죽음에 대한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생의 끝에서야 쓰게 되는 서시 같은 것이므로. 그때야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다시 처음인 듯 살아가고 싶어지니까. 그러나 그건 너무 늦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미리 써야 하고 매일 써야 한다. 나는 죽는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시를. (신형철, 『인생의 역사』)
죽음은 인생의 끝에서야 쓰게 되는 서시이다. 이반 일리치가 생각했던 죽음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의 이야기를 통해 톨스토이가 말하는 죽음은 나를 넘어 곁에 있는 타자를 향한다. ‘나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나와 너의 이야기’다. ‘너’가 빠진 ‘나’는 허망하다. 무의미하다. 거짓이다. 기만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대체로 끝까지 숨겨진 비밀로 남을 것이다.
본래성의 세계. 진정한 삶이라는 가능성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시를 쓰는 것.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빌려 자신만의 서시를 썼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 등지려고 했는지” 말이다.1)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란다. 언젠가 만나게 될 죽음을, 거듭 만나게 될 내 곁의 죽음을, 나 또한 조용히 오래도록 끌어안아 주고 싶다.2)
1) 한강, “서시”
2) 한강,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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