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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논리를 당연히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다. 도민혁이 여러 구종을 다양하게 익혀 피칭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것을 류 감독은 컵의 바깥쪽을 열심히 닦는 노력에 비유했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 신자라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잔의 바깥만 열심히 깨끗하게 했던 위선자들이었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매력적인 테니스 만화 <프레너미> 작가가 야구 만화로 돌아왔다. 매주 즐겁게 보다 보니 어느새 1부가 끝났다. 그런데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이 만화, 아니, 아직 여자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은 이 만화는 1부 막바지에서 사랑을 이야기했다. 오늘은 그 사랑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어느 비호감 캐릭터
여러 흥미로운 인물들이 나오지만 1부 막판에 가장 관심을 끄는 캐릭터는 천재적 재능을 갖춘 주인공 송다빈이 아니라 도민혁이다. 도민혁은 두툼한 입술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인상, 잔기술을 익혀서 투수로서의 입지를 확보하려고 하는 태도, 감독의 결정에도 순순히 따르지 않고 설명과 검증을 요구하는 까칠함 등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는 캐릭터다. 모든 면에서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팀 내의 ‘빌런’으로 보였다.
>민혁은 정석적으로 실력을 강화하고 기본을 다지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기술을 익혀서 “많은 구종을 던지며, 타자의 실수를 기대하는 피칭”으로 살아남으려 했다. 감독의 냉정한 평가에 따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투구의 본질을 벗어난 요행 그 자체”를 기대하는 처사였다. 투수로서 최악의 선택을 하는 캐릭터의 전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1부의 마지막 몇 회를 장식하는 전국대회 우승 팀 신린과의 연습 경기에서 민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류천명 감독은 그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요구했고, 그는 감독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리하여 민혁은 “단기간[에]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변화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런 쉽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가능했을까? 많은 구종으로 타자의 실수를 기대하는 피칭은 민혁으로서는 나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텐데 말이다.
헛수고는 없다
류 감독의 냉혹한 평가에 따르면, 민혁의 그런 피칭은 ‘요행을 바란 일’ 정도를 넘어 “더러운 유리잔의 겉면만을 반복해 닦는 행위”다. ‘미련하다’, ‘부질없다’, ‘비효율적이다’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행위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지적에 이어 의외로 민혁의 피칭에 상당히 호의적인 점수를 준다. 그는 민혁의 노력에 따라온 뜻밖의 결과를 말하며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그 부질없는 노력을 정답이라 믿은 채
오랜 시간 미련하게 닦고 또 닦아온 결과
컵 안의 더러움을
더욱 선명히
볼 수 있게 됐다면?
신린과의 연습경기가 끝난 후, 대장고의 류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도민혁의 ‘뻘짓’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 주고는 그것을 일반화시켜 모두를 향해 이렇게 단언한다.
야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어떤 노력이든
이 세상에 ‘헛수고’ 따윈
절대 없단 얘기다.
감독은 자신의 한계를 빨리 마주하는 것이 변화와 성장의 ‘유일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선수들에게 알려주고자 이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처음 감독이 도민혁을 선수들 앞에 세운 것은 그가 감독이 인정한 연습경기의 MVP였기 때문이다. 그날의 MVP에게 감독이 묻는다. “마운드 위에서 어떤 심정으로 공을 던졌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달은 거냐.”
감독이 볼 때 도민혁은 그렇게 자기 한계를 직시하고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 분명한 사례였다. 그것은 감독이 민혁을 위해 마련한 특훈의 결과이기도 했다. 나흘 동안, 패스트볼과 슬라이드, 이 두 구종으로만 코치를 상대하는 훈련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혁은 타자에게 안타를 맞는 것이 두려워서 여러 구종을 구사하려 했던 자신의 한계를 직시한다. 그리고 더 이상 실력 부족을 숨기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제는 실력을 늘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그리고 대장고의 에이스 투수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마운드에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대한 민혁의 답변은 도저히 고등학생의 그것이라 생각할 수 없이 심오하다. “바닥은 두려운 곳이 아니라 가능성이 넘치는 장소였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민혁은 남들을 따라 하는 것, ‘내게 없는 것’들을 모아 조립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내 안에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발전시켜 얻어내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가 발견한 자신의 숨겨진 능력은 그의 출발점에 있었다. 처음 야구공을 던지는 재미에 빠져 학원 시간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잊고 부모가 사방을 뒤진 끝에 자신을 찾아낸 밤 11시까지 하염없이 공만 던졌던, 야구와의 첫 만남이 있었다. 누군가 그를 두고 ‘뭔가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보통 광인은 아니’라 말하게 만든 것. 그것을 야구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하겠는가. 바닥에서 그가 다시 찾은 것은 그 사랑이었다.

웹툰 <낫오버> 포스터.
사랑이라는 동기에 대하여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힘이 빠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목표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떻게든 목표가 정해져도 이렇게 하면 그 목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내 삶의 여정에서 미련하고 부질없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또 얼마나 많았으며 지금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 우리에게 류천명 감독이 말한다. 부질없어 보이는 그 노력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있다고. 컵 바깥만 부질없이 닦고 있다 보니 컵 안의 더러움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컵 안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컵의 더러운 면이 컵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아니면 양쪽 다인지 확인할 길은 일단 한쪽을 열심히 닦아보는 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쪽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길이 그 길로 어느 정도 가보는 것뿐일 때도 있는 것이다.
“야구를 사랑하고 (야구선수로서)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노력이라면 그 어떤 노력이든 ‘헛수고’가 아니라는 류 감독의 말도 마음을 때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력의 종류보다도 그 노력의 동기다. 왜 노력을 하는가. 류 감독은 그 동기가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야구를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더 잘하고 싶어진다. 야구를 잘할수록 사랑하는 야구를 더 오래오래 즐겁게 할 수 있을 테다.
민혁의 사례는 흥미로운 순환을 보여 준다. 민혁은 야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공을 던지는 단순한 일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러다 투수로서 숱한 타자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공이 타자에게 얻어맞는 아픔을 겪으면서 그것을 피할 길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구종을 던져 타자의 실수를 기대하는’ 피칭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대응법의 바닥에서 자신의 출발점인 야구에 대한 사랑을 재발견했다.
물론 야구를 사랑한다고 다 야구로 부와 명성을 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설령 야구선수로 성공하지는 못한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야구를 계속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선수로든 코치로든 팬으로든, 그 무엇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야구를 사랑하고 야구와 함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야구’ 자리에 이것저것 넣어보라. 은근히 마음에 위로가 된다.
‘번역’을 사랑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노력이라면…
‘그녀’를 사랑하고 좋은 연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노력이라면…
이 세상에 헛수고 따윈 결코 없다.
야구와 삶과 신앙의 만남
같은 논리를 당연히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다. 도민혁이 여러 구종을 다양하게 익혀 피칭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것을 류 감독은 컵의 바깥쪽을 열심히 닦는 노력에 비유했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 신자라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잔의 바깥만 열심히 깨끗하게 했던 위선자들이었다. 하나님은 십계명 제2 계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출 20:6)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편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지만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한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던 도민혁처럼, 바리새인들은 거룩해 ‘보이기’ 위해 계명을 지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겉모습’과 그에 따른 평판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런 바리새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니고데모가 다른 바리새인의 대표자라 할 만했다. 그는 컵의 바깥쪽을 정말 열심히 닦는 과정에서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한계를 경험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갔다. 마르틴 루터 역시 컵의 바깥쪽을 열심히 닦은 끝에 오히려 컵의 안쪽이 얼마나 더러운지 뼈아프게 절감했고 절망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는 복음을 재발견했다.
같은 맥락에서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정말 선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6주 정도 힘껏 노력해 보면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도우심을 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율법의 아주 중요한 기능이 바로 이것이다. 거울처럼 자신의 실체를 보게 만들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만든다는 것. 여기서도 동일한 순환이 존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려 할 때 자신에게 절망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절망한 그 자리에서 비로소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은혜를 베푸신 분을 사랑하게 되는 선순환이다.
류천명 감독의 달변을 읽으며 그것이 인생과 신앙의 길과 궤를 같이하는 것을 떠올리고 짜릿함을 맛보았다. 야구와 인생과 신앙의 원리가 하나로 통하다니. 하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그분의 진리를, 그분께로 나아가는 길을 도처에 갖가지 형태로 흩뿌려 놓으셨다. 그 원리에 충실한 것이 영육 간에 사는 길이다. 사랑 때문에, 잘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모든 일을 행하기를, 지금 ‘남에게 보이려고’ 이것저것을 하고 있다면 그 끝에서 오히려 ‘컵 안쪽의 더러움을 보게 되기를’, 그리하여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고 다시금 사랑의 길을 선택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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