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2-3회 발행되는 <좋은나무>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무료),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나는 ‘그러므로 성인들도 아이들처럼 혼나야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이들도 성인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혼나거나 맞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최근의 조사인 세이브더칠드런의 2023년 가정 내 체벌 금지 인식 조사에 따르면, 20-60대 부모 1,000명 중 68%가 여전히 민법에서 징계권이 삭제된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본문 중)
이슬이(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
“아이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야.”
“내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혼을 내야 해? 애들이나 그렇게 혼나는 거지.”
2011년 학교에서의 체벌이 금지되고, 2021년 민법 915조의 자녀 징계권 조항이 삭제된 지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여전히 위와 같은 말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아동학을 전공하고 20년 남짓 이 분야에서 일해 온 나와 이 ‘업계’에서는 이런 표현이 금기어처럼 여겨지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아직도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게 현실일 것이다. 왜 아이들은 맞으면서 커야 하고, 크게 혼나도 되는 걸까? 어른들은 그렇지 않은데.
나는 ‘그러므로 성인들도 아이들처럼 혼나야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이들도 성인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혼나거나 맞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최근의 조사인 세이브더칠드런의 2023년 가정 내 체벌 금지 인식 조사에 따르면, 20-60대 부모 1,000명 중 68%가 여전히 민법에서 징계권이 삭제된 사실을 알지 못한다. 또한 자녀에 대한 신체적 체벌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35.9%에 불과해, 많은 성인이 여전히 일부 신체적 체벌이 가능하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체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훈육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아이들의 훈육에서 체벌 대한 강경한 입장은 왜 없어지지 않는 걸까?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아이와 성인을 다르게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일반적으로 성인이 성인을 대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회사에서 동료가 실수를 해서 나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을 때, 우리는 화가 나더라도 감정을 조절하고, 동료가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고려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 지금 내가 홧김에 하는 말이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잠시 누그러뜨릴 시간을 가진 후 화내지 않고 말할 수 있을 때 대화를 시도하려 할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동료에게 순간의 감정을 불쾌한 말이나 날카로운 눈빛과 거친 목소리, 더 나아가 ‘등짝 스매싱’과 같은 행동으로 표현한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될까? 동료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마 당분간 회사를 편히 다니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성인과 아동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내일 입으려고 골라 놓은 옷에 아이가 주스를 쏟거나, 자려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아이가 내일 필요한 준비물을 사야 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떤 것일까? 동료에게 했을 법한 것처럼 ‘나이스’하게 행할 수 있을까? 성인 동료에게는 비교적 수월하게 적용하는 소통의 과정을, 아이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성인 동료보다 아이가 더 큰 실수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동료와 아이를 대할 때 나도 모르게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친구에게 천천히 쉬운 말로 설명하며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회사에 막 들어 온 신입 사원에게 건물 곳곳의 위치와 물건 사용법 등을 설명해 주며 적응을 돕는 것처럼 아이들을 대한다면 어떨까? 성인들과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활동을 인도할 때 이런 예시를 들어서 이해를 돕곤 한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그런 곳일 수도 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과 같은 곳, 제법 알 것은 알고 할 것은 할 줄 알게 되었지만 아직은 낯선 상황의 연속인 새로 출근한 회사 같은 곳 말이다.
아이들은 처음 겪어 보는 세상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낯선 환경,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들 속에서 매 순간 도전하고 적응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존재다. 이런 삶을 살아내며 온갖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호된 질책보다 그 도전과 적응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어른의 존재가 아닐까?
학교 내 체벌 금지법 제정이나 민법에서 징계권의 삭제는 아이들을 훈육하지 말고 무조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자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바라보고 인식했던 관점을 돌아보고, 아이들도 존중받아야 할 동등한 인격체로 새롭게 보고 훈육 방법을 달리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징계권이 삭제된 걸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비폭력적으로(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훈육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단번에 나의 생각이나 행동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의도를 품는다 해도 단숨에 전환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나의 어린 시절, 내 인생의 어떤 순간에, 누군가 내게 전했던 따뜻함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그리고 그때의 느꼈던 그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것, 즉 존중을 전해 보겠다고 결심하자. 아이들은 아직 존중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도 있고, 우리라는 세계로부터 그것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해 주고 그 따뜻함을 받은 아이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전해 주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서, 그렇게 하자.
민법에서 징계권이 삭제된 지 4년이 지났다. 이 법률 개정의 의미를 우리 사회가 온전히 알아가고, 새로운 관점으로 아동과 훈육을 바라보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마치 ‘지구는 평평하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처럼, ‘아이들은 맞으면서 큰다’라는 말이 어이없는 말로 여겨지는 날이 속히 오길 바라본다.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