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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들이 정의에서 멀어지는 세력들에게 맞설 수 있었던 그 힘은 사랑하는 이름들이 가져다준 힘이 아닐까. 나를 대표하지 못하는 대통령, 나를 위해 일하는 것 같지 않은 국회의원에게 항의할 때, 그 누구보다도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혹은 것)의 이름들로부터 아직 사랑할 힘이 남아있는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닐까. 이름을 힘을 내어 기억하는 것은 곧 폭력과 차별에서 자신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 된다. (본문 중)
신하영(세명대 교양대학 교육학 교수)
얼마 전 구정 연휴 동안에 가장 많이 받은 이모티콘과 덕담은 ‘건강하세요’였다. 물론 건강은 항상 최우선 순위겠지만, 요즘 필자 주변에는 ‘내란 증후군’을 앓는다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파에 민주 시민으로 행동에 동참하다가 그야말로 ‘허리가 나갔다’, ‘추위에 떨다가 그 독하다는 요즘 독감에 걸렸다’ 하는 넋두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시위 참여를 후회하는 이들은 없다. AI가 의사 대신 진단도 내려 주고 박사 대신 논문도 대신 써 주는 시대인데, 아직도 정치적 뜻을 전하는 행위는 고대 그리스 시대 광장(agora)에서 외치던 그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2016년 ‘촛불’ 혁명 때는 어떠했던가. 태양광 에너지가 일상화된 이 나라에서 재래식 촛불을 너도나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던가.
이번 내란 소동 이후의 집회 때도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남녀노소 전 세대가 어우러지던 그 연대의 모습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에는 없었던 도드라진 모습이 하나 나타났는데, 연령으로는 10-30대, 청소년과 청년에 속하는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전에도 종종 민주주의의 기수로 ‘호명’된 바 있다. 지난 대선 때, 다소 거친 날것의 표현으로 대선 후보 친위대를 자처하고 나선 ‘이재명과 개딸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소수의 청년 여성 정치인, 특히 선출직 국회의원 몇 명의 캐릭터성을 내세운 ‘인물 정치’ 외에는 이 세대 여성들은 정치 영역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무성의한 뜬금포 공약을 던지는 대선 후보에 대해서도 그 부처를 통해 권익을 보장받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모이지 못했던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 탄핵 집회 이후 이들이 새로운 주체로 뚜렷이 등장했다. 그런데 묻고 싶다. 이들은 과연 그동안 광장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주체들일까? 페미니즘 리부트1)와 #metoo 운동(미투 운동) 이후 ‘청년 여성’ 주체들의 부상과 고군분투를 주목해 온 이들은 말한다. “그들은 항상 광장에 있었다. 광장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국에서 페미니즘 리부트와 #metoo는 거대한 물결을 뒤덮을 정도의 거대한 반동에 부딪혔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계몽서를 받아들인 이들은 주변인들에게 배척받고,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실제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많은 여성들의 기존 이성 교제가 결렬되기도 했다!), 아버지와 오빠나 남동생과 싸우는 과정에서 상처받았다.
‘계몽’ 혹은 자각과 지금까지 믿어왔던 세상과의 작별, 그리고 세상의 모순 앞에서 보이는 저항의 양태는, 흡사 민주화 시절 많은 대학생들이 대학에 와서야 ‘금서’를 접하고 부모 세대와 반목하던 것과 많이 닮아 있다. 그렇지만 민주화 시절 집회 때 머리띠에, 깃발에 적힌 문구가 하나로 응집된 가치였다면, 탄핵 집회에 나선 이들이 내세운 ‘이름들’은 달랐다. 필자가 집회에서 마주한 청년 여성들, 그리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변화를 몸으로 겪어온 여성들이 몸에 두르고, 깃발에 새긴 이름들은 사뭇 달랐다. 물론 ‘페미니즘’과 ‘민주주의’도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 사회정의 실천을 위한 담론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더 함께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이들이 내세운 깃발에(혹은 응원봉에) 새겨진 ‘새로운 다른 이름들’이다. 이들은 타인의 사상이나 신념을 함부로 바꾸려 들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두고 정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그것이 지갑으로 낳아서 기르는 사랑하는 고양이일 수도 있고 아이돌일 수도 있다.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사랑해 마지않는 존재라면 피와 살이 있는 고양이나 아이돌이 아니라도 괜찮다. 2D 애니메이션 캐릭터부터 시작해서 가장 아끼는 사물도 깃발을 장식한다. ‘과체중고양이(집사)연합’, ‘전국얼죽코연합’(얼어 죽어도 코트를 입는 멋쟁이들의 연합)과 ‘전국얼죽아연합’(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들의 연합)은 작금의 집회 문화가 어떤 ‘특이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그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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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연속되는 탄핵 집회 속 눈길을 끈 다양하고 창의적인 깃발들
어쩌면 이들이 정의에서 멀어지는 세력들에게 맞설 수 있었던 그 힘은 사랑하는 이름들이 가져다준 힘이 아닐까. 나를 대표하지 못하는 대통령, 나를 위해 일하는 것 같지 않은 국회의원에게 항의할 때, 그 누구보다도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혹은 것)의 이름들로부터 아직 사랑할 힘이 남아있는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닐까. 이름을 힘을 내어 기억하는 것은 곧 폭력과 차별에서 자신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 된다.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 이후에 계속 외쳐도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이 15년 이상 이어졌다. 그 끝에서 다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정국에 거리로 나선 이들이 꺼내든 이름이 그 긴 시간을 버티게 해준 이름들이었던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광장의 춥고 모진 날, 눈 속에서 ‘키세스’가 되어 어두운 새벽을 밝혀주던 그녀들을 보며(그림2) 필자가 애정하는 가수 아이유가 부른 노래 “이름들에게”가 떠올랐다. 어지러운 한국 사회, 언제쯤 도래할지 모르는 “믿을 수 없도록 먼” 성평등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사랑하는 이름들을 부르며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나아가는 그녀들에게 부디, 사랑이 함께 하기를.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멈추지 않을게 몇 번이라도 외칠게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그림2> 윤석열 체포를 부르짖으며 3박4일 한남대교에서 밤샘 투쟁을 했던 시민들. 은박 담요를 덮고 눈을 맞고 있던 이들의 모습이 은박지로 쌓인 초콜릿 ‘키세스’를 닮았다며 ‘인간 키세스’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 2010년대부터 발생한, 기존 페미니즘의 한계를 반성하고 현대 사회에 맞게 재구성하려는 흐름–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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