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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기 전까지 광주 동명동(옛 전남도청 도보 20분 거리)에 사셨던 할머니께서는 1980년 5월의 공포를 가끔 이야기해 주셨다. 아들 셋과 막내딸 하나를 키워내신 할머니는 첫째 아들이 죽을까 봐 애타게 찾으러 돌아다녔으며, 밖에서 나는 총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두꺼운 솜이불로 온 창문을 막아 두셨다고 했다. 그때의 군인들이 일제 강점기 순사만큼 무서웠다고 하셨다. (본문 중)
이명진(기윤실 간사)
광주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모두 고향에서 보냈다. 1997년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을 때, 기뻐서 울먹이던 부모님 모습을 기억한다. 광주에서 평생을 사신 두 분은 광주가 겪은 차별과 설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 주셨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으니 이제 그 한을 조금 풀 수 있을까 기대하셨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5·18 광주 항쟁은 내가 태어나기 딱 10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 자세한 내막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엄마, 아빠가 좋아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같은 해 5·18 신 묘역(국립 5·18민주묘지) 건립이 완공됐을 때, 바로 옆 망월 묘지공원(5·18 구묘역)에 묻혀 계신 할아버지 성묘를 마치고, 친척들이 새로 묘역이 완공됐으니 한 번 둘러보고 가자고 했었다. 멋모르고 따라갔다가 입구부터 추모탑까지 이어진 5·18 희생자들 사진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진 얼굴, 늘어진 시신들, 흥건한 핏자국들과 관을 감싼 태극기 등 어린 나이의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희생자들 중에는 나 같은 어린이들도 있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왜? 시민들에게 이렇게까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광주 동명동(옛 전남도청 도보 20분 거리)에 사셨던 할머니께서는 1980년 5월의 공포를 가끔 이야기해 주셨다. 아들 셋과 막내딸 하나를 키워내신 할머니는 첫째 아들이 죽을까 봐 애타게 찾으러 돌아다녔으며, 밖에서 나는 총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두꺼운 솜이불로 온 창문을 막아 두셨다고 했다. 그때의 군인들이 일제 강점기 순사만큼 무서웠다고 하셨다.

5·18 민주광장 전경. photo by 김정슬기, 장지연
고등학생 때 사회 과목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5·18 부분을 알려 주시다 잠깐 설명을 멈추시곤, 무거운 표정으로 본인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다.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며 박정희에게 대통령 표창까지 받으셨지만, 하와이 출신(당시 전라도를 ‘하와이’로 부르던 은어가 존재했다)이라 차별받아 대위에서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 후 교사가 되신 분이셨다. 그리고 1980년 당시 본인이 계엄군으로 광주에 와 있었다며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참회한다고 하셨다.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폭도로 바라보게 하기 위해 수면을 제한하고 구타를 하는 등 세뇌 작업이 지속됐다고 증언하셨다.
광주에서 대학에 다닐 때는, 교양 수업으로 편성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목을 수강했다. 5·18 때 기성 언론의 왜곡 보도 대신 <투사회보>를 발간하며 대안 언론 운동을 주도한 ‘들불야학’ 출신 교수님의 과목이었다. 그분은 5·18에 무덤덤한 요즘 청년들을 매우 안타까워하셨고, 동학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부터 이어지는 전라도의 저항사와 1980년 그날의 일들을 하루씩 자세히 알려 주셨다. 중간고사 시험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부터 5월 27일 도청 사수 작전까지 10일 간의 항쟁 일지를 작성하는 것이었고, 기말고사 시험은 5·18 주요 사적지를 방문하며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이때 배웠다.
성인이 된 후에는 광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접 겪지도 않은 5·18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자주 얻었다. 북한군 투입설, 최초 사망자 왜곡,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 등 끝없이 광주의 역사를 모욕하고 흔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광주 항쟁 ‘덕후’가 되고자 다짐했다.
그리고 이후 5·18을 공부하며 이 나라의 정의(正義)를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보안사(현 방첩사)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고, 이후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서리까지 장악하며 권력의 정점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5·18 최초 발포 명령의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을 보았다. 5월 이후 그는 두 번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사과와 반성 없이 사면 복권을 받았다. 반성은커녕 인생 말년에 거짓 회고록까지 발간하며 끝까지 당당하게 나이 들어 죽었다. 최근엔 계엄군의 총칼에 시민들이 쓰러져간 금남로 거리에서,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을 ‘계몽령’이라 주장하는 개신교 주도의 집회도 있었다. 지금도 존경받는 저명한 목사들이 1980년 8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전두환을 축복했던 역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1)
동명동의 대형 교회에 출석했던 나는 5·18 당시 우리 교회는 무엇을 했느냐 따져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담임 목사님은 청년들의 희생을 볼 수 없어서, 기도실에서 기도 중인 이들을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고 끝까지 열어 주지 않았다고 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심정을 태어나지도 않았던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불의에 부역하는 역사를 반복하진 않아야 한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적 행동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1) 지유석, “전두환 축복했던 목사들… 개신교는 5.18 왜 사과 안 하나”, 「오마이뉴스」, 2020.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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