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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모든 심미적인 요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그저 미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윤리적인 숭고함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고, 인간의 선함을 아름답게 표현한 이미지를 의미했습니다. (본문 중)
정단비(종교와 문학 연구자)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작품 『백치』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결코 세상의 잔혹한 폭력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통해,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잔인하게 학대받는 일이 일어나는 이 세상의 뿌리 깊은 악에 대해 절망과 탄식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 험악한 죄와 고통이라는 현실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기제로서, 이 바위 같은 현실에 비해 너무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을 제시합니다. 그는 아름다움이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실재하는 힘임을 확신했습니다. “우리 영혼은 매우 쉽게 영향을 받는다. … 아름다움의 영향력은 영혼에 위대하고 유익하게, 그러니까 유용한 작용을 하며, 기운을 불어넣고 우리의 힘을 북돋는다.” 도스토옙스키는 1861년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나는 항상, 인간미로 가득한 아름다운 표현들의 힘을 믿어왔다.”
도스토옙스키가 속한 정교회 전통에는 이콘이라고 부르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관조하며 묵상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정교회에서 이콘은 신이나 성인들의 임재가 머무는 영적인 세계의 창으로 여겨지며, 이를 바라보는 행위는 그저 무미건조한 응시나 단지 심미적인 감상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성스러운 존재와 눈을 맞추는 영적 연결의 행위로 여겨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관조자가 이콘 속 성스러운 존재를 바라보고 그 존재의 시선을 받을 때, 그 존재의 신적 생명력과 에너지가 관조자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정교회 전통에서 이콘 속의 성스럽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이러한 침투를 통해 관조자의 존재를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문학과 예술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예술 속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을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별히,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모든 심미적인 요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그저 미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윤리적인 숭고함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고, 인간의 선함을 아름답게 표현한 이미지를 의미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문학과 예술의 역할이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삶의 고단함과 이기심의 유혹 가운데 묻혀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꿰뚫어 보고 이를 생생한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런 작품은 그것을 보는 독자들의 마음에 선함을 가진 인간의 형상을 새겨 넣는다고 주장합니다. 훌륭한 예술 작품 속에서 선한 인간의 모습이 아름답고 현실적이며 개연성 있게 묘사될 때, 그 이미지는 독자들의 이성과 그들이 평소에 지녔던 인간에 대한 편견의 방어벽을 뚫고 그들의 영혼으로 파고들어, 선함이라는 것이 실제로 인간에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 그것이 그들이 잊고 있던 인간의 진정한 본성임을 깨닫게 하고, 잊고 있던 본성을 현재의 삶에서도 나타내고 싶다는 감동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문학과 예술이란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그들이 잃어버린 “인간으로서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필수적인 기제라 보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문학이란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이며, 문학이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문학은 그 안에 구현된 아름다운 이미지가 주는 감동으로써 각 사람 안에서 그들의 마비된 선한 본성을 깨우고 그들을 아름다운 존재로 회복시켜 결국에는 세계를 구원할, 사회의 필수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사실 이런 윤리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형상의 정수는 이미 우리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의 말씀은 이상적 아름다움의 현현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세상에서 온전한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인데, 그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라는 육체를 입은 인격과 그의 삶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이미지는, 사실상 그의 가르침보다도 사람들의 영혼을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그래서 더 근본적으로 사로잡는다고 보았습니다. 특별히,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겸손한 사랑의 아름다움에 주목하였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으로서 자기 비움과 낮아짐의 사랑을 체화한 그리스도의 존재와 삶이, 매정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며 그 사랑만이 끝내 진정한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궁극의 아름다운 형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은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꿈속에서나 이상으로만이 아닌, 실제로 그리고 그들의 육체에서도” 그와 같은 사랑이 실현 가능함을 일깨우며, 바로 그 사랑에 인생의 궁극적 만족과 의미가 있다는 직관적 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목도하는 세계는 결국 그의 아름다움에 침투당하여 그 아름다움으로 물들 것이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왜 문학과 예술의 아름다움이 인간이 구원받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을까요?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변혁적 능력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예술 및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존재론적 간극과 상황적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인간은 육체를 지닌 존재로서 인간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전히 인간이면서도 온전히 신적인 존재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중에서 독보적인 ‘완벽한’ 인간임을 강조합니다. 영원히 죄에 패배하지 않을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보일 수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의 이상이자 온전함 그 자체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보통의 인간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상태에 처해 있음을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인식했던 작가였습니다. 세상의 폭력과 죄의 유혹 앞에서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겸손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지키지만, 보통의 인간들은 이에 끝내 굴복하고 마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겸손한 사랑의 원천이지만 보통의 인간들은 자주 폭력과 착취의 원천이 되곤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신비이며 인간에게는 사실상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유형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에, 온전히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마주할 때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이를 닮도록 변화될 수 있는 본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완벽한 아름다움의 이상을 보여 주었다 해도, 늘 선과 악이 뒤섞인 불완전함 속에 존재하는 보통의 인간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으로 물들어가는 성화는 늘 최종적인 완성에는 이를 수 없는 과업이자 과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는 상황적 간극도 존재합니다. 각 민족과 문화적 집단이 속한 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인간의 복잡한 삶의 양상은 각각 다른 형태와 문제들로 나타납니다. 각 개인과 집단은 고유한 문제, 고통, 희망, 기쁨을 경험하며, 이들이 살아가는 도덕적 현실은 1세기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가 살아가셨던 현실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는 상황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이상으로서 모든 사람의 영혼을 감화시켜 자신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 준 겸손한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감을 받은 후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구체적이고 복잡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실천하고 표현할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각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이미지와 자신의 현실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는 달리 선과 악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그리스도의 시대와는 다른 문제를 대면하고 있기에 자신들을 더 닮은 매개적 이미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 지점에 예술가와 작가의 소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예술과 문학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상과 선악이 혼재하는 복잡한 인간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며, 좋은 예술가와 작가란 단지 육체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혼의 눈, 즉 영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작가들은 깊은 통찰의 눈으로 고통과 폭력이 난무한 이 세상의 현실을 주목하되, 그 아픔과 문제들의 표면적인 현상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이 현상들을 움직이고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시대정신과 정서를 포착해야 합니다. 동시에, 작가란 그 기저 사상과 사회적 정서보다도 더 깊은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 즉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영과 인간의 성격의 깊이”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진정 뛰어난 작가는, 도덕적으로는 결함투성이이며 두려움과 죄성이 혼재한 어두움에 사로잡혀 씨름하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그럼에도 여전히 빛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과 선에 대한 열망을 포착합니다. 그리고 이 숨겨진 선한 인간 본성을 독자들이 속한 바로 그 현실 속 그들의 삶과 닮은 형상을 통하여 보여 주는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좋은 예술과 문학이란 독자들의 영혼에 이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본성이며 그들이 앞으로 변화해 나가야 할 청사진임을 직관적으로 새겨 넣는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온전한 이상적 아름다움으로서 사람들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변혁하는 절대적인 역할을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리스도의 완벽한 아름다움은 원형적 성격을 지닙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사랑이라는 이미지는, 그 형상 외에 다른 것들은 선하고 아름다울 수 없다고 배제해 버리는 닫힌 완결성이나 배타성의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은 이로부터 다른 아름다운 형상들이 무수히 흘러나오는 궁극적 원형이자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형적 아름다움은 무한한 변혁력과 생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감화를 주어 그 원형 자체를 닮아가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 이미지에 감화를 받은 문학과 예술을 통하여 각 시대의 고유한 모습으로 구현된 수많은 그리스도의 형상들을 생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예술과 문학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확장한 표현이며 그 연장선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예술가와 작가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말씀을 예언하고 표현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원형적 이미지를 보여 주었다면, 좋은 예술가와 작가는 무한한 깊이를 지닌 그 원형이 온전하지 못한 우리의 삶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무수한 파생적 형상들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입과 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존재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형상,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것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에서 예술과 문학의 사명을 찾습니다. 혹, 몇몇 독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으며 마치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그 연유는 아마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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