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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과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 앙리 파브르라는 인물이 있었다. 교사로서 틈틈이 곤충을 관찰하여 권수만 해도 열 권에다 페이지 수는 4,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곤충기』를 쓴 사람이다.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물 중 가장 천시받고 약한 존재인 곤충을 관찰하였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그 곤충들의 위상을 찾아 주려고 애썼다. 그런 무수한 관찰과 실험의 결과로 파브르는 당시에 이미 명성을 얻고 있던 진화론의 설명으로는 곤충을 설명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본문 중)

 

성영은(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미움과 분노가 가득하다. 교회 내에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성탄, 연말, 새해를 지나면서도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는 잘 보이지 않고 정치에서 출발한 이념 논쟁이 마치 신앙마저 삼켜버린 듯하다. 하나님의 의라는 이름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바쁘다. 서로를 향해 회개하라 외치지만 정작 사랑과 용서의 마음은 읽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힘과 폭력으로 밀어 붙여 관철시키려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일까? 신자의 바른 태도일까?

 

찰스 다윈은 진화론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과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을 발표 초기부터 지금까지 주류의 생명 이론으로 삼고 있다. 그의 주장 중 특히 인간의 진화에 관한 이론은 기독교의 주장과 정면충돌하면서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이후 165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물론 기독교 내에도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이 있긴 있지만 주류는 인간의 진화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래서 다윈을 미워하고 심지어 악마화하기까지 한다. 기독교의 원수 같은 인물로 여기는 것이다. 마치 다윈의 진화론이 우리 신앙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것 같이, 그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 정죄한다. 교회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갈등을 일으키는 중요한 주제이다.

 

찰스 다윈과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 앙리 파브르라는 인물이 있었다. 교사로서 틈틈이 곤충을 관찰하여 권수만 해도 열 권에다 페이지 수는 4,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곤충기』를 쓴 사람이다.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물 중 가장 천시받고 약한 존재인 곤충을 관찰하였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그 곤충들의 위상을 찾아 주려고 애썼다. 그런 무수한 관찰과 실험의 결과로 파브르는 당시에 이미 명성을 얻고 있던 진화론의 설명으로는 곤충을 설명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의 주요 개념으로 설명하기에는 예외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예외는 특히 약한 생명인 곤충들에게서 더 현저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곤충기』에 보면 진화론을 비판하는 내용이 무척 많이 나온다. 일부 기독교에서는 이런 파브르를 진화론에 대적하는 투사처럼 그리기도 한다. 반면에 파브르의 진화론 비판을 불편하게 여기는 편에서는 『곤충기』에서 진화론에 대한 비판 부분을 다 삭제해 버리고 다시 편집한 어린이용 책을 널리 소개해 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윈에 대한 파브르의 태도이다. 그는 진화론은 비판하면서도 다윈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았다. 그의 과학적 통찰력과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높이 산 것이다. 다윈도 자신의 이론을 반대하는 파브르의 관찰하는 태도를 높이 샀다. 심지어 『종의 기원』에 파브르의 곤충 관찰을 인용할 정도였다. 파브르는 『곤충기』 1권이 나왔을 때 다윈에게 책을 보내면서 쓴 편지에서 진화론을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이에 대해 다윈은 답신에서 자신과 견해가 다른 파브르에게 유감을 표하면서도 『곤충기』를 극찬하는 동시에 자신의 책에 인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 편지에는 또 파브르 아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파브르를 위로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다윈은 자신의 친구에게도 파브르를 극찬하면서 그의 관찰 결과를 자세히 검토해 볼 것을 조언한다. 이어진 파브르와의 서신 교류에서는 다윈이 파브르에게 누구의 이론이 맞는지 실험을 해 보자고 제안을 하고 있다. 『곤충기』에 보면 다윈이 제안한 관찰 결과들이 자세히 나온다.1)

 

파브르는 신자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이 있었지만, 다윈을 신앙으로 공격하거나 적대시하지 않았다. 소위 진화론을 신앙과 과학 논쟁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과학적 관찰 내용으로 과학적 이론 논쟁을 한 것이다. 이런 파브르에 대해 다윈 역시 동일한 태도를 견지했다. 다윈은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짐작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죄인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어린 자녀들의 죽음을 괴로워하고, 원주민들과 선교사들의 악행과 자연 세계나 동물들의 잔인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정통 신앙에 있다가 점점 하나님이 계신지 잘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으로 빠져들어 가는 과정은 이 시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나 우리 자녀들이 겪는 어려움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다윈에 대한 파브르의 태도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늘 변하는 과학이나 세상의 일들로 인해 서로 미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학 이론은 과학 이론으로 대하고 논쟁하면 된다. 신앙을 과학으로 낮추거나 과학을 신앙으로 높여 신앙적 논쟁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일들은 성경으로도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이 분명히 알려주시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관해 서로를 정죄하는 것은 편협한 태도이다. 성경 앞에서나 과학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우리가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파브르는 평생 곤충을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가설에 가설이 잇따르고 이론의 벽돌들이 쌓이고 쌓여도 진리는 항상 도망친다. 지혜의 마지막은 무지를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기독교에 이런 넓고 여유 있는 마음과 겸손함으로 서로 존중하고 용납하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우리의 믿음에는 극한 대립을 이길 힘이 있기 때문이다.

 

『파브르의 안경』표지, ⓒ홍성사

 


1) 다윈과 파브르의 자세한 교류 내용은 필자의 신간 『파브르의 안경』(홍성사)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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