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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소통이다. 같은 알고리즘을 따르는 이들과는 공감하며 의기투합하지만 지나온 길이 조금만 달라도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른다. 나는 확신의 주먹을 쥐는데 상대는 코웃음을 친다. 아니, 이렇게 분명하고 쉬운 걸 왜 모르지? 그런데 그들은 또 그들만의 확신이 있다. 내 설명이 그들에게 먹히지 않듯 그들의 주장도 내 눈엔 완전 엉터리다. 같은 일, 같은 역사를 두고도 어떤 유튜브를 보았느냐에 따라 해석은 정반대가 된다. 알고리즘이 다르면 소통이 거의 불가능이다. 시날 평지를 혼돈의 바벨로 만든 그 불통이 우리 시대에 재현되고 있다. (본문 중)
권수경(목사, 일원동교회)
디지털 문화
컴퓨터와 디지털 문화는 기나긴 인류 문명사에서 단연 새로운 것이다.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며 발전해 온 인류가 디지털 기술과 함께 신세계를 맛보고 있다. 문화의 축은 언어다. 사람이 말로 소통하며 지식이 늘었다. 문자의 발명으로 지식의 정착과 축적이 가능해졌고, 인쇄 문화는 지식의 대량 확산으로 이어졌다. 디지털 기술은 이런 지식, 곧 정보를 만들고 보관하고 전달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컴퓨터, 인터넷, 유튜브, 그리고 인공지능이 그 주역이다. 디지털 기술은 말에서 글로, 또 책으로 이어온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어쩌면 인류가 경험할 마지막 변화일 수도 있다.
디지털 문화의 한 특성은 정보의 양이다. 생성, 보관, 처리, 복사, 전달 등이 쉬워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가 쌓이고 있다. 과거엔 그냥 사라지던 내 위치와 이동 경로까지 이제는 정보로 남는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정보의 바다에는 다 모여 있다. 동강이 흘려보낸 자료와 서풍을 타고 온 정보가 질서정연하게 모여 다름과 모순의 집합을 이룬다. 그 많은 정보를 어떻게 꺼내 지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서 말 아니라 억, 조를 헤아리는 구슬을 무엇으로 꿸 것인가가 문제다. 여차하다가는 내가 바다에 빠져 익사할 수도 있다. 전에는 지식을 생산하는 학자들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방대한 그 지식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기술자들의 역할이 더 커졌다.
물론 그런 일을 맡은 개별 인격체는 없다. 집단 인격과 거대한 시스템이 함께 아무도 모르게 이 일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알고리즘이다. 컴퓨터가 일을 처리하는 절차나 방법이 확대 적용되어 인터넷이나 유튜브의 정보 취득 과정이 되었다. 정보의 양이 무한대로 수렴해도 사람의 두뇌가 소화할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다. 망망대해를 휘젓고 다녀도 손가락에 걸리는 몇 가지만 건진다. 티끌에도 못 미치는 극히 제한된 정보가 우리의 지식을 이룬다. 인간의 욕심, 개인적 취향, 주위 환경 등도 영향을 미치겠으나, 기본 틀은 기계의 인과 법칙이다. 내 취향을 인터넷도 알고 반영하므로 알고리즘은 곧 나와 기계의 동행이다.
전문가 세상
디지털 시대의 정보는 전문성이 높다. 그리고 너무나 쉽다. 조금만 끌어와도 순식간에 전문가가 된다. 전에는 공부를 해 지식을 쌓아야 했다. 책을 읽고 논문도 쓰고 토론도 하면서 앞뒤를 짜맞추어 체계를 만들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따라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유튜브 동영상 몇 개만 보면 누구나 멋진 체계를 갖출 수 있다. 남들 앞에서 전문가 행세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완벽한 답을 갖고 늘 대기하니 막힐 걱정도 없다.
디지털 정보의 전문성은 내적 일관성이다. 정보의 양이 무한에 가깝다 보니 사실 여부는 무의미하다. 진리의 개념 자체가 변한 것이다. 내적 일관성을 갖추고 가까운 다른 정보들과도 일치하면 팩트 체크를 뛰어넘는 권위가 생긴다. 원천이 무한하니 서로 맞는 정보를 고르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들을 모아 전하는 유튜브 전문가의 설명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다. 그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나만의 관점을 확보할 수 있다. 알고리즘이 길어질수록 확신도 커진다.
문제는 소통이다. 같은 알고리즘을 따르는 이들과는 공감하며 의기투합하지만 지나온 길이 조금만 달라도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른다. 나는 확신의 주먹을 쥐는데 상대는 코웃음을 친다. 아니, 이렇게 분명하고 쉬운 걸 왜 모르지? 그런데 그들은 또 그들만의 확신이 있다. 내 설명이 그들에게 먹히지 않듯 그들의 주장도 내 눈엔 완전 엉터리다. 같은 일, 같은 역사를 두고도 어떤 유튜브를 보았느냐에 따라 해석은 정반대가 된다. 알고리즘이 다르면 소통이 거의 불가능이다. 시날 평지를 혼돈의 바벨로 만든 그 불통이 우리 시대에 재현되고 있다.
오만의 종교
그렇게 온 세상이 아는 나와 모르는 너희로 나누어진다. 디지털 시대의 지식은 배타적이다. 모두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정보를 축적해 간다. 이따금 대화를 시도해 본다. 하지만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사상이든, 나만의 세계에 너무 깊이 안착해 접촉점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모두의 관심사인 정치적 이슈에는 저마다의 확고한 관점이 있기에 우리 시대의 이념 대립은 과거와 격을 달리한다. 그런 배타적 지식은 우리를 독선과 오만에 몰아넣는다. 확신이 강할수록, 알고리즘의 길이가 길수록, 남들을 향한 경멸과 혐오도 커진다.
그런 오만함은 곧 편협함이기도 하다. 알고리즘은 대개 외길이다. 가늘게 형성된 허약한 일관성은 조금만 옆으로 나가도 휘청거린다. 다른 분야의 정보와 조화되지 않는 까닭이다. 혹 된다 해도 외줄을 타고 온 내가 알 길이 없다. 자칫하다간 영영 길을 잃는다. 내 지식의 오류를 감추고 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분야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말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 아니 약간이라도 벗어난 분야의 논의에는 아예 끼어들지 않는다. 편협함은 독선이 낳은 서자다.
소통 불가능한 지식으로 절대 확신을 얻었으니 이미 종교다. 사실 여부가 무의미하고, 다른 정보와의 일치도 중요하지 않고, 그럼에도 내적 설득력 하나로 절대 확신에 이른 그것은 급기야 성령의 내적 조명에 필적하여 우리 삶의 모든 요소를 주도한다. 지성을 넘어 감정과 의지까지 장악한 강력한 세계관이다. 놀랍게도 기존의 신앙도 이 세계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알고리즘이 형성해 준 확신과 이념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시라는 고백마저 억누른다. 정보에 장악당한 가련한 영혼이 적지 않다. 종교든 무속이든 개의치 않고 같은 이념이 최고라며 축복해 주는 목사도 그런 부류다.
디지털 영지주의
디지털 시대에 영지주의의 부활을 본다. 이천 년 전 신약이 기록되던 무렵 영지주의라는 이름의 영육 이원론이 서양과 근동을 지배했다. 귀한 영과 천한 몸의 영원한 공존을 전제하고, 거룩한 영혼이 더러운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었다. 그 구원을 위해 남들은 모르는 비밀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기독교 교리를 왜곡했는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부활과 재림, 그리고 성도에게 약속된 몸의 부활을 부인했다.
이 영지주의 이단이 우리 시대 디지털 기술과 함께 되살아났다. 이름하여 디지털 영지주의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지식이라는 점, 그 지식이 나를 구원한다고 믿는 점, 그리고 그 지식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주님의 교회를 어지럽힌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의 재현이다. 이 새로운 영지주의는 특히나 주님의 십자가를 거부한다. 희생과 사랑 대신 알고리즘을 따라 배운 승리주의, 정복욕을 기독교 신앙과 뒤섞어 하나님의 나라 아닌 세상 나라를 주도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독교 신앙이라 착각한다.
교회가 급속히 고령화되면서 디지털 영지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적지 않은 어르신들이 말씀과 성령 대신 유튜브 알고리즘의 인도를 받는다. 목사도 다르지 않다. 똑똑한 성도들 앞에서 말씀의 전문성 확보가 어려운지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이념으로 권위를 확보하고 말씀은 후추 정도로 뿌려 강단에서 선포한다. 목사의 알고리즘을 배운 교회는 성령 없는 이념공동체로 함께 세워져 간다. 그렇게 이념과 탐욕의 우상에게 장악당한 것이 우리 시대 강단과 말씀의 현주소다.
사랑의 알고리즘
상황은 무척 비관적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해 아래 새것이 없음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만이 새롭다는 것이요, 그 구원을 담고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에만 소망이 있다는 뜻이다. 이천 년 전에도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가장 중심된 진리가 영지주의를 내쫓고 교회를 지켰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말씀의 터를 든든히 다져 이 디지털 시대를 주도해야 한다. 말이 글로, 또 책으로 바뀔 때 교회는 앞장을 섰다. 이제 디지털 세상에서도 거짓과 이단을 내쫓고 성경적 진리를 굳건하게 세워 유튜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영혼들에게 구명의 콘텐츠를 던져주어야 한다.
핵심은 본질 회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이보다 소중한 정보가 또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바벨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독선과 오만과 혐오에 갇힌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금 이어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인종, 성별, 계급을 뛰어넘는 십자가 복음이 이념 하나도 허물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사랑의 알고리즘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인데, 실제로 성경적 세계관을 어떻게 구현해 갈 수 있을지 아직은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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