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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리스도인이자 비평가로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은 개인적 소감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제목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읽기’라고 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읽는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관점이 있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저는 가능하면 이런 입장과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이제 제가 하려는 이야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과 함께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몸에 익힌 읽기의 방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을 것입니다. (본문 중)

 

한 그리스도인 비평가의 『채식주의자』 읽기1)

 

정영훈(경상국립대 교수, 문학평론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경험

 

문학 작품이 아닌 책들에는 주의해서 잘 읽으면 드러나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책 안에 온전한 형태로 갖추어져 있는 의미가 있고, 읽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이지요. 문학 작품은 다릅니다. 문학 작품에 들어 있는 의미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읽고 나머지 부분을 채워주어야 온전해지는 그런 의미만 들어 있습니다. 작품을 읽고 나오는 각각의 반응들은 그 자체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어떤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알려줍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후 한강 작가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자 비평가로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은 개인적 소감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제목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읽기’라고 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읽는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관점이 있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저는 가능하면 이런 입장과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이제 제가 하려는 이야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과 함께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몸에 익힌 읽기의 방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을 것입니다.

 

먹는 삶, 그 이면의 폭력과 희생: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장편과는 조금 다르게 ‘연작 소설’이라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요, 각각의 단편이 독립된 작품으로서 완성도를 지니는 한편, 이들 작품을 함께 읽으면 장편처럼 읽히는 작품을 연작 소설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연작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인 영혜의 남편이 화자인 1인칭 소설입니다. 그에 비해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은 영혜의 형부와 영혜의 언니 인혜가 각 작품의 화자처럼 느껴지는 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입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세 편 모두 주인공인 영혜를 외부의 시선을 통해서만 그려내고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가 채식을 선언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영혜가 갑자기 채식을 선언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화자인 남편이 이 문제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만으로는 독자들이 답을 얻기 쉽지 않습니다(「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도 같은 상황이 연출됩니다). 남편은 영혜의 변화를 못마땅해 할 뿐 그녀의 심경에 대해 깊이 헤아려보려 하지 않습니다. 영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편보다 좀 더 깊이, 더 세심하게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혜는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폭력을 경험해 왔습니다. 가족이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 한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버지는 영혜가 말을 듣지 않자 뺨을 때리기까지 합니다. 사위를 비롯해 식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입니다. 아버지는 “다 널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영혜를 위한 행동이 될 수 있을까요. 「나무 불꽃」에 나오는 인혜의 회상 장면에서, 우리는 두 자매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식의 폭력을 되풀이 경험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는 물론이고 피해자 역시, 그 순간에는 폭력인 줄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폭력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채식 선언 이후 영혜가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상황은, 그 자체로 폭력적일 뿐 아니라 이제까지 살면서 영혜가 경험해 온 숱한 폭력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혜의 인식이,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라는 발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혜는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새벽의 전날 아침에 영혜는 고기를 썰다 손가락을 베었습니다. 식칼에 베인 상처가 돌연, 그동안 그 칼날 아래에서 숱하게 쓸려간 고기들을, 그들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요. 평생 살아오면서 먹은 음식의 재료가 되었던 동물들, 한때는 살아 있는 생명이었던 그들에게 자신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을 행사해 온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꿈속 한 장면에서, 영혜는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는데 죽인 사람이 자신인지 살해된 쪽이 자신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구별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그녀는 나중에 형부와의 대화에서, 자기가 꿈에서 본 것이 “얼굴”이었다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얼굴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사람들을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동물 가운데 얼굴을 가진 것은, 애정을 가지고 돌보는 반려동물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혜는 자신이 먹어온 것이 각자 고유한 개성을 가진 수많은 생명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합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이상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영혜의 채식 선언은 동물을 죽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그 끝에 물만 겨우 먹고 사는 식물적인 삶이 있습니다. 영혜의 이런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저는, 먹히는 것들에 대한 연민,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공감이 그만큼 크고 깊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충실하게 지키려는 의지가 영혜를 이처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내몬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물론 영혜의 이런 선택이,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고 싶어 하는 삶의 지침인 것은 아니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영혜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와 이 사실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채식주의자』 표지 ⓒ창비

 

먹이는 자로서의 의무: 「나무 불꽃」

 

우리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먹히는 것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생명을 잃어버린 그 사체들을 먹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삶에는 근본적으로 폭력과 희생이 깔려있다고 말입니다. 삶 자체가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 위에서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에, 영혜는 사는 것 자체를 죄스럽고 부끄럽고 아프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식물같이 살겠다는 영혜의 결단은 이 문제에 대한 그녀 나름의 답변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혜의 선택은 자기 파괴로 이어집니다.

 

영혜와 다른 선택을 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언니인 인혜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인혜의 이야기는 세 번째 연작인 「나무 불꽃」에 나옵니다. 인혜는 「채식주의자」 단계에서는 영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무 불꽃」을 읽어보면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혜가 영혜에게 공감하게 된 배경에는 그녀 자신이 영혜와 비슷한 경험을 해 왔다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남편이 문제의 비디오를 찍은 그해, 인혜는 한 달간 하혈이 계속된 적이 있습니다. 수술을 받고 회복은 되었지만, 그 후 한동안 자기 몸에 깊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살아가지요. 그러던 어느 새벽, 남편과 억지로 동침한 후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그녀 또한 영혜처럼 삶을 포기하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혜는 영혜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가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날 새벽의 일을 회상하며 인혜는, 어린 아들이 자기에게 지워준 책임이 아니었다면 자기 역시 삶의 끈을 놓쳐 버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임감에 대해, 이제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것과 연관 지어, 저는 이렇게 정리를 해 봅니다. 영혜의 경우, 자신이 먹는 존재, 먹히는 것들에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죽이는 존재임을 깨달으면서 먹는 것 자체를 중단하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인혜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는 존재라는 것, 먹는 존재일 뿐 아니라 누군가를 먹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한강 소설의 인물들은 자주, 먹으면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느낍니다. 가령 『소년이 온다』에서, 생존자 중 한 명인 은숙은 먹을 때마다 “치욕”을 느낍니다. 죽은 사람들은 삶이 없어 언제까지든 배가 고프지 않을 텐데, 자신은 이렇게 살아남아 때가 되면 허기를 느끼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인 소년의 어머니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먹이기 위해 음식을 준비할 때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가출한 인선의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 꿈결에서였는지 딸을 발견한 어머니가 한 일은 죽을 끓이는 것이었습니다. 제주 작업실에서 재회했을 때(이 장면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인선은 ‘나’(경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콩죽 먹을래?”

 

먹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자기를 위해 먹으면서 누구도 이 이기심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을 먹이는 일은 다릅니다. 남을 먹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있던 관심을 타인에게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인선은 먹이는 일을 기꺼이 자기의 의무로 받아들였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를 한강 소설에서 자주 봅니다. 인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위기의 순간 인혜가 떠올린 것은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먹이고 돌봐야 한다는 의무가 그녀를 살린 것입니다. 영혜가 맞닥뜨린 궁지에서 인혜가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예술가의 윤리적 태도: 「몽고반점」을 경유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몽고반점」을 읽으면서 저는 예술의 역할과 예술가의 윤리에 대해 성찰해 보게 됩니다. 이 작품은 자주 한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금기를 넘어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이야기로 읽혀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읽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형부의 행위 이면에 있는 폭력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혜는 폭력 앞에 노출된 존재 또는 상처 입은 존재입니다. 저는 이 상처 입고 고통당하고 있는 누군가를 예술적으로 어떻게 묘사하고 어떻게 재현해 내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까, 어떤 것이 윤리적인 방식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려 합니다.

 

형부는 영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녀가 고통당하는 이유와 현재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영혜를 그저 하나의 예술적 대상으로만 보았고, 이 대상으로부터 어떤 예술적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을지에 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요. 형부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뛰어났을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후배는 작품의 일부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지요. 하지만 이와 별개로, 자신 앞에 놓인 대상, 그것도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형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와는 다른 방식과 태도 속에, 상처받고 고통당한 이들을 대하는 작가 한강의 방법론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인혜를 다루면서 먹이는 삶,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삶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를 작가에게 대입시켜 보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한강 작가가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가, 크고 작은 폭력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이들을 위해 쓰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받고 있는 존재를, 어떤 태도로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제가 느끼게 되는 것 하나는, 작가가 대상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소년이 온다』의 2인칭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작가의 의지와 사려 깊은 태도를 확인합니다.

 

작가 자신이 고통당하는 존재라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선이 목공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봉합 수술을 받게 됩니다. 수술 후 간병인이 3분마다 봉합 부위를 찔러 피가 나도록 합니다. 인선은 말하지요.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저는 이 대목에서 작가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제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렇게 끔찍한 통증을 계속 일으켜야만 신경의 실이 이어지는” 것처럼, 스스로가 고통스럽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없고 그 고통에 반응할 수 없고 그 고통에 관해 쓸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한강의 작가적 윤리의식이라고 말이지요.

 

나가며: 물음과 대답, 의무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저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질문들을 던져 봅니다. 삶은 먹히는 것들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는데, 예수의 대속을 믿고 그의 살과 피를 하루하루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먹히는 것(들)의 무게에 어울리는 삶, 그 희생에 어울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먹히는 것들은 당연히 희생되어야 할 어떤 것들이 아닌데, 우리 뱃속으로 들어간 이 수많은 먹히는 것들의 목숨값을 헛되이 하지 않고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 고통 가운데 있는 삶, 타인의 고통을 체휼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먹히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의무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먹이는 일이 어떻게 구원의 일부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무수한 질문들과 마주하여 서 있습니다. 이 물음에 답하는(response) 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이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responsibility)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 이 글은 2024년 11월 21일, 진주 기윤실 주최 행사에서 한 강연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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