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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라는 모자이크 안에는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녹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심장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주고받는 ‘생명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오롯이 잘 녹여내면서도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내고 있는 책이 바로 오늘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 제자도』입니다. 책 내용을 꼼꼼하게 요약하고 논평하기보다는 저자가 제시하는 함께 고민해 볼 만한 논점들 위주로 과감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본문 중)

 

민현필(함께하는 교회 목사, 경기도 산본)

 

노종문 | 『하나님 나라 복음과 제자도』 | IVP

2024. 10. 8. |  230쪽 | 15,000원

 

들어가며

 

한국 교회가 요즘 많이 어렵습니다. 정치적 이슈들까지 겹치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성도들의 신앙적인 갈등이 깊어져 가는 듯합니다. 제 주변에는 심지어 개종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 신자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주일 성수와 교회 봉사도 남부끄럽지 않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라는 생태계는 이렇게 숨쉬기도 힘겨울 만큼 열악해져 가는 것일까요? 우리의 봉사와 헌신에 진심과 열정이 부족했기 때문일까요?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런저런 진단들을 내놓았지만 속 시원한 돌파구는 요원해 보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푸념과 한숨 소리를 우리는 90년대 중반 이후로 줄곧 들어 왔습니다. 이제는 만성적인 질병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제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해 보이는 건축물도 터를 다지는 기초공사가 중요하듯, 저는 이럴 때일수록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복음 앞에 서는 것이죠. 복음이라는 토대야말로 교회의 존립을 좌우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급하게 그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싶어 합니다. 소위 ‘사영리식 복음’, 믿음이라는 단추만 누르면 구원을 보장해 주는 ‘커피 자판기식 복음’, 제자로서의 삶과 동떨어진 구원의 확신, 교세 확장을 위한 전도, 선교만 매일 강조하는 복음은 어떤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역사하셨지만, ‘다음 챕터’로 빨리 건너뛰고자 하는 우리의 조급함과 목회적 실용주의로 인해 한국 교회는 균형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로 인한 대가들을 톡톡히 지불해 왔고, 여전히 그 부작용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를 바로잡기 위한 자구적 노력들이 시도되어 왔습니다.

 

복음의 외연 확장과 사회 참여의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나, 로잔 언약이 천명했던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균형, 복음의 총체성이나 사회적 제자도 혹은 공공신학 같은 개념들이 그런 예들입니다. 분명 일정 부분 교회의 나침반 역할들을 감당해 온 측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시도되어 왔던 그러한 운동들이나 신학적 해법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총체적 비전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단지 지적인 동의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그 안에 거하고’,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실체를 드러내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므로, 소명과 헌신의 요구가 따르게 됩니다.

 

복음이라는 모자이크 안에는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녹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심장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주고받는 ‘생명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오롯이 잘 녹여내면서도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내고 있는 책이 바로 오늘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 제자도』입니다. 책 내용을 꼼꼼하게 요약하고 논평하기보다는 저자가 제시하는 함께 고민해 볼 만한 논점들 위주로 과감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책 속으로

 

이 책은 저자가 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듯이, 초신자도 읽을 수 있을 만한 간결한 문체가 특징입니다. 저는 좋은 책의 특징을 간결성, 포괄성, 현장성을 가진 책으로 정리하곤 하는데,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미덕들을 골고루 갖춘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의 진술들을 함축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그 의미들을 잘 곱씹고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는 책입니다. 쉽게 읽히지만 또 쉽게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 그런 책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연거푸 두 번 읽어 보았습니다. 어떤 부분은 좀 더 길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더 풍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반복해서 두 번이나 읽은 또 하나의 이유는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 나라 복음인가?

 

먼저 저자는 20세기 복음주의 교회들의 전도 방식을 돌아보며 그 특징들을 ‘대중 집회’와 ‘개인 전도’라는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대중들에게 임팩트 있고 효과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흥미로운 예화와 단순화된 복음이 필요했고,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짧은 시간 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핵심적인 교리로 축약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방법은 교회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음을 저자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맹점도 없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나(죄인)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신자들이 죽어서 들어가는 가는 하늘나라’ 정도로만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식의 복음 전도 방식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쳤던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축소된 복음’은 한동안 교회의 양적 성장과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 교회가 최근 10년간 나타난 급속한 청장년층의 이탈 현상과 교회 소멸 및 사회적 신뢰도 추락이라는 한계에 봉착해 있음을 지적하고, 이 모든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얕고 피상적인 복음 이해”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저자는 그 대안으로 “복음서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토론해 볼 만한 주제1 : 형벌 대속론과 이신칭의에 대한 저자의 논박

 

저자는 서론에서 밝힌 ‘축소된 복음’이라는 문제의식을 주로 전통적인 속죄 모델들 중에 하나인 ‘형벌 대속론’과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논박을 통해 확장시키고, 그 대안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합니다. 이는 수년 전부터 북미 지역이나 한국 개신교 내부에서 벌어져 왔던 칭의 논쟁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익숙한 토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기존의 형벌 대속론이 ‘대리 형벌을 통한 죄책의 제거’라는 좁은 개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로마 법정을 배경으로 한 이 교리는 본래 첫 독자들에게 제시된 내용이라기보다는, “원래 그림 위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부분을 굵은 선으로 덮어 그린” 후대 신학자들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저자는 그 대안으로 성경의 내러티브라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새 언약’ 혹은 ‘새 출애굽’ 더 나아가 죄와 사탄으로부터 해방된(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하나님 백성의 탄생’이라는 관점으로 읽어 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입장 때문인지, 저자는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 본문을 설명하면서 ‘속죄와 새 언약’이라는 일반적 프레임 대신 ‘새 언약’이라는 관점만 부각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개인의 죄사함이라는 협소한 관점으로만 속죄론을 이해하려 했던 전통적인 해석 방식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진노하시는 심판 주 하나님의 이미지보다는,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언약적 사랑의 심장으로 충만한, 사랑의 하나님을 더 부각시키고 싶어 합니다(이 프레임은 정확히 톰 라이트의 관점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전통적인 형벌 대속론이 제시하는 ‘법률적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 안에 재배치시킴으로써 좀 더 “풍부하고 직접적인 성경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 복음과 제자도』 표지 ⓒIVP

 

토론해 볼 만한 주제2 : 복음 선포와 제자도의 관계

 

대중 집회와 개인 전도에 집중해 온 20세기 복음주의의 역사를 조망하면서 저자는 복음을 ‘선포’로만 ‘좁게 정의하는’ 로잔 언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런 협소한 정의로 인해 결신 이후 제자로서의 삶을 양육하는 것이 복음 선포의 내용 안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이런 복음 전도 방식은 복음 전도 행위 자체를 개념화하는 데는 유익할지 모르나 예수님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는 “이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지상 명령의 초점이 복음의 선포 행위 그 자체보다는 제자 삼는 사역에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 열매를 맺는 (제자로서의) 삶(제자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참고로 저자는 이 제자 된 삶의 핵심으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사상과 세계관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의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것에 무게 중심이 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를 믿고 따르는 것(따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복음 전도의 내용과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결국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분별하고 따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살아내는 제자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늘 논쟁하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는 그 제자도를 실현하는 방편들일 뿐인 것입니다.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을 떠올리다

 

복음 선포의 내용 속에 과연 제자도라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과거 40여 년 전 ‘구원자’로서의 예수라는 개념 이외에 ‘주되심’(lordship)이나 ‘제자도’와 같은 ‘부가적인’ 개념들이 복음의 내용에 포함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진행되었던 ‘주재권 논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논쟁은 1988년 댈러스 신학교의 설립자였던 스페리 체이퍼(Sperry Chafer)와 그의 제자였던 찰스 라이리(Charles Ryrie)의 자유 은혜(free grace) 옹호 입장과 존 맥아더(John MacArthur)와 J. I. 패커(Packer)의 주재권 구원 입장 간에 벌어졌던 논쟁입니다.

 

체이퍼와 라이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지(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왜 굳이 복음에 또 다른 조건이 붙어야 하는가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에 반해 존 맥아더(그리고 패커와 제임스 보이스)는 제자도를 사실상 구원과 동일한 범주로 이해했습니다. 갑자기 왜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를 소환하느냐 하면,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내부에서도 이미 40여 년 전에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던 사실이 있었음을 환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나 형벌 대속론이 반드시 ‘축소된 복음’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그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보다 더 나은 대안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어쩌면 그러한 복음의 왜곡은 오히려 서구 기독교를 주도해 온 북미 교회의 부흥 운동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그 결과로 나타난 선교 운동, 더 나아가 실용주의가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나타난 왜곡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레슬리 뉴비긴을 존경하고 따랐던 톰 라이트와 같은 학자는 이교화되어 버린 서구 사회의 맥락 속에서 성경의 내러티브가 여전히 타당함을 설득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교회에 전해져 온 복음 역시 그 부흥 운동의 흐름 속에 있었던 선교사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영향을 받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균형 감각 아닐까: 톰 라이트의 경험

 

전통적인 개혁주의 내부의 신앙 유산들 속에 요즘 이 시대보다 더 치열하게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한 고민과 메시지들이 넘쳐났었던 시기도 있었다는 점도 반드시 지적해야 할 부분입니다. 문제는 항상 신학보다는, 한쪽으로 치우치기 십상인, 사람일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 출간된 톰 라이트의 『예수와 권세』(Jesus and the Powers, 야다북스 역간)에서 라이트는 주교로 사역할 때 특정 교구 안에서 신학적 진보와 보수가 홍해 바다처럼 갈라져 있는 것을 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고 고백합니다.

 

라이트는 이 책에서 십자가(Cross)와 하나님 나라(Kingdom, Crown)는 함께 가야만 하고,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등극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하셨으며,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재정의하시는 날카로운 칼날이며, 또한 그렇게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궁극적인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속죄론을 전통적인 개혁주의자들처럼 이해하지는 않을지라도, 저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라이트의 열정과 신학적 헌신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가며

 

마찬가지로 저는 전통적인 형벌 대속론을 성경의 내러티브 속에서 재조명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틀을 통해 풍성하게 확장하는 의미 있는 저술 작업을 해주신 저자에게서 라이트와 같은 균형 감각을 봅니다. 또 캠퍼스 사역을 오랫동안 해 오신 만큼 영혼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열정이 느껴져서 목회적인 도전과 영감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캠퍼스 시절을 추억하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소그룹에 대한 그림은 마치 초대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무엇보다 제자 된 삶에 대한 도전이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어떤 틀로 성경을 풀어내든, 어느 신학 전통에 뿌리를 내리든, 우리 모두에게 분별과 균형의 감각은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한 영혼을 주님의 제자로 삼고, 당신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 앞에서는 어떤 변명도 핑계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임을 떠올리며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또 늘 치우치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을 주님 앞에 의탁하며,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 그리고 분별의 지혜를 구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복음 이해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역과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에 지속적으로 응답하는 과정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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